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180)화 (1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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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는 적토마를 타고 군사의 선방에 서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낙양에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저희의 뒤를 쫓던 연합군이 이제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쯧, 속도를 늦춰야 하나.’

여포는 동백에게서 받은 서신을 떠올리며 적들과 자신과의 거리를 재 보았다.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용한 놈이었다. 뭐, 낙양을 불태우고 천도를 할 거라고? 늑골에 금이 간 채로도 동탁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비틀비틀 낙양으로 가던 놈이 내놓은 계책이 저런 어마어마한 것일 줄은 여포는 생각도 못 했다.

아무리 정치 쪽으로 눈이 밝지 못한 여포라 할지라도 천도가 주는 무거움은 잘 알고 있었다. 가자마자 동탁을 홀딱 구워삶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포에게 서신이 왔다. 서신을 가져온 자는 동백의 수하로 여포 또한 오가며 본 적이 있는 자였다.

연합군이 뒤를 쫓을 수 있도록 적당히 드러내며 도망쳐야 할 것이 첫 번째요, 그들이 불타오른 낙양을 보고 사기가 꺾여야 하니 낙양 쪽으로 그들을 유인하는 게 두 번째외다. 낙양의 처참한 꼴을 본 연합군은 아마 두 무리로 갈릴 것인데, 망연자실하여 낙양에 남는 쪽은 상관없으나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여 공을 비롯한 동탁군의 뒤를 쫓는 무리가 있을 거외다. 형양성 쪽으로 그들을 이끌고 오도록 하시오. 내 군을 이끌고 형양성 밖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들을 지나쳐 보낸 뒤 여 공과의 양동 작전을 펼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게요.

제가 매복하겠다? 설마 소동백이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선다는 말인가? 여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소동백이를 만나거든 단단히 한마디 일러 줘야겠다 여포는 다짐했다. 아니, 애초에 매복군이 활약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때려눕히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여포의 얼굴이 심술궂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소동백의 손바닥 위인지, 동백의 수하 진진이 넌지시 덧붙였다.

“소 장군께서 필히 저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으라 하셨습니다.”

불만스러웠지만 동백이 저렇게 따로 지시까지 할 정도이니 아니 지킬 수도 없었다.

그렇게 느릿느릿 군을 이동시켰을까, 과연 소동백이 말대로 하니 낙양에 있던 무리 중 일부가 여포군의 뒤를 쫓았다. 조조의 군사들이었다. 여포의 입가에 만족스러워하는 미소가 담겼다.

“소동백이가 예측한 범위 내의 일이로구먼!”

혹여 쫓아오지 못할까 일부러 속도를 느릿하게 간 보람이 있었다.

조조와 하후돈은 여포군을 보자마자 창을 들고 똑바로 달려 나왔다. 적 장군이 나서자 여포는 손을 휘저었다. 지친 군대로 가장한 여포의 철기병이 여포의 손짓 아래 좌우로 갈라졌다.

여포는 저에게 창을 내리 찌르는 하후돈의 창을 방천화극으로 튕겨 내었다. 오고 간 한 수만으로 서로의 실력을 파악하긴 충분했다. 하후돈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 것과 달리, 여포는 제법 놀아 볼 만한 상대가 등장했다며 흡족히 미소 지었다.

하후돈을 엄호하기 위해 뒤를 쫓은 조조는 오가는 창끝에 서린 예리함에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사태를 살폈다. 하나 상황은 쉬이 돌아가지 않았다.

좌측에서 이각이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조조군에 달려들었다. 조조가 하후연을 보내 상대하게 하였더니, 이젠 우측에서 곽사가 이끄는 군마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총공격에 조조는 급히 조인을 보냈다. 급한 불은 끈다고 내린 명령이지만 조조가 원하는 전세라기보다는 여포군에게 휘둘리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본능적으로 이 전투의 참담한 끝을 느꼈다.

세 갈래의 군마가 어울려 싸웠으나 워낙 조조의 군사가 여포의 군사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마침내 여포를 감당하지 못한 하후돈이 말머리를 돌렸다. 여포는 그 뒤를 쫓으며 조조의 군사를 짓밟았다.

적토마는 다른 말들보다 체격이 반 배는 더 컸고, 여포 또한 그러했다. 거대한 한 쌍의 인마(人馬)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군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여포의 난리에 조조의 군세는 사정없이 무너졌다.

“퇴군, 퇴군이다!”

대세가 기운 것이 보이자 조조는 다급히 퇴군령을 내리고 달아났다. 빠른 판단이었으나 여포라는 맹수의 파괴력은 너무 컸다.

조조는 형양에 이르러 산기슭에 말을 멈추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보았다. 태반이 줄어 있었다. 잠깐 맞부딪친 것만으로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다니, 명불허전 여봉선이었다. 조조는 여포라는 검의 칼자루가 동탁에게 쥐여 있는 것이 소름 끼쳤다.

조조는 시양졸을 시켜 밥을 준비하게 했다. 뭐라도 좀 먹어 허기를 달래고 정신을 추슬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조조 군이 한숨 놓기도 전에 어디선가 군사들이 쏟아져 내렸다. 내습에 놀란 조조는 어떻게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군사를 수습하며 급히 말에 올랐다.

‘매복이구나!’

조조는 한탄하며 이를 갈았다. 조조는 전세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앞장서서 달렸다. 그때, 조조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조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긴 요요한 웃음이 유독 선명했다.

“……소사량.”

무의식중에 고삐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조조는 제 앞에 서 있는 동백을 바라보았다. 한때 저와 술잔을 기울이던 어린 소년 장수가 이제는 어엿이 커서 제 앞에 태산처럼 크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조조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 깜빡하기까지의 시간이 억겁만큼이나 늘어졌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던 만큼 조조의 결정은 빨랐다. 동백의 부상을 모르는 조조는 동백과 맞붙어 승산이 없다 판단했다. 조조의 손이 다시금 고삐를 꽉 죄고 말머리를 돌렸다.

동백은 달아나는 조조를 쫓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저 관망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에 대한 의아함이 조조를 잠식하기 전에 동백이 움직였다.

동백은 여유로운 손짓으로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팽팽히 당겨진 현이 곧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찰나 동백의 손끝이 살을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조조의 왼쪽 어깻죽지에 박혔다.

조조는 비명을 삼켰다. 제길,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뱉을 기력도 없었다.

‘어째서?’

조조는 동백이 일부러 자신을 살려 줬다는 걸 알았다. 제가 아는 소동백은 궁술 또한 일가견이 있었다. 동백의 실력이라면 지금 이 순간 조조의 뒤통수를 지나 이마 한가운데에 꽂히도록 화살을 갈겼을 터였다.

조조는 한순간 보았던 동백의 표정을 떠올렸다. 매복은 둘째 치고, 마치 수많은 제후 중에서도 제가 쫓아올 걸 아는 사람 같았다.

조조는 어깨에 박힌 화살을 빼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깨의 고통이 머리를 혼미하게 하였으나 이대로 스러질 수 없다는 각오만으로 조조는 힘을 냈다.

한참을 달리니 눈에 보이는 적병이 없었다. 조조가 잠시 마음을 놓을 찰나, 때마침 풀숲에 숨어 있던 적병이 조조의 말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조조는 말에서 낙마했다. 어깨를 꿰뚫은 화살대가 낙마한 충격에 뚝 부러졌다. 조조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여기서 고작 졸병 둘에게 목숨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조조의 칼끝이 적병을 죽였으나, 적병과의 난투의 소란과 더불어 조조가 여기 있다는 적병의 외침에 다른 졸병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조는 어깨에 박힌 부러진 화살을 뽑아내었다. 꿰뚫렸을 때보다 더 극심한 고통이 조조를 잠식하였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머리가 맑아졌다. 조조는 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살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 나가야만 했다.

다행히도 소란을 듣고 찾아온 것은 적병뿐만이 아니었다. 조조의 사촌 동생 조홍(曹洪)이 나타나 다가온 적들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조홍은 조조가 부상당한 것을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에 타십시오, 형님!”

“너는 어찌할 셈이냐?”

“말에 탄 형님보다 그 뒤를 뛰어 쫓을 제가 더 빠를 것입니다.”

조홍은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넉살 좋게 말을 받았다. 조조는 이런 일로 옥신각신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알았다. 조조는 조홍의 말이 진심임을 깨닫고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를 말에 태운 조홍은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벗어 버렸다. 몸을 가볍게 한 그는 조조가 탄 말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밤이 깊어서 그 둘은 이름 모를 큰 강가에 도달했다. 때는 겨울이었고, 강은 살얼음이 껴 그 시릴 듯한 추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되었다. 얼음이 두껍지 못하니 그냥 건널 수도 없었고 헤엄을 칠 수도 없어 뵈었다.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시기 좋게 그들을 뒤쫓은 적군이 저 멀리 등장했다.

“나 조조 또한 여기까지인 건가!”

조조는 분하고 안타까움에 탄식하였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흔들릴 조조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천하의 조조라 할지라도 마음을 굳건히 다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조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이 깊지 않아 뵙니다. 형님은 갑옷을 벗으십시오. 제가 업고 건너겠습니다.”

조홍은 꿋꿋했다. 조홍은 불편한 조조의 왼손을 대신해 묵직한 조조의 갑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조조를 등에 업고 강에 발을 담갔다.

가죽 신발 사이로 밀려들어 오는 강물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조홍의 발을 찔렀다. 조홍은 한 발 더 성큼 앞으로 나섰다. 경사가 완만했다. 조홍의 생각대로 강은 그리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런 조조와 조홍의 등 뒤로 차마 강에 들어서지 못한 적군의 화살이 쏟아졌다. 하지만 어둠이 가리고 있어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조홍은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에 개의치 않고 쭉쭉 강을 건넜다.

조조는 조홍의 등에 업혀 뒤를 돌아보았다. 강 너머에 군을 이끌고 온 소동백이 보였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 흰 피부는 특히 눈에 띄었다.

조조는 소동백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소동백은 조조가 강을 끝까지 건너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백은 지금도 활을 쏘지 않았다. 쏠 수 있으면서도, 맞출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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