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인 줄 알았더니 범 새끼였던 건가.’
여포는 낄낄거리며 힘을 주어 상처를 눌렀다. 이 정도 상처는 응급처치만으로도 충분했다.
충격이 제법 컸을 텐데도 애송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복이 빠르군. 애송이는 칼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하, 아직 50합 정도 겨루었을 뿐인데 벌써 승리를 짐작하면 곤란하지.”
참으로 호기롭고 허세 돋았다. 얼굴 한쪽이 시푸르죽죽하게 물들어서 저러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초반에 얼굴 뜯어먹고 사느니 어쩌니 하는 생각을 철회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였다.
‘제법 사내답군. 계집애 같은 건 외모뿐이었구만. 마음에 들어.’
하지만 마음에 든 건 든 거고, 덤벼드는 건 덤비는 것이다. 여포는 눈앞에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여포는 저놈이 다시 덤벼들거든 다른 쪽 얼굴도 패대기쳐 버릴 것을 홀로 약조하며 주먹을 다잡았다.
각오한 눈동자가 부딪힌다. 머리칼 색처럼 엷은 홍채가 굳건한 의지를 담고 저를 바라보자 여포의 입가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지금이다. 여포는 때를 읽고 땅을 박찼다. 그것은 애송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포의 주먹과 동백의 검이 영척(盈尺)에 이르렀을 때, 웬 침입자가 불쑥 나타나 산통을 깨트렸다.
“소 사마님, 급보입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나타난 이는 눈앞의 애송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장수였다. 갑주를 보니 군관이었다.
‘소 사마? 설마 요 애송이가 사마아?’
여포의 표정이 어처구니없음에 일그러졌다. 소 사마라 불린 애송이는 군관이 등장하자 저에게 겨누었던 검을 그대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방금까지 아득바득 덤볐던 것에 비해 상당히 냉철하고 빠른 행동이었다.
군관 놈은 애송이의 낯짝을 보고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벌벌 떨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태도에 여포는 코웃음을 쳤다. 사내놈인데 왜 저런 반응인지. 오히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구먼.
여포는 순순히 애송이를 보내 주기로 결심했다. 초반은 건방지고 재수 없는 귀족 자제 나부랭이였지만 그래도 검을 맞대어 보니 가문 덕 보고 놀고먹고 하는 것은 아닌 모양에, 자신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빠 보이는 놈을 잡아 마저 뚜드려 패 줄 정도로 못된 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까지 놀리지 말라는 건 여포에게 무리였다.
“하, 꼬리 내리고 가는 것인가.”
제 나름대로는 친근감의 표시였다. 하지만, 요놈. 첫인상이 어딜 가는 건 아닌지 재수 없게 사람 말을 씹었다. 그러고는 아까 전 여포가 밀친 신향이란 기생을 잡아 일으키더니, 갑자기 이별극을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울려는 모습도 이쁘네. 소 사마님도 여전히 잘생기셨어요. 뽀뽀 쪽. 뽀뽀 쪽. 아주 그냥, 저걸…….
‘감히 날 닭 쫓던 개새끼 꼴로 만들다니……. 기생년이 손님 두고 연애질 해도 되는 거냐?’
실제로 손님은 여포가 아닌 동백이었지만, 여포가 이 상황을 그렇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 줄 리가 없다. 여포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새삼 열받아 뒈지겠네.
거기에 동백은 수리비에 여포의 유흥비까지 대 주고 갔다. 뭐 일언반구 붙일 새도 없이.
‘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신이 판을 깨고 나가니 사례를 치른다고 말은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고 불쾌한 것이 여포 제가 동냥받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내가 이기고도 찝찝한 이 기분은?’
여포는 창문을 내다보았다. 1층 정문에서 빠져나가는 애송이와 군관이 내려다보였다. 무언가 언쟁을 벌이는 듯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내가 맞아서 얼굴이 엉망이 된 게 그리도 신기한가? 뭘 그리 얼굴이, 얼굴이 해 대. 민망하게.”
“아, 아까 그놈입니까? 그 무뢰배 같은 놈이?”
무뢰배라니, 저 개새끼가, 어디다 대고……. 실제로 저 하는 꼴이 무뢰배가 맞다는 사실을 여포도 알 필요성이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제 흉을 본다는 사실이었다.
정원이야 그러니 저러니 해도 제 상관뻘에 나이도 훌쩍 많은 상대니 그러니 하고 넘기지만, 저 푸릇푸릇한 턱의 꼬마 놈에게 들으니 열이 뻗쳤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동백의 말에 여포의 주먹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아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왜. 내가 얼굴 빼면 시체라서, 얼굴이 이 모양이니 더 봐 줄 게 없고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자룡이? 응?”
흠흠.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그래도 실력 보는 눈은 있군. 여포는 지금 제 기분이 동백의 말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동백이 미리 치르고 간 화대 또한 즐겁게 받아들였다.
여포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이를 좋아했다. 이미 여포의 머릿속에선 불쾌한 기분은 사라졌다. 이제부터 신향과 보내게 될 즐거운 시간을 그리며 히쭉 웃을 뿐이었다.
* * *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냐?”
성큼 방 안에 들어서는 동백의 얼굴을 본 장양이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시비에 휩쓸렸습니다.”
동백의 답변은 단조롭고도 건조했다. 장양의 궁금증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 답이었다. 동백은 바로 장양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히 부르신 겁니까.”
장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지만 용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제 얼굴 꼬락서니라도 보라 거울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른쪽 볼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벌써 부풀어 오른 모양새가 심상찮았다. 장양은 당장 황 노인에게 덥힌 물에 수건을 적셔오게 해 동백의 얼굴 부기를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남 앞에 설 자가 그렇게 형편없는 몰골을 해서 나다니는 거 아니다.”
“뭐 얼마나 심하기에 그리 호들갑이십니까. 형편없다니……. 조금 사내다워지지는 않았습니까?”
동백은 자신의 뺨에 덧대어진 수건의 축축함에 상처가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장양에게 농을 걸었다. 동백의 이런 태도는 동백의 성별을 숨기는 데 퍽 도움이 되었다. 몇 년간 얼굴을 마주한 장양조차도 동백의 턱에 수염 한 터럭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백이 여자일 거란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장양은 대꾸할 값어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곧 본론을 꺼냈다.
“일이 급해졌다.”
장양은 황 노인이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몇십 년간 장양의 저택을 지켜 온 황 노인은 장양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전부 수발들어 왔고, 장양이 꾸며 온 음모들에 대해서도 거의 모두 알고 있는, 실질적인 장양의 오른팔이었다. 황 노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것도 모른 척 동백의 수발을 들 뿐이었다.
장양의 말에 아직 멀쩡한 동백의 왼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장양이 말하는 일이라는 것은 필히 하진과 원소의 무리에 관계된 내용일 터. 긴장한 동백의 손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어 갔다.
“오는 새벽, 하진을 칠 것이다.”
장양의 명이 떨어졌다. 지금은 막 해가 저문 늦된 저녁. 새벽녘이라 하면 곧이었다. 동백은 성급할 정도로 촉박한 명에 의아해했다. 장양은 일이 진행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동탁이 민지에 도달했다 한다. 원소가 부른 놈팡이들도 하나둘 낙양에 도착하고 있지. 외병(外兵)이 도성 부근에 당도함에 밑의 환관들이 호들갑을 떨더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동백의 물음에 장양은 눈을 음험하게 빛냈다.
“하 태후 이름으로 하진을 꾀어낸 뒤 죽이고, 역모를 꾀었다 조칙을 내건다.”
“원소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아마 하진의 죽음을 빌미 삼아 성으로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원소도 같이 처리하심이?”
동백은 바로 대꾸했다. 거리낌 없이 원소 또한 죽이자는 동백의 제안에 장양은 픽 웃었다.
“네놈, 그래도 원가 놈과 친한 줄 알았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원본초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동백은 원소와 마지막으로 자리를 함께했을 때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그가 변심했을까 싶었지만 그것은 헛된 우려였고, 도리어 더 단단한 아집으로 뭉친 그는 칼을 갈고 있었다.
‘옆에서 조조가 괜히 훼방만 놓지 않으면 되련만.’
조조 또한 하진의 밑에 있는 것이 괜스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조조의 권한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것이다. 하진은 동백을 싫어하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조조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이유는 동백을 싫어하는 것과 같았다.
동백의 제안에 장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소 놈까지 불러내기엔, 명분이 마땅치 않다. 하 태후 이름으로 불러내는 것이니. 그리고 그 애송이, 묘하게 감은 좋아서 이런 일에는 발도 안 걸치더군.”
“몇 번 시도해 보셨군요?”
“당연하지.”
장양의 말에 동백은 그러면 그렇지, 혀를 내둘렀다. 괜히 독사니 뭐니 불리는 것이 아니다. 장양이 시도했다는 것은 절대 어설픈 암살이 아니라는 뜻. 동백은 자못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럼 하진 주살 이후의 계획까지 생각해 두셨습니까?”
“천자와 왕제 두 분만 우리와 함께한다면, 다른 세력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겠지. 지금 내 사병과 네 근을 합하더라도 원소의 군세에 대적하기 부족하다. 다른 세력과 합쳐야 해.”
“생각해 두신 이가 있습니까?”
“어지간한 놈들은 전부 원소 놈의 격문에 이끌려 왔을 터이니…….”
장양은 마땅한 이가 생각나지 않음에 혀를 찼다. 동백 또한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훑어도 주변 군웅 중 도와줄 만한 이가 딱히 없었다.
그러던 와중, 동백은 옛적에 잠시 만난 적이 있던 손견을 떠올렸다. 그라면 황제가 우리에게 있는 한 능히 도와줄 것이었다.
“동오의 손가는 어떠십니까?”
“너무 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습니까. 어지간한 이들은 전부 원가와 손이 닿거나 하진이 꽂아 놓은 이들뿐인걸요. 그러게 아버지도 좀 건실한 놈으로 한 놈 쟁여 두지 그러셨습니까. 아버지 같은 사람이 꼭 피해 봐요. 뭐 좀 많이 손댄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까 놓으면 쭉정이뿐이야.”
동백은 단칼에 거절하는 장양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불퉁대었다. 동백 옆에서 수건을 갈던 황 노인 또한 낮게 웃음을 흘렸다. 장양은 어처구니없는 심정 반, 허탈한 심정 반으로 동백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 하나에 전부 걸어서 그런다! 이놈.”
“그러게 달걀을 전부 한 바구니에 넣으면 안 되는 거 모르십니까?”
동백은 곧 죽어라 장양의 말을 반박했다. 말 꼬랑지를 잡는 것이지만 정론이긴 해서 장양이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장양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