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87)화 (87/522)

리리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려 애썼다. 보다 못한 유비가 리리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거칠고 무례한 그 손길에 리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뿌리쳤다.

“……!”

“어이쿠, 아, 그랬지. 미안하오. 내 아가씨, 아니, 부인 연치가 너무 어려 결혼한 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소. 좋소, 좋아. 내외하리다.”

유비는 바로 리리에게서 손을 떼고 항복의 표시처럼 양손을 치켜세웠다. 마치 그녀가 트집을 잡기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태도였다.

리리로서는 차라리 저렇게 거리를 둬 주는 게 나았다. 간신히 일어선 리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낙양에서 떠날 때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처참한 흔적만이 남았다. 리리는 자신의 옆에 쓰러진 유모의 뜬 눈을 조심스레 감겨 주었다.

‘유모…….’

“시체 묻어 주고 뭐 하고 할 시간 없으니, 빨리 중요한 짐만 챙기시오.”

리리의 생각을 꿰뚫어 본 유비가 한발 먼저 엄포를 놓았다. 유비는 리리를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죽은 이는 이미 끝이오. 그걸로 시간을 뺏는 걸 보고 시간 낭비라고 하는 게요. 부인의 유모가 이리 시간을 헛되이 보내라고 당신을 살린 게 아닐 텐데.”

리리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안 된다고 하니 말문이 막혔다. 저들이 자신을 거추장스러워하니, 차마 거듭 요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죽은 유모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리리의 가슴을 찔렀다.

“이 황건적으로 가장한 이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소. 후발대라도 쫓아오게 되면 난감하오.”

“……알고 있습니다.”

리리는 넘어오는 신물을 도로 삼키며 힘들게 답했다. 리리도 유비가 뭘 염두에 두는지 알았다. 리리는 참혹한 유모의 시체를 내버려 둔 채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차 근처를 살피던 장비가 휘파람을 불었다. 장양이 담량에게 보내는 선물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마어마하구만! 형님, 이걸 그냥 두고 갈 순 없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장비의 말에 유비 또한 패물을 살폈다. 이 정도라면 당분간 군량 걱정은 없을 것이다. 유비는 희희낙락하며 리리를 돌아보았다.

“대가로 이건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 어차피 저 황건적을 사칭한 놈들에게 빼앗겼을 테니까.”

“그러십시오. 저를 구해 주셨으니 중상시 나리께서도 응당 허락하실 겁니다.”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지고 가지도, 지키지도 못할 것들이다. 만약 저걸 가져가는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했다가 저들의 심기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대가를 저 패물로 치를 수라도 있다면 싼값이었다.

아버지가 반길 모습만 그리며 마차를 타고 먼 길을 왔는데,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 리리의 얼굴에 우울함이 드리웠다.

저들은 자신을 습격한 황건적이 관군이라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습격한 게 분명했다. 과연 누구일까. 그녀를 향한 살의와 악의에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이곳을 지나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 설마 아버지가?’

리리는 차오르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막았다. 어쩌면 아버지의 병환이 깊다는 것 또한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친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 자신의 체면을 떨어트린 딸자식 따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리리가 담량의 외동딸로 단 둘뿐인 가족이기는 했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녀 사이가 살갑지는 않았다. 담량에게 있어 리리는 자신의 명예의 산물이었고, 리리에게 담량은 하늘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는 동시에 짓누르는, 세상의 지붕이었다.

담량은 세간의 평판을 위해 재가하지 않고 리리를 키워 자신의 고고한 명예를 드높였지만, 암암리에 밖에 외첩을 두고 서자를 낳았다. 리리는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지만, 담량이 자신의 후계를 위해 그리 오래지 않아 그 외첩을 집에 들일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동백과의 결혼이 기꺼웠다. 자신의 세상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리리는 담량에게 쓸모를 잃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펼쳐진 것이리라.

순간 시야가 핑 도는 기분이 든 리리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유모의 죽음, 부친의 음모, 위태한 상태…….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 높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왔지만, 리리는 아득바득 정신을 붙잡았다.

이렇게 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렇게 동백과 헤어질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의 행복은 더 이상 담가에 있지 않았다. 리리는 자신이 응당 돌아가야 하는 동백의 곁을 그리며 의지를 다졌다.

* * *

안 그래도 하늘이 시종일관 꾸물쩍하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공기 중에 습기가 차올랐다.

“서두릅시다.”

말의 등에 패물을 잔뜩 실은 관우가 재촉했다. 패물이 어찌나 많던지, 3형제의 말 3마리를 전부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유비는 안타까이 혀를 찼다.

“아쉽네그려.”

“아이고, 욕심도 많소. 이따 부하들을 보내서 챙겨 오라 할깝쇼?”

“됐다. 관군이 황건적으로 가장한 것도 수상쩍은데, 저 꼬마를 죽이려 들었잖나.”

“하긴. 여자아이를 팔아넘기는 게 아니라 죽이려 한다? 명백한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분명 선발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후발대가 나설 거야. 최대한 얽히지 말아야지.”

그리 말하며 3형제는 자신들의 병사가 있는 곳으로 말을 몰며 걸어갔다. 올 때는 순식간이었지만, 막상 다시 돌아가려니 길이 제법 되었다.

말을 타지 못하고 걸어가는 데다, 같이 가는 리리의 발걸음이 느리니 속도가 더욱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빗줄기도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관우는 뒤에서 비틀거리며 힘겹게 발을 옮기는 어린 리리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유비가 잡아 일으켰던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니, 그녀를 업는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장양이나 소동백이 그런 자신들의 태도를 아녀자 추행이니 뭐니 하며 트집 잡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명분과 의기만으로 집결한 세력이니만큼, 그런 논란에 특히 취약했다.

“아야!”

그러던 와중 리리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리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이미 3형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 뒤였다. 자신이 짐덩이가 된 기분에 리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지부진해지는 상황을 보다 못한 장비가 버럭 외쳤다.

“승질나서 못 해 먹겠네!”

장비는 홱 뒤돌아 리리에게로 다가오더니, 돌연 손을 번쩍 들었다. 갑자기 들소처럼 돌진하는 것도 모자라 손을 드는 모양새가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하려는 것 같아 리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 대신 시야가 빙글 뒤집혔다.

“뭘 이걸 비위를 맞추고 있소? 급하면 후딱후딱 가야지.”

“무슨!”

리리는 미약하게 소리 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장비의 어깨에 짐짝처럼 둘러메진 뒤였다.

“갑시다. 이 계집애 장단 맞추다가 해가 지겄소.”

“이거 놓으세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게 고집은!”

리리는 나름 반항한다고 해 보았지만 호리호리한 체구와 달리 힘이 장사인 장비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장비는 그런 저를 어처구니없이 쳐다보는 관우와 유비를 성큼성큼 걸어 지나쳤다.

“뭘 그리 보우? 형님들이야 군자시니 유부녀에겐 손도 못 대두 나는 아니라 이거야. 난봉꾼 동생 난봉 피우는 거 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어서 갑시다!”

도리어 성질을 버럭 내는 꼴이 과했다. 저도 내심 부끄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관우와 유비는 그런 동생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웃지 마우!”

장비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외쳤다. 그러는 사이 리리는 한껏 발버둥 쳤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잠깐.”

그때, 관우가 돌연 멈췄다. 관우의 눈짓에 3형제의 얼굴이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이 빛났다. 리리의 귀에는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렸지만, 3형제의 예민한 귀에 저 멀리서부터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잡혔다.

“숲을 싹싹 뒤져!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3형제는 무기를 빼들었다. 리리 또한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숨을 죽였다.

오래지 않아 수풀 너머에서 황건적 차림을 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열댓 명쯤 될까. 3형제와 마주친 황건적의 얼굴이 찡그려졌다가, 이내 리리를 발견하곤 히죽 웃는 낯짝으로 바뀌었다.

“보아하니 그 계집과 우연히 맞닥트린 이들 같은데, 그 계집만 내어 주면 해코지하지 않겠다.”

“…….”

리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들이 저를 내어 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맴돌았다. 장비의 어깨의 매달린 리리의 몸이 식은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고작 세 사람이라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적들이 그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3형제는 천연덕스레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했다.

“아…….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꼭 이렇게 따라잡히네. 귀찮게.”

“도대체 뭔 짓을 저지르면 이렇게 집요한 추적자가 생긴답니까?”

“장양 같은 짓거리를 저지르면 되겠지.”

“하여간 이러니 결혼을 잘해야 한다, 이겁니다. 요 계집애도 남편 한번 잘못 골랐다가 이게 뭡니까? 인연을 잘못 맺으면 탈이 나도 단단히 나요.”

“내가 그래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인가 보다. 장비 네 녀석이랑 인연을 잘못 맺었어.”

“아이고, 형님. 형님은 내 덕에 그나마 지금껏 목숨 붙어 있는 게요. 내가 형님 살려 준 것만 몇 번인지 아오?”

“그렇게 치면 제일 억울한 건 운장이겠군.”

“둘 다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십시오. 적들이 포위를 좁힙니다.”

관우가 계속해서 헛소리만 하는 두 사람을 일깨웠다. 유비는 여유롭다 못해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사내들에게 한 발짝 나섰다.

“해코지하지 않겠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에 넘어가는 이도 있느냐? 황건적으로 변장해 아녀자의 목숨을 노리는 이가 목격자를 살려 줄 리가 만무하지 않으냐.”

“하, 기어코 제 발로 사지로 기어들어 오는구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비웃었다. 나무 사이로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들을 포위했다. 잠시의 침묵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서로를 간 보는 시간이 지난 뒤, 마치 현이 끊어져 튕겨 오른 것처럼 황건적들이 3형제를 일시에 덮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