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98)화 (98/522)

비교적 충격에서 빨리 빠져나온 것은 오늘 동백과 처음 만난 덕에 딱히 실수한 일이 없는 손견이었다.

“소사량이 하도 어른스러워서 나이를 잊고 있었소. 이리 어린 나이에 출전이라니, 내 장남을 엄히 키운다 생각했건만 전혀 아니었군!”

“하하, 손문대께서 또 저를 추켜세우시는군요. 다들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어린 시절 저 못지않으셨다는 거 압니다.”

동백의 말에 다들 입이 다물렸다. 세 남자가 하나같이 본인이 열다섯이었을 때를 회상했다. 치기 넘치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낯부끄러운 시절이었다…….

“아니오. 내 열여덟에 군을 이끌고 회계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첫 출전이었는데, 나는 내가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우쭐했었소. 하지만 사량은 무려 15살 아니오. 거기에 첫 출전에 이런 어마어마한 전투라니. 공은 무엇이 되든 크게 될 것이오. 내 아들이 공을 보고 배워야 할 텐데.”

손견은 진심으로 탄복했다. 조조와 원소는 동백이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나서 공을 세운 것보다, 평소 그 행동거지가 더 기이하다고 여겼지만 차마 그 점을 말할 수가 없었다.

‘15살한테 같이 술 마시자고 졸랐다는 사실을 원소 이놈에게 들킬 순 없지.’

‘15살한테 술 좀 대신 마셔 달라며 부탁했다는 사실을 조조 이놈에게 들킬 순 없지.’

그때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막사의 장막이 열리며 불쑥 동탁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사량, 원본초, 둘 다 이만 나오게나. 낙양으로 돌아가야지.”

“이야기는 다 나누셨습니까?”

“뭐, 나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

동탁은 어깨를 으쓱였다. 척 보니 주준과 황보숭과 이야기가 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읽은 동백은 한숨을 내쉬곤 조조와 손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뵙시다.”

원소 또한 인사를 나누고 동탁·동백과 함께 막사를 나섰다. 그들만 있기 무섭게 동탁이 불만을 토해 냈다.

“아니, 나는 내 할 일을 했는데 왜 저들 할 일까지 나에게 미루려는지 모르겠군. 장보와 장량을 잡는 데에 저 정도만 있어도 충분해 보이건만.”

“같은 황군이니까요.”

“하하, 하나 뻔하다. 내 여기서 더 공을 세워 보았자 서량 사람이랍시고 평가 절하되어 더 직책에 못 오를 것을 괜히 힘 빼서 뭘 한단 말이냐?”

불퉁스러운 동탁에 말에 동백이 드물게 수긍하는 미소를 지었다. 제 이권이 걸린 일이라면 참으로 판단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원소는 동탁의 결정이 마뜩지 않았다. 동탁처럼 이방인도 아니오, 동백처럼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다. 세도가 중의 세도가이며 나이가 절기인 그라면 공을 세우는 족족 승진할 수 있을 터인데. 게다가 원소는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가문에 보여 줄 군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정도 이상 두각을 나타내면 장양 쪽에서 견제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소가 아직 직책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제 생각에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탁류는 참으로 거셌다.

원소는 곧은 동백의 얼굴 옆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전공을 세우고 귀환하는 길임에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 * *

낙양이 지척에 다다랐다. 마음이 급했던 동백은 낙양에 도착하기 전, 자오를 저택으로 보내 리리에게 제 소식을 알리게 시켰다. 자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덜 마음 졸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오의 발목에 서신을 묶는 동백을 보고 원소는 팔불출이라며 놀렸고, 동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동백은 그런 둘의 반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신도 내심 리리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자오는 금방 돌아왔다. 여전히 발목에 서신을 매달고 있는 채였다. 답장이라도 받았나 싶었던 동백은 발목의 서신을 끌러 보았다. 하지만 제가 보낸 서신 그대로였다.

“어째서?”

당황한 동백이 자오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발견한 자오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자오는 고개만 몇 번이고 도리 저었는데, 주변에 보는 눈이 있어 자세한 상황을 캐묻지 못했다.

마음이 급했던 동백은 당장 수하를 저택으로 보내 리리의 상황을 알아보게 시켰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늘어지며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수하는 폐를 토해낼 정도로 달렸다. 동백은 수하가 다시 저에게 도착하기가 무섭게 캐물었다.

“내 처는? 내 처는 잘 있는가?”

“저, 그게, 저…….”

수하는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어물쩍 말을 흐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에 동백의 표정이 싸늘히 굳어졌다. 동백은 버럭 일갈했다.

“당장 답하지 못할까!”

소동백의 노기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선뜻 말을 전할 수 없는 것은, 이걸 말했다가는 쏟아지는 분노를 제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가는 분노를 감당하기도 전에 씹혀 먹힐 것만 같았다. 수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했다.

“우, 우군사마님 자택 내에는 합부인(閤夫人)께서 계시지 않더이다! 어, 얼핏 듣기로는, 시, 시, 실…… 실종, 되셨다고…….”

부하의 흐려지는 말꼬리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동백은 그 전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실종? 누가? 동백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하가 전하는 이야기를 동백의 옆에 있던 동탁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동탁은 사태의 심각성에 동백을 돌아보았지만, 동백은 말릴 새도 없이 비단에게 박차를 가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어이, 동백! 무단이탈죄를 묻기 전에 멈춰라!”

커다란 동탁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동백은 한 점 주춤거리지도 않고 저 멀리 사라져 갔다.

군을 통솔하는 장수가 무단으로 전선을 이탈하다니, 이는 군법상 큰 죄였다. 아무리 승전보고를 올리기 위해 황궁으로 가던 중이라 하여도 그러했다. 아니, 오히려 군을 이끌고 황궁으로 가는 길이기에 더욱 엄중하게 지켜져야만 했다.

소동백이야 부친이 장양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동탁은 자신의 지도력이 의심받을 수도 있는 사항이었다.

동탁은 어떻게 할까 잠시 따져봤다. 그냥 저대로 두고 나중에 소동백의 탓으로 전부 책임을 돌릴까, 아니면…….

‘황제만 모르면 되는 일이지. 어차피 이 일을 트집 잡아 봐야 소동백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 장양이 적당히 무마해 줄 테고.’

장양이 덮어 준다면 손바닥으로 하늘도 가릴 수 있다. 동탁의 결정은 빨랐다. 소동백을 냉큼 다시 데려오기로 한 동탁은 성가신 듯 혀를 차며 적토마의 고삐를 바로 쥐었다.

“쳇, 너! 힘 좀 쓰고 입 무거운 병사 다섯을 이끌고 나를 따르라! 원본초는 남은 군대를 이끌어 주게. 최대한 미적미적 가는 거 잊지 말고!”

동탁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동백의 뒤를 쫓았다. 휭, 하니 적토마가 날듯이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동탁의 모습에 백부장은 당황했지만 대충 어디로 갔을지 짐작이 갔다. 동백의 본가, 장양의 저택임이 틀림없었다.

동탁이 지목한 7대 백부장 왕필은 급한 대로 다섯을 지목하였다. 거기에는 조운과 악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동백은 거칠게 말을 몰았다. 주위에 누가 치여 나가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막 몰았다.

“에그머니!”

사람들의 외침은 동백의 귀에 닿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낙양 시내의 장양의 저택에 닿은 동백은 쾅쾅, 대문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아까 동백의 수하가 왔다 간지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문지기가 바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성질이 급했던 동백이 거세게 문을 여는 힘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아이고, 도련님!”

동백은 1년 남짓하게 비워둔 자신과 리리의 신혼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백은 무언가 착오가 생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종이 웬 말인가. 자신이 방에 들어서면 언제나처럼 창가에서 수를 놓으며 저를 보고 말갛게 웃어 줄 것이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며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백을 반기는 것은 휑하니 빈방뿐이었다. 동백은 싸늘히 식은 방의 모습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뒤늦게 동백을 발견한 시비가 깜짝 놀라 그릇을 놓쳤다. 와장창. 날카로운 파공음에 동백의 고개가 자연히 그곳으로 향했다.

“어디 갔느냐.”

동백은 물었다. 평소의 총기 넘치는 날카로운 눈매는 흐려진 채 먼 곳을 응시했다. 곧이라도 저기 복도 끝에서 리리가 튀어나올 듯, 그렇게.

“내 아내는 어디 갔느냐.”

“마, 마님께서는…….”

동백은 같은 말을 중얼거렸지만 시비는 답해 줄 수가 없었다. 슬픔에 목이 메었고, 공포에 몸이 떨렸다. 대답해 주지 않는 답답함에 동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아내가 어디 갔느냐고 묻지 않느냐! 리리가! 내 아내가!”

“……죄, 죄송, 죄송합니다! 마님께서는, 흣, 흐흑……. 외출하셨다가 불한당들의 습격을 받고, 흑, 흐흐흑, 흑…….”

시비는 울음이 뒤섞인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동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저건 거짓말이다.

동백이 시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시비는 동백이 혹여나 손이라도 올릴까 흠칫했지만, 동백은 성큼성큼 걸어 시비를 지나쳤다.

“그럴 리 없다. 날 기다린다 했다. 1년 내로 돌아오기로 약조했지 않느냐! 부인, 어디 있습니까! 내가 왔습니다! 부인!”

“……도련님!”

동백은 복도 이곳저곳에 울릴 정도로 목청껏 소리 질러 리리를 불렀다. 애타는 그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웅웅대었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동백의 행태가 심상치 않았다.

“응? 리리가 날 두고 어딜 갔을 리 없다. 네가 숨겨 두었느냐? 그래서 안 보이는 게냐?”

“호, 호위, 호위하신 분들 모두, 모두 죽고, 마, 마님의 시체만이, 흑, 흑흑, 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진, 진정하시옵소서, 도련님!”

시비는 흐느끼며 감히 동백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동백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고개를 떨구었다.

“……거짓말이다.”

풀린 눈동자는 어느 곳도 응시하지 않았다. 시비는 동백의 발치에서 엉엉 울었다.

동백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멀쩡히 잘 있던 아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에 동백은 쉽사리 현실을 인지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현실일 리가 없다.

“그건 모두 거짓말이야.”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동백은 하염없이 거짓말이라는 말만을 중얼거렸다. 시비는 처음 보는 동백의 그런 모습이 두려운 듯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거짓말이다!”

동백은 소리 질렀다.

이 집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리리를 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으로부터 지켜 주겠다 약조하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의 믿음이 근간부터 흔들렸다.

밖에 나가서 군을 이끌고 공을 세우면 뭘 하나. 자신은 결국, 제 곁의 여자아이 한 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반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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