그때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동백은 지나가던 병사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노 중랑장님의 제자라 하는 이가 군 오백을 이끌고 왔다 합니다요.”
“노 중랑장님의 제자?”
“예, 예. 탁현의 유비라는 자던데…….”
면전에서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동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백의 안색이 영 심상치가 않자 말을 전한 병사 또한 당황했다.
‘내가 혹시 말실수를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유비라는 자가 알고 보니 유명한 자라 했던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촌구석 필부 아닌가. 천하의 소동백이 안색을 달리 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 병사의 의아한 표정에 동백은 황급히 얼굴을 추슬렀다.
“알겠네, 이만 가 보게.”
동백의 손짓에 병사는 묵례를 하고 그 자리를 떴다. 병사야 필부로 넘겼지만 동백은 탁현의 유비라는 이름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삼국지의 세 군주 중 한 사람. 촉의 건국자. 한중왕 유비.
강력한 여왕 후보를 예상치 못하게 맞닥트린 동백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동백은 우선 조조와 유비, 둘 중 하나가 여왕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오나라의 초대 황제인 손권의 경우,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부친인 손견과 형인 손책이 죽지 않았더라면 손권이 오왕이 되었을지는 미지수란 말이지. 나이도 너무 어리고. 내가 손견과 손책을 살린다면 손권은 빛을 잃게 될 텐데, 그런 상대가 과연 여왕일까…….’
그렇게 상념에 잠긴 찰나, 시끌시끌한 소란이 좀 더 가까이로 다가왔다.
동백은 무의식적으로 소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 멀찍이 노식의 막사 앞에선 사내 셋이 보였다. 가운데 있는 남자는 다소 평범한 체격이었지만, 뒤에 있는 두사람은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 보였다.
노식이 손수 장막을 걷고 그들 일행을 맞아들였다. 동백은 혀를 찼다. 굳이 호불호를 따지자면 노식과 유비 둘 다 불호였다. 싫은 놈이 싫은 놈과 친하다는 것은 두 배 그 이상으로 불쾌한 일이다. 동백은 노식의 막사에서 등을 돌려 제 영으로 향했다.
“우군사마님! 자, 잠시, 기다려 주세요! 우군사마님!”
그렇게 제 막사 근처에 다다랐을 때, 본 적 없는 병사가 애타게 동백을 불렀다. 가까스로 동백을 따라잡은 병사가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노 중랑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급한 일인가?”
“어, 음…….”
동백이 되묻자 병사는 조금 곤혹스러운지 말을 늘렸다. 제 멋대로 말해도 되는가에 대해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노 중랑장님 옛 제자가 찾아와서…….”
병사는 말을 흐렸다. 여기까지는 팩트, 그리고 덧붙인 말은 추론이었다.
“아마 얼굴을 익히게 하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조심스레…….”
“알겠네. 바로 가지.”
보아하니 옛 제자도 제자라고 여기저기 눈도장 찍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동백은 발걸음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 조조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탐색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조조와 얽히는 것 자체를 꺼려 했다. 그와 대화를 할 때마다 서로를 재 보고 파악하려 날 서 있는 모든 과정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알아 둬 나쁠 건 없었다. 원소 또한 그러했고, 유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백은 천연덕스레 얼굴에 생긋 미소를 가장했다.
저 앞에서 원소가 먼저 노식의 막사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원소 또한 노식의 제자 인맥 만들어 주기에 동원된 듯싶었다.
동백 또한 금세 노식의 막사 앞에 섰다. 노식의 막사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동백을 알아보고 장막을 열어 주었다.
“고맙네.”
작게 호의를 표시한 동백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의 시선이 동백에게 쏠렸다. 동백은 노식에게 바로 군례를 취하였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러네. 내 원본초와 소사량에게 알고 지내게 하고 싶은 이가 있어 불렀다네.”
노식은 괜히 친한 척하며 동백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동백은 원소의 옆자리에 앉아 삼 형제를 마주보게 되었다.
원소의 멀끔한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없었으나, 그의 무릎 위로 꽉 쥐인 손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백이 노식 아래 배치되었을 때의 경우, 동백의 직위가 원소보다 높았기에 원소가 인사하러 찾아온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위도 없는, 무뢰배나 다를 바 없는 이를 소개하기 위해 일부러 부르다니. 원소는 이 상황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소는 상황이 탐탁지 않아도 노식의 체면에 찬물을 끼얹을 인사는 아니었다. 원소 본인의 평가를 위해서도 그러했다.
노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과 저들 사이를 소개했다.
“여기 이 아이는 탁군에 사는 유비로, 자는 현덕이며 한실 종친일세. 지난번 내가 신병을 핑계로 은거했을 때 얻은 제자인데 이번에 향리의 용사 오백을 모아 이 옛 스승을 돕고자 찾아왔네.”
동백은 마주하는 기회를 틈타 유비 일행을 훑어보았다.
가운데 앉은 유비는 남루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름한 차림새였다. 자못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웃는 듯 살짝 접힌 눈 안의 눈동자는 재치와 총명으로 번쩍였다. 상투를 틀기 위해 머리를 끌어 올려 드러난 귀는 듣던 대로 컸으며, 탁자 위에 올라온 손은 옆의 이들보다 한 뼘가량 더 앞으로 나와 있었다.
유비의 우측 옆에 있는 이는 얼굴이 다소 붉었고 수염이 2자(* 약 60cm) 정도로 길었다. 앉아 있어 정확한 키는 모르나 그곳에 있는 이들 중 제일 불쑥 위로 올라와 있었다.
이건 뭐 더 보나 마나 한 생김새였다. 관우였다. 부리부리한 눈은 붉은 봉황의 눈과도 같았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제된 기운은 이미 완성된 것이었다. 긴 수염 탓에 언뜻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잘 뜯어본 얼굴은 스물 초반 즈음이었다.
유비와 관우가 그다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장비는 수염이 숭숭 난 털보에 체격이 좋은 대중 매체의 이미지와 완전 딴판이었다.
10대 후반쯤일까.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얼굴은 귀티가 났으며 객관적으로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얼핏 보니 원소와 키가 엇비슷할 정도로 컸지만 다소 호리호리했다. 입을 꽉 다물고 앉은 그는 왠지 성이 난 듯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관우가 제법 옷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유비 또한 허름한 옷이나마 구색을 갖춘 것에 비해 장비는 어딘지 모르게 느슨하게 풀어 헤쳐진 옷매무새와 더불어 봉두난발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머리카락이 산발이었다.
그런 것을 통해 짐작한 장비의 성격만큼은 동백이 알고 있는 것과 썩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성격만큼이나 짐작대로인 것은 바로 무술 실력이었다. 유비의 무재 또한 나쁘지 않겠지만, 관우와 장비는 검을 맞대 보지 않았음에도 무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싸우지도 않고 패배의 기색을 읽은 것은 하후돈 이후로 처음이었다.
확실히 주의해야겠어. 대충 원하는 정보를 재빨리 얻어 낸 동백은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까. 노 중랑장님 휘하에서 우군사마라는 직책을 맡은 소사량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대방을 높이는 기색도 없고 자신에 대해 덧붙임도 없는 깔끔한 자기소개였다.
동백이 자신을 선뜻 소개할 줄 몰랐던 유비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내 유비는 동백과 원소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공손히 인사하였다.
“유현덕입니다. 한낱 촌부인 제가 이런 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눈이 트이는 기분입니다. 많은 가르침을 빌겠습니다.”
“원본초라 합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빌겠습니다.”
원소는 그제야 유비에게 아는 척 대꾸를 해 주었다.
다만 거기서 끝이었다. 침묵하는 세 젊은이, 아니, 다섯 젊은이들의 모습에 노식은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넌지시 유비에게 말을 건넸다.
“천하의 영웅들을 마주하니 어떠냐? 특히 소사량은 어린 나이임에도 우군사마로 발탁될 정도의 인물이지. 원본초 또한 천하에 이름을 내놓는 영걸이다.”
“안목이 새롭게 열리는 듯합니다. 두 분 다 외모 또한 눈이 부신지라 영웅에 걸 맞는 풍모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미천한 비의 눈에 광영이 들이닥치니, 이 어찌 감읍하오리까.”
“과분한 말씀입니다. 내가 보니 유공 또한 범상치 않아 뵙니다. 그 기이한 체모 또한 영걸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백은 유비의 과분한 치켜세움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유비는 자신의 큰 귀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함이며, 자신의 긴 팔은 많은 사람을 품기 위함이라며 내심 자랑스레 여겼다. 유비는 동백의 칭찬에 손사래를 쳤으나 마음으로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름 화기애애한 대화가 주거니 받거니 이어졌다. 원소는 저번에 말하는 거 보니 말주변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영 대화에 끼려 하지 않았다. 확실히 원소는 집안과 직위, 그리고 자신에게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중점적으로 보는 것 같았다.
제자가 지원 오기는 하였으나, 이곳엔 이미 원소와 소동백이 있었다. 충분히 이곳을 처리할 병력이 된다 생각한 노식은 차라리 유비를 황보숭이나 주준 쪽으로 보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지금 이곳은 내가 적의 괴수 장각을 포위하고 있으니 너는 영천(潁川)으로 가라. 그곳에는 황보숭, 주준 두 장군이 장각의 아우 장보, 장량과 각각 대치하고 있는 바, 이곳보다 훨씬 형세가 불리하다. 이미 이곳은 소사량이 지원 오기도 하였으니만큼 그쪽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 따로 1천 군마를 지원할 터이니 그곳으로 가서 두 분 장군과 함께 적도를 소탕하도록 해라.”
“불초 제자, 스승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소사량은 내 군사 중 12대부터 22대까지를 떼어 유비에게 주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동백은 군례를 취하고 천여 명을 추려 유비에게 건네주기 위해 먼저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원소가 저도 데려가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동백은 나서다 말고 멈칫하였다.
솔직히 원소는 지금까지 유비와도 몇 마디 나누지 못하였고, 나눌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당연히 어색한 저 상황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으리라.
“천여 명이나 되는 군사를 추리려면 다소 힘이 드오니, 원본초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노 중랑장님도 옛 제자와 바로 헤어지게 생기신 바, 잠시나마 회포를 푸시지요.”
동백의 제안에 노식은 좋다 고개를 끄덕였다. 원소의 표정에 안도가 서렸다. 원소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며 노식에게 군례를 취하고 쌩하니 동백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