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171)화 (171/522)

동백이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를 속셈이라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숨죽인 채 동백과 동탁의 눈치만 보았다. 동백의 입가가 빙긋이 올라갔다.

“설마 제가 동 태위의 명예에 누가 되는 짓을 하겠나이까.”

사근사근 귓가에 속삭이듯 동백은 상냥하게 읊조렸다. 동탁은 동백이 도대체 뭘 믿고 저리 당당한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얼떨떨했다. 동백은 성급하지 않게, 차근히 동탁을 얼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동 태위를 우습게 본다니,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은 화사하기 그지없다. 동백은 오히려 한 발짝 동탁에게 다가섰다. 벌린 팔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리지 않았다. 동탁은 그럼에도 동백이 바짝 독이 오른 칼을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누구나 다 꼬여 낼 수 있을 것처럼 달콤하게 굴면서,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은 백 년 묵은 이무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해서 동백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동탁은 털썩, 황좌에 다시 주저앉았다.

“좋아, 소동백이가 그리 자신만만하니 어디 들어나 보지.”

동탁은 기어코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거의 소동백의 말대로 된다 봐도 좋았다. 그들은 소동백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기에 전시에서 제 멋대로 귀환하여 동탁의 성질까지 긁어 가며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궁금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 속에서 동백의 팔이 들리며 손가락 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천도.”

동백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너무 깔끔하게 내밀어진 단어에 함축된 어마어마한 무게에 다들 제가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였다. 그런 그들을 확인사살 하듯, 동백은 다시 한번 착각이라 생각할 수 없게끔 제가 제시하는 바를 명확히 뱉어 내었다.

“천도하실 때이옵니다, 동 태위.”

요사스럽게 휘는 눈꼬리에 담긴 미소에는, 제 계책으로 수많은 백성이 고통스러워할 것에 대한 탄식은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다들 제가 들은 것이 맞는다는 걸 깨닫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관직이 낮은 자들은 높은 자들의 눈치를 보았고, 높은 자들은 동탁의 눈치를 보며 제 목을 수그렸다.

그래도 모두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 볼 정도는 아닌지라, 사도 양표(楊彪)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동백에게 소리쳤다.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요!”

“입 닥쳐라!”

하지만 답한 것은 동탁이었다. 사도씩이나 되는 자의 간언을 닥치라는 한마디로 묵살한 동탁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동백의 제의가 제법 흥미를 돋우었는지, 그는 몸을 쭉 앞으로 빼며 동백을 닦달했다.

“좋아,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소 중랑장.”

“저들과 우리의 전세를 파악하자면, 우리의 수가 비록 적기는 하나 결코 열세는 아닙니다. 되레 저희의 단합된 철기병을 이용한다면 분명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명백한 승기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장기전으로 가게 된다면 병력의 우세에 있는 연합군 쪽으로 승기가 기울 것입니다.”

동백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낙양 땅은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강이 흘러 방어하기가 편리하고 운송이 편리하나, 남쪽에서의 공격에 취약하고 적이 둘러싸고 공격하면 자칫하다 포위당하여 고립되기 쉽습니다. 저들이 저렇게 한데 모아 일어섰고 그 기세가 제법 흉한 것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으니, 저희로서는 수도 방비가 편한 곳으로 천도하는 것이 옳다 사료되옵니다.”

동백의 말이 그럴듯했다. 현재 저들이 아직 일사불란하지 못하여 호로관 쪽의 방면만 공략하고 있었으나 점차 시일이 지나며 한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면 낙양의 이곳저곳을 찔러 댈 게 분명하였다. 동탁 또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몸, 동백이 말하는 요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물론 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그런 자잘한 것은 동탁이 알 바가 아니었다. 동탁은 이미 천도로 마음을 굳히고 동백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이란 말이냐?”

“고조(高祖)께서 장안에 도읍하시어 12대를 보내었고, 광무제(光武帝)께서 낙양에 도읍하여 역시 12대를 보내었습니다. 이제 장안(長安)으로 돌아가 새로운 12대를 보냄이 제법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장안은 낙양에서 서쪽에 위치한, 위수강(渭水江) 근처의 지역이었다. 동쪽에는 지형이 험난한 함곡관과 동관, 무관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사천에서는 올라오는 길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험하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쪽은 강을 끼고 있으니 군사적으로 방어가 쉬웠다.

거기에 동탁은 본래 강족과 친하며 서량이 근거지인 인물이었다. 장안이 서량에 가까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동탁으로서는 적으로 가득한 낙양을 굳이 지켜 내느니 장안에 가는 것이 당연 옳은 선택지였다. 거기에 정치적으로도 현재 실권을 잡고 있는 낙양파를 몰아낼 수 있으니 동탁의 입지 또한 단연 굳어지게 될 것이다.

“과연 소동백!”

동탁은 제 무릎을 손으로 탁 내리쳤다. 짝, 소리가 유독 크게 대정전에 울려 퍼졌다. 동탁의 긍정적인 어조에 신료들의 표정이 너 나 할 것 없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소동백이 자신 있게 입을 열 때부터 이렇게 될 줄을 짐작했지만, 그 내용이 주는 어마어마함이 그들을 당혹게 하였다. 신료들이 당황하든 말든, 동탁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껄껄 웃었다.

“역시 내 아들이다. 그 계책이 신묘한 것이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낙양을 내어 주면 연합군은 닭 쫓던 개 신세나 다름없었다. 동탁을 토벌하여 이득을 보려 한 제후들은 목적의 상실로 망연자실할 것이고, 그 와중에 이득을 탐하려는 승냥이 같은 무리가 고개를 들이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연합군이 와해될 게 분명했다. 흩어진 연합군은 위협적이지 못한 폭도의 무리에 불과할 뿐이다.

전쟁의 종식과 잇따르는 폭동. 전쟁에 비견하면 각 제후의 군란(軍亂)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며 동탁이 정벌할 명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동탁은 천자라는 명분 아래 서량과 관중(關中)을 토대로 권력을 다시 구축할 수 있게 되고, 지금보다도 더 본격적으로 동탁 천하를 완성할 수 있을 터였다. 동탁은 동백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도 양표는 다시 한번 동탁에게 간언했다. 성큼 대열 앞으로 나와 머리가 바닥에 내리찧을 정도로 깊이 숙인 양표는 절절한 목소리로 고하였다.

“장안이 있는 곳은 과거 들끓는 도적 떼로 인하여 불타고 부서져 지난날의 영광을 돌이켜 볼 수 없습니다. 남아 있는 백성도 장안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을진대, 이미 번창한 낙양을 두고 폐도(廢都)나 다름없는 곳으로 종묘를 옮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깊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역적이 횡행하는 지금 이 시기가 환란이요, 낙양 또한 도적 떼 탓에 불타기 일보 직전이올시다. 농우(隴右) 지방이 근처니 돌과 나무와 기와를 구하기 쉬워 부서진 폐도를 복구하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동백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런 반박 정도는 능히 염두에 둔 표정이었다. 왕표는 저 홀로 동백과 동탁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양표의 옆에 태위 황완(黃琬)이 튀어나오더니 그 또한 머리를 박았다.

“수도는 나라의 심장, 나라의 머리이옵니다. 천하가 동요할 일을 이리 쉽게 정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도 순상(荀爽) 또한 그 옆에 넙죽 절하며 소리 높여 구슬피 고했다.

“아직 적들이 낙양 땅의 코 문턱도 넘보지 못했는데 황급히 천도를 정하는 것은 백성을 동요시킬 것이오, 백성이 동요하면 나라가 불안해지옵니다. 태위께서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 통촉! 내 충분히 깊이 헤아려 정한 일이다. 어찌 감히 그대들의 얕은 식견으로 대업에 이의를 제기한단 말이냐. 수도가 뭐고 천하가 무엇이냐. 이 동탁과 천자가 있는 곳이 바로 수도이자 천하가 아니겠는가!”

동탁은 역간(力諫)한 왕표와 황완, 순상을 그 자리에서 직위 박탈하고 평민으로 내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만 하더라도 동탁치고 용한 처사였다. 물론 동탁의 인내심이 길지 않기에 그다음에 반론을 제기하는 자는 바로 도성 밖에 목이 걸릴 게 빤했다.

동탁의 천도 의지가 강렬하니 감히 앞에 나서 옳은 말을 할 자가 없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대정전에서 동탁은 장안 천도의 뜻을 표명했다.

신료들이 예측한 대로 동탁은 이후 제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을 목을 베거나 유배했다. 그러고는 끝내 그해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동탁군은 천도하는 과정에서 낙양에 있는 값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회수하고 약탈한 뒤 불을 질렀다. 심지어 능(陵)을 파헤치고 매장물을 도굴했으며, 낙양의 부호들을 반역자로 몰아 그들을 처참하고 재물을 챙기니 거만대금(巨萬大金)이 동탁의 주머니로 굴러떨어졌다.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캐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획득한 동탁은 낙양을 떠나며 낙양성에 불을 질렀다.

그 모든 일을 주도한 동백은 타오르는 낙양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날름거리는 화염이 낙양을 삼킬 듯 온통 붉음으로 잠식했다.

보아라. 이것이 한(漢)의 미래이다. 유비 네 피부 밑을 흐르는 피를 부정하는, 나 소동백의 일침(一鍼)이자 일보(一步)이다.

치솟는 불길에 잿더미가 되어 가는 낙양에서의 추억에 망설임마저 같이 태워 버린 동백의 마음은 확고부동했다.

지금까지는 동탁에게 휘둘리다시피 하여 걷게 된 패도였다. 하지만 비슷하여 보았자 삼켜질 뿐이라는 걸 알았다. 유비를, 여왕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부족했다. 더 큰 패도. 더 큰 권력이 필요했다.

십여 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한 제2의 고향은 그렇게 폐허가 되었다. 동백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스러져 내리는 낙양성을 눈에 담았다. 그리 만든 것은 동백, 바로 그녀라는 것을 홀로 곱씹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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