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가 썩 즐겁지 않았나 보오.”
때마침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조조는 퍼드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죽립(竹笠) 아래 가려진 채 슬쩍 보이는 것은 입매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저를 부른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사량.”
조조의 부름에 동백은 골목 그늘에서 몸을 빼냈다.
한동안 정무 회의 시의 단정한 문인의 모습만 보아서인지, 사복 차림이 제법 색달랐다. 소년 시절의 잡힐 듯 말 듯 한 아스라한 미모를 그대로 지닌 채 훤칠히 자란 청년이 저에게 다가오자, 조조는 오히려 소동백의 팔을 잡고 그대로 그늘이 드리워진 골목으로 향하였다.
“안의 늙은이들이 자칫 자네를 보면 경기 일으킬 것이네. 뻔히 알고 온 것 같으니, 우리 잔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지. 그래, 갑자기 날 찾아오고 무슨 심계인가?”
“심계라니……. 내 자네를 걱정해서 찾아왔건만.”
동백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호접이 작약에 살포시 앉은 듯한 자태에 조조는 코웃음 쳤다.
“미인계 쓸 생각 말고. 내 자네 웃는 것에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거로 생각하면 큰 착각일세.”
대수롭잖게 말하였으나 내심 조조의 가슴은 크게 뛰었다. 동탁 정권 수립 후 동백이 저에게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동백은 들켰나, 하는 생각으로 픽 웃었다. 심계랄 게 있나. 뻔한 일이지. 동백은 낮게 중얼거렸다.
“동탁이 알았어.”
자네들이 모이는 것을. 동백의 속삭임에 조조는 그럴 것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을 써서 몰래 만난다 하여도 동탁의 손아귀 안이다. 낙양 전체에 퍼져 있는 동탁의 눈을 완벽히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조조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로군.”
“오부의 일도 있고 하여 동탁이 예민해졌다네. 여포를 경호 대장으로 삼고 어딜 가든 갑사들을 이끌고 다니지. 왕윤에 대해서도 흉흉한 눈으로 그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어. 아마 꼬투리 하나만이라도 잡히면 줄줄이 굴비 엮듯 그렇게 솥으로 처넣을 걸.”
“제 몸보신이 중한 저들이 그리 쉽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만.”
“동탁의 꼬투리는 대단하다는 걸 염두에 두게.”
동백의 말에 조조는 지금껏 동탁이 명분을 대고 죽인 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동백의 말이 옳았다. 동탁은 정무 회의 때 한숨을 내쉬었단 이유만으로 신하를 죽인 전적이 있는 광인이었다. 그가 왕윤을 아직 살려 두고 있는 것은 순간의 변덕과 눈앞의 동백이 최대한으로 저지한 결과일 것이다. 동백의 팔을 잡고 있던 조조의 손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냥 자네도 원소처럼 굴어. 왜 낙양에 남아 있는 거지? 이곳에서 자네가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진즉 식솔들은 진류 쪽으로 내려보내지 않았는가.”
동백은 조조를 다그쳤다. 동탁의 편에 선 동백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조조의 친우로서, 그리고 조조에게 모친을 맡긴 이로서는 할 수 있을 정도의 직언이었다.
조조가 여왕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신치 못했으나, 동백이 금단요를 조조에게 보낼 수밖에 없던 순간부터 어렴풋이 조조가 여왕은 아닐 거라 인지했다.
〈여왕은 네 인생에 사사건건 얽히며 네 발목을 잡을 거야. 여왕에게 있어 너 또한 그렇겠지. 네 인생에 불구대천의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여왕이야.〉
여왕과 앨리스는 서로 이해를 구걸할 수 없는 평행선의 관계. 하지만 조조와는 평행선이라기보다 이리저리 겹치고 멀어지는 파동에 가까운 사이였다.
솔직히 동백으로서도 유비보다는 조조가 여왕에 가깝다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조조의 입장에서 보면 장양으로 인해 동백이 썩 기껍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둘의 관계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설령 조조가 자신과 적대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 어지러운 정치판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이의 어쩔 수 없는 부딪침일 뿐, 그것이 조조가 여왕이기 때문은 아니리라.
그래서 동백은 제 목숨에 지장이 없는 한 친우로서 조조의 안위를 살피는 일 정도는 괜찮다 여겼다.
하지만 걱정스러워하는 동백의 말에도 조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아직 불혹(不惑)의 나이가 아니라고는 하나 마냥 혈기가 치솟을 약관(弱冠) 또한 아닐세.”
동탁의 간악한 짓에 혈기가 올라 헛된 짓 하지 않고 정세를 살필 것이라는 뜻이 담긴 조조의 말에 동백은 설핏 웃었다. 실제로 그의 앞에 선 동백의 나이가 약관의 나이였다. 조조의 발언은 동백을 얕잡아 본다고 여겨도 무리가 없었으나, 조조가 자신을 스물이 된 젊은 장수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한 말이라는 걸 동백도 잘 알았다.
“과연 자네에게 불혹의 때가 올 것인가? 불혹의 뜻이 무엇인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내가 아는 자네는 종심(從心)이 될지라도 그 유혹을 전부 삼켜 먹을 만큼 욕심이 대단한 자인데…….”
“단 하나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허튼 유혹에 굴하지 않을 터이니 내 지금에서라도 불혹에 경지에 올랐다 해도 될 것이네.”
조조의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동백으로서는 조조를 내려보내야만 했다. 그것이 비록 전쟁을 부를지도 모르는 일일지라도. 어차피 예견된 전쟁 아닌가? 언제까지고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번은 발발해야하는 일인 만큼, 동백은 제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돈하며 다시 말했다.
“자네는 몸을 좀 사리는 게 좋아. 휘몰아치는 기류에 속에 있다는 것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네의 감을 날카롭게 벼려 주기는 하지만, 이번엔 좀 위험했네.”
“원소가 지금껏 제 몸을 사려서 끝끝내 밥그릇을 동탁에게 빼앗긴 게 아닌가. 그런 꼴은 싫네그려.”
“원소 또한 과정이지. 그 일로 그 또한 얻은 게 있을 거야. 자네고 원소고, 물론 나 또한 언제나 옳은 결정만을 내리는 건 아니고, 그로 인해 후회하지. 하긴, 남의 말을 순순히 들어 먹을 종자들 같았으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터이지만…….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네. 진류로 내려가.”
동백은 엄히 말했다. 엷은 회갈색 눈동자가 조조를 직시하였다. 한낮의 골목길임에도 침묵만이 그 공간을 차지했다.
조조는 동백이 왜 이렇게까지 저를 위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진류에 있는 모친인 금단요를 걱정해서?
억지라고는 하나 동백은 동탁의 수하다. 혹시 어떤 흉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단지…… 그저 정말…….
“동탁을 위해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인가?”
“이번만큼은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동백은 냉정히 답했다.
조조도 동백이 자신을 해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낙양에 머물라 하는 쪽이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조는 동백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조조는 태생적으로 의심이 많은 이었기에, 동백을 완전히 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의 손아귀에 금단요가 있다 해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동백의 호의를, 걱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백이 그에 실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사량.”
귓가 바로 옆에서 지근하게 울리는 듯한 조조의 부름에 동백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목소리의 가까움보다도, 그가 돌연 칼을 빼 들었기 때문이었다.
찰나의 순간 동백의 머리가 돌아갔다. 칼? 조조가 나를 죽인다고?
하지만 동백의 무예 실력은 조조보다 출중했다. 그건 조조 또한 알고 있었다. 단둘이 있는 지금, 조조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조조는 승산이 없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동백은 태연히 조조를 응시했고, 조조의 칼은 유려하게 허공을 갈랐다.
동백 머리 위의 죽립이 갈라져 떨어져 내렸다. 동백의 발 앞에 나뒹구는 죽립은 둘 사이를 내포하는 듯 꼴이 단호했다. 칼을 도로 집어넣는 조조의 눈빛이 자못 엄했다.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지 않을 것이네. 명심해 두게.”
배신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동백을 배신하겠다는 조조의 말에 동백은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떴다. 정말 조조다운 발언과 처사였다. 동백은 쓰게 웃었다.
“내가 자네를 이용할 거라 생각하나? 자네를 내려보내면서 굳이 눈치 줄 생각은 아니었다만.”
만약 이대로 동백의 제안에 따라 조조가 진류로 가게 된다면, 동백의 눈치를 봐서라도 거병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백은 친동탁파, 그리고 앞으로 조조의 행방은 반동탁파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리 조조가 동백을 ‘배신’하고 떠나게 되면, 조조는 아무런 제약이 없게 된다. ‘소동백이 조조로 하여금 낙향의 의를 비치니, 조조가 이를 날카로이 거절하고 스스로 거병을 위해 진류로 돌아갔다.’라는 명분이 서게 되니까.
한마디로 조조의 말은 자신이 먼저 동백을 공격할 테니, 동백 또한 조조를 개의치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하지만 이런 건 분명하게 해 두는 게 좋아.”
조조는 딱 잘라 말하였다. 평소에는 허허실실 좋은 게 좋은 것,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의 신조로 살던 조조였으나 결심을 세울 때는 칼과 같은 과단성으로 뚝 잘라 내니 미련이 차마 뒤를 이을 수가 없었다.
“앞을 생각해도, 그게 나은 길이야.”
조조는 그 말만을 동백에게 남긴 뒤 뒤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진류를 향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조조의 뒷모습에 동백은 떠나는 조조의 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동백이 동탁의 밑에 들어가겠다 말했을 때 애원하듯 동백에게 매달린 조조는 이제 없었다. 미련을 가진 것은 동백, 저였다. 동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이제 맘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전운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