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삶아 죽인 수급을 안주로 즐겨 삼아 먹는다는 소문이 돈다지? 이 귀한 산해진미를 두고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하지만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정말로 그 말을 믿소?”
그들 또한 세간에 도는 소문은 들었다. 입을 나불거린 대로 그 말을 진실로 만들어 주겠다는 동탁의 협박에 식은땀이 목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연거푸 술을 들이켠 동탁은 그런 백관들의 모습을 보며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거친 동탁의 웃음소리가 껄껄, 연회장을 메웠다.
“하하, 방금의 소문은 바로 장온이 세작들을 시켜 퍼트린 유언비어요. 게다가 원술과 결탁해 나를 죽이려 하였으니 그 죄를 치른 것일 뿐, 무고한 경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들 술잔을 듭시다. 흥이 깨지지 않소.”
마지막엔 거의 으름장을 놓는 모양새에 백관들은 억지로 술잔을 들어 술을 삼켰다. 허연 술잔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자세한 시시비비를 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장온의 목을 앞에 두고, 가희들의 공연까지 전부 즐기고 나서야 동탁이 연회를 파해 주어 그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동탁이 약해 보이거나 틈을 주면 한족은 반드시 일을 꾸몄다. 장온의 일로 푸닥거리를 하였으니 당분간은 잠잠할 터였다.
동백 또한 공포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익히 알았다. 하지만 발 뻗을 자리를 보고 뻗는다고, 동탁이 한족을 좋게 대해 준다 하여 저들이 동탁을 인정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란 것 또한 잘 알았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쥐었다 폈다, 그들의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킨 뒤 손발을 잘라 내어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동백의 예상대로 정국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동탁 통치가 언뜻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탁은 마냥 즐기기만 하는 군주는 아니었다. 비록 욕심이 과하다 하지만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 제 발로 상부의 자리에 오른다는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동탁은 조정의 문제점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왔다. 한 황실이 스스로 꾸려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이 동탁 정권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동탁으로서는 선대에서 싸질러 놓은 똥을 어느 정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동백이 주장한 둔전제를 비롯해 균전제도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여긴 동탁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이 세금이었다.
어느 왕조든 민심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세금 탕감이었다. 애초에 균전제를 시행하며 토지세를 경감하고 조세를 줄였으니, 다음으로 동탁은 통행세 대부분을 없애 버렸다.
반면 원술, 원소, 공손찬, 유표 등 동부와 남부에 걸쳐 있는 제후들의 싸움은 끊이지 않고 시끌거렸다.
반동탁 연합군이라는 표제를 걸고 일어섰던 이들이 지금은 전쟁으로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으니, 되레 장안에서 낙양으로 이어지는 낙수 유역이 안정적이고 태평한 것과 비교됐다. 다른 괜찮은 비교 대상이 있어야 깎아내리기라도 하지, 이렇게 되니 동탁에 대한 여론은 더는 나빠질 수가 없었다.
장안이 안정화가 될 때쯤 하여 실질적인 모든 권력은 이미 동탁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황제는 명목상의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들 동탁 정권에 대해 반쯤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꼴이 되었다.
그렇다 하여도 아직 대부분 백관들은 동탁이 헌제가 다 자랄 때까지 섭정하는 것뿐이라 믿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동백은 웃었다. 헌제는 아직 어렸고, 다 자라기까지 10년이나 남았다. 동탁 천하가 된 지 근 2년이 지나고 3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이만큼의 성과를 이룩하였는데, 10년은 나라를 갈아엎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 동탁의 나이가 지천명(知天命)이 넘었다. 10년 뒤면 환갑일 터였고, 그때의 동백은 서른으로 한창 창창할 시기일 터였다. 다 늙어 빠진 범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게다가 다행히도 현재 동탁의 아들은 멀쩡한 놈이 없었다. 동탁이 제일 아끼는 것이 손녀인 동백(董白)이니 말 다 한 것이었다. 되레 현재의 동탁은 제 치세를 이어 줄 양아들인 여포와 동백을 더 가까이 여겼다.
그래도 혹시 몰랐다. 되도 않는 것들이 오로지 핏줄에만 연연하여 제 능력에 과분한 자리를 탐내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역사에 무구히 되풀이돼 온 과정이었다.
동탁은 자존감이 대단한 남자였다. 그는 제 핏줄에 대해 어떠한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동탁을 오롯이 만들어 줄 것이기에 그들을 등용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소동백에게 있어서 퍽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동백은 동탁의 혈족이 중앙 권력에 오는 것을 견제했다. 동탁이 혈족을 등용하기 시작하면 2가지 문제가 생긴다며 동탁을 얼렀다.
“어차피 혈족 싸움으로 나선다면 한인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이 나라의 제반이 그들이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수가 부족한 동가(家)를 등용하는 일은 괜히 저들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내가 내 식구 몇을 자리에 앉힌다 하여 저들이 감히 나에게 한 소리 하겠느냐?”
“저들은 이미 충분히 구석에 몰린 상황입니다. 동 상국께서 친지분들께 자리를 내리시면, 저들은 얼마 없는 밥그릇 또한 빼앗긴다 생각할 것입니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지요.”
“쥐는 쥐일 뿐. 쥐가 물어 봤자 범의 터럭에 상처라도 나겠느냐.”
“그렇지요. 한족은 고작 쥐일 뿐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무슨 문제?”
“지금껏 동 상국께서는 능력만 있다면 신분이고 야만족이고 거리낄 것 없이 관리를 등용해 오셨고, 그들은 동 상국을 친어버이처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한데 동 상국의 혈육을 갑자기 중요 요직에 앉히면 그들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오히려 이 동탁의 혈육이기에 능력을 펼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차별이 아닌가?”
“조급히 굴지 마시옵소서. 아직 기한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말단의 자리를 주고, 능력과 전공에 따라 차근차근 올려 주시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 단계를 밟아 가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 오히려 동 상국께서 기존 관리들을 배려할뿐더러 친족에게도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니 수많은 인재가 동 상국을 모시고 싶어 할 것입니다.”
동백의 말에 동탁이 심사숙고했다. 동백의 말대로 아직 시기가 이르기도 했다. 상보의 위치에 올랐다고는 하나 고작 장안과 낙양 일대에 이르는 땅만을 통치할 뿐이었다. 저기 너른 평야에서 서로 기를 세우고 있는 군벌들이나 저나, 제가 조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동탁은 그게 불만족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제 아들들이나 동생들이 썩 실무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제 혈족을 데리고 전쟁을 치르라 그러면 동탁으로서도 마뜩잖을 것이었다.
그래. 제 혈족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이 한나라 땅을 제 밑으로 수복한 뒤여도 늦지 않는다. 차라리 그때가 되어 제후(諸侯)의 위를 내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동탁은 먼 미래의 일을 그렸다. 동백이 그려 준 도안 위에 붓질하는 꼴이었지만, 동탁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장온의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 여포가 동백의 집에 놀러 왔다. 뒤에 여포의 시종이 좋은 술 몇 동이를 짊어진 채였다. 예기치 못한 여포의 등장에 동백은 곤혹스러운 듯 미간을 움츠러트렸으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몇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붙어 지내게 되면서 여포는 제집 드나들듯 동백의 집에 방문했다. 낙양 시절엔 눈치라도 봤지, 장안으로 천도하고 나니 아주 거리낄 게 없었다. 오죽하면 수하들 사이에서 여봉선을 찾으려면 홍등가를 찾거나, 소사량의 집에 가 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들어오게.”
동백의 허락에 여포가 희희낙락하며 대문을 넘었다. 온갖 꽃으로 금 자수가 놓인 그의 긴 장포 자락이 펄럭였다.
전쟁터에서 쓰던 자금관이나 화려한 사만대 등을 미루어 보건대 썩 단정한 옷차림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요즘 따라 정도가 심한 느낌이었다. 동백은 수컷 공작새 같은 여포의 꼴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덩치가 큰 만큼 화려한 치장으로 제 몸을 부풀리지 않아도 그 존재감이 커다란데, 여포는 굳이 그런 차림새를 고수했다. 길 가다 마주치는 게 아니라 전장에서 마주쳐도 그가 여봉선임을 한눈에 알아볼 법한 존재감이었다.
여포는 익숙하게 동백의 발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비(下婢)에게 술상을 봐 오라 이른 동백은 심드렁히 물었다.
“자네 그 장포는 또 어디서 구한 겐가?”
“침모(針母)들에게 맡겼지.”
당연하다는 듯한 여포의 말에 동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들으면 저희 집 침모를 말하는 줄 알겠다. 동백은 픽 웃으며 여포를 핀잔주었다.
“사사로이 황제의 사람을 쓰지 말아라 그렇게 말했건만, 동 상국이고 자네고 진짜 한결같네 그려.”
굳이 탓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정확히 하자면 들어 먹질 않으니 지친 것에 가까웠다. 선황제의 후궁이고 뭐고 다 손을 대니, 성에 남아나는 여자가 없었다.
“그만큼 예쁘지 않나. 어때. 근사하지?”
동백이 걱정하거나 말거나, 여포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 팔을 들어 휙휙 소맷단을 자랑했다. 어두운 천에 흰 모란꽃잎이 자잘하게 놓여 있었고, 금사로 그 테두리를 둘렀다. 소맷단 끝에는 붉은 매화꽃이 만개해 있었는데, 위로 올라올수록 매화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퍽 화려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취향이야 그러려니 해도 이왕이면 범이나 용과 같은 용맹한 맹수가 수놓인 쪽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꽃 자수를 더 좋아하다니 의외였다.
“잘 어울리긴 하네그려.”
별로 감흥 없는, 형식적인 반응이었으나 여포는 개의치 않고 흡족히 칭찬을 받아들였다.
“자네도 하나 해 달라 하게. 소동백이 자네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화사하니. 어디 한번 입어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포는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동백에게 건넸다. 갑작스레 들이밀어진 화려한 천 더미에 동백은 기겁하며 여포의 손을 밀어냈다.
“무슨 소리야. 자네 옷이 내 맞을 리 없지 않나.”
“한번 입어 보래도. 이런 건 무늬를 보는 거야.”
여포는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멀어지려는 동백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동백의 팔 한쪽을 잡아 억지로 소맷자락을 꿰어 넣었다. 동백이 손을 빼내려고 흔들어 대었으나 꽉 잡힌 팔은 꿈쩍도 안 했다.
이놈은 벗기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입히는 것도 손이 빨랐다. 동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