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135)화 (135/522)

근묵자흑이라. 여전히 동백에게는 제 양부와 닮았다는 수식어가 뒤따라 다녔고, 그걸 믿는 이들은 많았다. 그들에게 실제의 동백이 어떤 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구간지기의 예상대로 화를 내며 저것들 목을 치라 뭐라 말하기엔 이런 종류의 뒷말은 동백으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일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반복 같다. 권력자의 총애와 뒤따라오는 그의 측근들의 싸늘한 반응. 하진 또한 결국 동백이 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 때문에 동백을 싫어하게 된 것이었으니까.

권력자의 총애란 누릴 수 있는 권력의 총량과도 같았다. 옛적부터 동탁을 모시던 장수들로서는 갑자기 들이닥쳐 일방적으로 동탁의 총애를 퍼 받는 동백이 달갑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그들 중 몇몇은 동탁이 비역질 상대로 동백을 점찍어 두었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미 그렇고 그런 관계일 수도 있다고 확신하는 이도 있었다. 서량의 자유로운 기상인지 그들은 그런 종류의 말을 남들 눈치 봐 가며 하는 이들이 아니었고, 그것이 이번과 같이 동백의 귀에 들어오는 것도 벌써 몇 번째였다.

하지만 저 정도 발언쯤이야, 동백이 교위·사마를 지내면서도 줄곧 들어 온 말들이었고 그때도 썩 별다른 제재를 가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동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음설을 넘겼다.

“신경 쓰지 말게.”

동백은 그리 말하며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마구간지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타인의 평가에 별생각이 없기는 하지만, 저리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야단법석을 피우는 걸 보니 생각보다 제 취급이 파격적인 모양이다. 동백은 비소를 띠었다.

“……이곳이옵니다.”

“과연 명마로군.”

적토마는 동백의 말인 비단과 같은 우리에 있었다. 동백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이 다가오는 비단의 코를 쓰다듬으며, 저 멀리 홀로 고고하게 기상을 드러내는 붉은 말의 모습에 감탄을 흘렸다.

적토마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매번 말 그 자체만의 완벽함, 아름다움을 파악하기엔 상황이 썩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이리 면밀히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훌륭하다. 동백은 혀를 내둘렀다. 무인이라 하면 이 말을 보고 마음이 아니 흔들릴 리 없을 것이다. 그것도 기마에 능통한 무인이라면 더더욱.

동백의 비단 또한 명마 중의 명마였으나 적토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대로 존재하기만 해도 뿜어져 나오는 패기, 꿈틀거리는 두툼한 허벅다리,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털. 마중지마 적토마가 옆에 있으니 비단을 비롯한 다른 말들이 과연 눈에 들어오겠는가! 동백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저 멀찍이서 적토마가 고개를 돌려 동백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참으로 숨김없이 곧은 시선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발산하는 그 검은 눈길에 동백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쳤다. 동백의 쓰다듬을 받고 있던 비단이 움찔거리며 근육을 경직하는 것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시선만으로도 명마인 비단을 긴장하게 하다니…….’

여포는 반드시 정원을 배신할 것이다. 그건 예언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동백은 적토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환히 미소 지었다. 적토마를 보러 오기 전까지는 과연 그리할까 불안했었지만, 다시 한번 보고 나니 이건 뭐 고민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욕심 많은 동탁이 잘도 저런 말을 내어 주겠다 했군.’

만약 동백이었으면? 지금까지 함께해 온 천하의 명마를 부하 하나 끌어들이겠다 내어 준다니 쉬이 그리하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뭐가 버려야 할 패고 뭐가 취해야 할 패인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탁이 지도자의 자질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여포 정도의 무장이라면 자신의 무예 실력에 맞는 무기와 말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할 터. 어찌어찌 방천화극이라는 무기는 손에 들었을 테지만 말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정원이 여포에게 애써 말을 구해 줄 정도로 그를 아끼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명마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명장이 말을 찾지만, 보통은 일반 준마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포가 적토마를 타면 말 그대로 무신에 날개를 단 격이리라. 동백은 전쟁에서 그와 맞닥트린 적은 없지만, 자연스레 그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하지만 마냥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여포가 더 강해진다는 말인즉슨, 여포의 폭주를 막을 사람이 없어진다는 말과 동의어니까. 제 등에 짊어진 짐에 제 손으로 바위를 얹는 기분이 이러할까.

적토마의 기세에 눌려 동백의 품에 얼굴을 기댄 채 잔뜩 몸을 굳힌 비단이 마치 동백 제 꼴 같았다. 피부로 싸늘하게 맞닿아 오는 위협에 동백은 쓴 입맛을 감추지 못했다.

* * *

다그닥다그닥, 갈색의 수수하나 균형이 잘 잡힌 말 1마리가 집금오 정원의 저택 앞에 섰다.

여포는 정원의 집 별채에 머물고 있었다. 양아들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터. 마냥 친하기 때문에 같은 집에서 머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원이라 하여 집에서도 여포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호위 대신일까, 아니면 개의 고삐를 쥐고 있기 위함일까. 동백은 머릿속에 여포와 정원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늘어놓으며 주판을 튕겨 보았다.

황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다 보니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늦은 시간의 방문자에 정원의 문지기는 눈에 의심을 가득 담고 의아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늦게 뉘시오?”

“별채에 머무는 여 공(呂公)에게 옛 지인이 찾아왔다 전해 주시오.”

문지기의 말에 동백은 무뚝뚝이 답했다. 문지기는 동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인지 깊이 눌러쓴 모자의 챙 아래 있는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달빛을 받아 굳건히 닫힌 입술과 매끄러운 턱이 희끄무레하게 보일 뿐이었다.

여러모로 수상쩍은 사내였으나, 이자가 진짜 여포의 지인이라면 그냥 돌려보냈다가 그 무뢰배에게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문지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고 두꺼운 문이 쿵, 닫혔다. 동백이 선 길가에 어둠처럼 적막이 내려앉았다. 호롱불로 불을 밝힌 저택 안이 사람 오가는 소리로 소란스러운 것과 비교되었다.

그렇게 동백이 이방인의 기분을 곱씹고 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고개를 빼꼼히 내민 문지기의 불퉁한 표정에 동백의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모르는 자니 당장 꺼지라 한 건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며 동백은 초조함을 억눌렀다.

“들어오시오.”

하지만 다행히도 문지기의 입을 타고 나온 것은 긍정의 답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동백은 겉으로는 무덤덤함을 가장한 채 정원의 집 대문을 넘어섰다.

정원의 집을 가로지르며 동백은 흘끗 곁눈질로 집을 훑었다. 무인의 집답게 삭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지기는 저택의 깊이깊이 둘러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점점 으슥한 곳으로 이끄는 행태에 동백은 숨겨 둔 비수로 은밀히 손을 뻗었다. 혹시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함정으로 몰아넣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바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초롱불이 흔들거리며 창문 틈새로 불빛을 내비치는 별채가 보였다.

거대한 인영이 방 안에 드리우며 존재를 과시했다. 문지기는 동백에게 별채를 가리키며 고개를 까닥했다. 동백 또한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맹수가 자리하고 있을 우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앞에 선 동백은 숨을 들이켜고 마음을 진정시킨 뒤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방 안의 빛이 동백을 비췄다.

방의 주인은 술잔에 기울이던 술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동백을 보았다. 동백의 정체를 금세 꿰뚫어 본 여포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술병을 마저 기울였다.

“옛 지인이라 들었는데.”

“1달 전이든 2달 전이든, 옛일은 옛일 아니겠나.”

동백은 여상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모자를 끌러 내어 옆 옷걸이에 걸쳤다. 첫 만남부터 반말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허례허식은 필요 없었다. 동백이 대뜸 반말을 던졌지만 여포 또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동백은 술잔이 준비되지 않은 여포의 반대쪽 자리에 앉으며 친근히 말을 걸었다.

“신향의 적자 소리는 훌륭했나.”

“아아. 물론. 소리와 함께 마신 술 또한 지상 최고의 감주였지.”

여포는 그때를 다시 회상하며 킬킬거렸다.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동백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되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가장한 채 어깨를 으쓱이며 여포를 도발했다.

“뭐, 그 정도를 가지고. 여봉선은 그런 신위를 가지고도 겨우 그런 술을 감주라 답하는가.”

어떻게 들으면 여포의 입맛을 싸구려라고 폄하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무예를 치켜세우니 여포의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제 입맛이 싸구려인 건 사실이니까. 중요한 것은 제 몸뚱어리 그 자체였다. 여포는 자조 어린 웃음을 입가에 걸친 채 술잔을 벌컥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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