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139)화 (139/522)

“네놈 종견(僕犬) 노릇은 더 이상 못 해 먹겠더라고.”

여포는 바닥에 내리박힌 채 목에서 피 분수를 뿜어내는 정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을 끝맺었다. 몇 년간 함께해 온 정이 있으련만, 여포의 눈은 건조하고 무감정한 짐승의 눈 그대로였다.

여포는 고개를 들어 동탁을, 그리고 동백을 마주 보았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금수 같은 이라는 당대, 그리고 후대의 평가를 몰아 받고 있는 3명이 그리 모였다. 세 사람만이 혼란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반역, 패륜, 도리의 붕괴. 그 모든 것이 혼돈으로 뒤섞인 채, 정원의 반란 아닌 반란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거대한 시류가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인력으로 막으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밀려오는 분란의 뜻과 의지였다.

동백은, 그리고 동탁과 여포는 저희가 선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를, 힘과 폭력을 고집했다. 비록 선이 아닐지언정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기에.

* * *

“형님, 형님, 낙양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었수?”

다소 들뜬 치기 어린 목소리가 쿵쾅쿵쾅, 점잖지 않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부터 가까워졌다.

방 안에서 유유자적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귀가 길쭉한 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는 수염을 길게 기른 붉은 피부의 남자가 시끄럽게 떠들며 들어오는 상대를 향해 엄히 꾸짖었다.

“장비야, 사람에게 말을 걸 때는 면전에서 눈을 마주치고 말해야지. 그리 달려오며 말을 하면 어찌하느냐? 내가 누누이 말했건만…….”

“에이, 관우 형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그래서, 낙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었느냔 말이우.”

햇볕에 그을린 적갈색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산발로 흐트러트린 청년, 장비는 그리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관우의 옆에 앉았다. 섬세한 이목구비, 기품 있는 생김새와는 달리 행동거지가 하나 조심성 없는 것이 한량 그 자체였다.

건들거리는 몸짓에 장비의 무릎이 툭 하고 관우의 몸을 건드렸다. 평소의 관우라면 능히 지적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 또한 제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아우의 행실에 다소 지쳐 있었다. 관우는 그저 한숨짓는 것으로 조용히 장비를 나무랐다.

장비가 계속해서 낙양의 소문을 거론하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종일 귀찮게 굴겠다 싶었던 유비는 심드렁히 답했다.

“듣긴 들었으되 그게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윗대가리들의 물고 뜯는 이권 싸움인 것을.”

“허 참. 유비 형님, 요즘 참 이상하지 말이우. 그게 어찌 우리와 관련이 없수? 대가리들의 이권 싸움이라 하나 그 틈에 길이 없겠수?”

“타인의 싸움에 괜히 투견이 되어 끼어들어 피를 흘리는 것은 저번 일로 족하지 않느냐.”

유비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황건동란을 되짚어 보는 그의 눈길은 날 선 기력 없이 뭉툭했다. 영 의욕 없는 모습이었다.

유비의 그런 노골적인 심경의 변화를 장비도 아니고 관우가 모를 리 없었다. 지금껏 침묵하였으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다. 관우는 검고 긴 수염 밑에 가려진 입을 열었다.

“하나 장비의 말도 일리가 있소, 형님. 지금 낙양의 참담한 상황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소. 누구나 모이면 동탁 무리의 횡포에 관한 말들을 입에 올리오. 이 사태를 이대로 방관할 셈이오?”

관우는 지금의 유비가 마치 구멍이 나 버린 주머니 같다 생각했다.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열정과 이상이라는 포부가, 언제 생겼는지 모르게 난 구멍으로 술술술 빠져나가고 있었다.

관우를 사로잡았던 두 눈을 번뜩이며 패기 넘쳤던 어린 봇짐장수는 이제 무기력하고 염세적으로 되어, 골똘히 저 혼자만의 생각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언제나 냉정히 굴며 유비의 말을 두둔하던 관우 또한 평소와 달리 유비를 질책하고 나서니, 장비는 신이 나서 말을 받았다.

“동탁 그놈이 제 손으로 황제를 끌어내리더니, 이제는 저 닮은 두 놈을 양아들 삼아서 아주 활개를 치고 다닌다 하더이다. 이곳저곳에서 그들에게 불만 있는 사람이 많답니다. 원가 놈도 사람을 모으고 있소. 형님네 형님, 그, 공 뭐시기 분은 사람 필요하다 않으시우?”

동탁을 닮은 두 놈이라 함은 동백과 여포의 이야기였다. 동백을 언급하는 장비의 눈썹이 자연스레 치켜 올라갔다.

리리의 일이 있던 뒤로, 동백을 향한 장비의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책임질 생각까지 했으나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 소녀는 장비의 가슴에 생각보다 묵직이 남아 있었다. 죄책감, 혹은 후회일지도 모를 그것은 잊고 살다가도 불현듯 떠올라 제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이게 전부 소동백 때문이다. 애초에 소동백이 제 아내를 잘 지켰더라면 자신이 이런 마음고생을 할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제 아내는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채,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권력만 탐하는 그 간신배 같은 작자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적대감 때문에 유비를 재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단순히 제 개인의 앙금일 뿐이다. 장비로서는 비루먹은 개처럼 기운이 쭉 빠진 형님의 죽어 버린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장비는 유비를 살살 타일렀다.

“으응? 형님. 답 좀 해 보시우.”

“공 뭐시기 분께서도 그런 말씀은 전혀 없으셨다. 그러니 그만 좀 귀찮게 하거라.”

그런 장비의 염려가 무색하게, 유비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심드렁할 뿐이었다. 말투에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것이 듣는 사람마저 힘이 쭉 빠지게 하는, 기력 없는 어조였다.

“에이, 형님. 그러지 말구.”

장비는 몇 번이나 유비를 살살 꾀었으나 유비는 도통 그대로였다. 성질을 이기지 못한 장비는 기어코 성을 냈다.

“그리 싫으면 관두슈!”

방을 박차고 나가 버린 장비와 유비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관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야 유비의 심정이 어떠한지 대충 짐작이 갔다.

황건적의 난 당시 공을 세웠는데 팽 당하고, 한동안 이렇다 할 만한 뚜렷한 전적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의기소침해진 것이 분명했다. 괜히 공손찬을 찔러 낙양의 사건에 한 발 걸치자니, 거기서도 얼굴만 들이밀고 파도에 쓸려 가는 조개처럼 떠밀려 갈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관우는 제 머리통만큼 굵은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찌하여야 유비가 기력을 되찾을까. 관우는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마땅찮은 방법이 그렇게 바로 생각날 리 없었다. 끙. 관우는 답답하고 안타까움에 작게 혀를 찼다.

* * *

양부를 죽이고 동탁의 밑으로 들어선 여포의 이야기로 낙양성 전체가 술렁술렁 시끄러웠다.

그놈이 키가 9척이 넘는다지. 험악한 눈매는 부리부리, 이빨은 비사문천처럼 삐죽이 입 밖으로 나와 있다 하더라. 갈기처럼 구레나룻을 길게 기르고 하늘로 치켜 올라가는 머리카락이 마치 범 같다는 둥, 여포의 생김새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가 낙양 구석구석을 맴돌았다.

길거리만 돌아다녀도 저를 향해 꽂히는 시선에 여포는 흥, 코웃음 쳤다.

때마침 여포가 가는 발끝에 무언가 툭 하고 걸렸다. 내려다보니 상인이 펼쳐 놓고는 미처 치우지 못한 광주리였다. 막 그것을 치우려 손을 뻗은 상인은 저를 향해 내리꽂히는 여포의 눈길에 꿈쩍도 못 하고 벌벌 떨었다.

여포는 치켜 올라간 눈썹 사이의 미간에 잔뜩 주름을 주었다. 그러고는 심술궂게 웃으며 광주리를 향해 시원하게 발길질을 했다. 광주리가 저 멀리 데굴데굴 굴러갈 뿐이었지만, 시장의 사람들은 마치 여포의 발길질에 상인의 목이라도 날아가는 듯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참 성격 나쁘다. 그것도 미묘하게.

무력만 보자면 이런 서민들을 놀려 먹으며 희희낙락할 레벨이 아닐 텐데. 무슨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동백은 바로 옆에서 그런 여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기만 할 뿐, 그를 제지하고 나서는 일은 없었다. 제 손으로 통제 불가능한 맹수. 그것이 바로 여포이거늘 제가 여기서 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여포를 동탁군으로 끌어들인 게 저라지만 이리 가까이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여포와 함께 순찰을 돌게 되어 버렸다.

동탁이 겉돌고 있는 여포를 신경 써 달라 동백에게 특별히 이른 것이 이유기는 하지만, 저 여포의 성질머리를 이길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도통 없는 탓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여포도, 순찰도 내가 제시한 방안이니까.’

며칠 전, 동백은 동탁이 제 수하들을 제멋대로 풀어 놓는 것을 감히 재단하고 나섰다.

이런 식으로는 천하를 얻을 수 없다, 약탈을 원한다면 자신의 백성이 아닌 적들의 민중에게 하게 시켜라, 어찌 되었든 낙양 시민에게 못되게 굴어서 하등 좋을 게 없다 등등. 동백은 동탁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고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동탁은 웃었다.

‘그렇다면 네가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내게 그런 잔소리를 하는 건 너밖에 없구나.’

그 결과가 이것이다. 여포와 단둘이, 이런 시답잖은 꼴이나 봐 가며 낙양 시내를 활보하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