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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206)화 (20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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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윤으로 인해 동백이 불쾌감을 느끼듯, 왕윤 또한 마찬가지로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동백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소동백은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초선을 이용하여 미인계를 쓰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텐데.

계속해서 여포와의 만남을 훼방 놓다 못해 여포에게 무어라 속살거린 것인지, 이제 동백이 자리에 없다 해도 여포는 왕윤의 얼굴만 봤다 하면 슬그머니 줄행랑을 쳤다. 명백히 왕윤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몇 번이고 실패의 쓴 물을 마신 왕윤은 초조함을 참아내며 애먼 입술만을 깨물었다.

하지만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고, 오래지 않아 북쪽의 야만족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 장안으로 전해지며 막막하던 판도가 뒤흔들렸다.

야만족 토벌로 누굴 내보낼지 동탁은 골머리를 앓았다. 동백이나 여포를 보낸다면 손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나 굳이 그 둘을 보낼 정도의 사항은 아니었다.

때마침 제 아우인 동민(董旻)이 별다른 전공 없이 놀고 있었으니, 동민에게 벼슬을 내려 줄 명분이라도 줄까 하여 그를 출전시키기로 하였다. 동백은 동탁의 동생인 동민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사람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고작 야만족을 정벌하는 데 1만 군졸을 끌고 간 동민이 패배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친지인 동민의 실패로 인해 동탁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세상천지에 자신만만한 동탁이라 해도 이번 일로 인해 구겨진 자존심은 쉬이 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라 쉬운 일을 쥐여 줬더니 그것도 채 먹지 못하고 뱉어 내? 어디 가서 이 동탁의 동생이라 말도 하지 말거라!”

동생에 대한 분노와 야만족에 대한 살의가 동탁을 채웠다. 동탁은 머리끝까지 열이 오를 정도로 화를 내며 주변을 쥐 잡듯이 잡도리했다.

동탁은 제 성질을 한껏 부린 뒤 기어코 동백과 여포, 둘 모두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동백은 곤란스러웠다. 아직 왕윤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가 상대를 견제하는 건 이미 눈치를 챘고, 왕윤이 둔 여포라는 수에 대해 동백이 막 방어한 순간이었다.

왕윤이 사용할 중요한 패인 초선의 존재에 대해 동백이 알고 있으니 언뜻 보면 동백에게 있어 쉬운 전황이었으나, 그게 영 녹록지가 않았다.

동백은 왕윤이 칩거를 풀고 행동으로 나서기를 기다렸지만 왕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동백이라 해도 숨죽이고 있는 상대를 끄집어내어 도마 위에 올려 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윤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은 단둘뿐이었다. 과거의 일을 이용하든가, 없는 일을 만들어 내든가.

결국 동백은 왕윤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역적모의에 대한 위증을 교묘하게 만들기로 정하였고, 막 일에 착수한 찰나였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동백이 앞서 나서며 동탁에게 고했다.

“굳이 저까지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여 장군 홀로도 잘 해낼 텐데요.”

“여포로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압도적인 무력! 저들이 이전의 실패 따위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처절하고 강압적인 힘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쾅, 황좌의 손잡이가 동탁의 주먹질에 덜컹거렸다. 동탁의 눈은 시뻘겋게 핏줄이 서 있었다. 동탁이 이런 상태일 때는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는 걸 동백도 알았다. 하지만 동백은 다시 한번 동탁에게 재고를 종용했다.

“그러니까 그것 또한 여포 혼자서라도…….”

“오늘따라 군말이 많구만, 소동백이. 한동안 네 좋을 대로 해 대더니, 이제 내 명령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더냐?”

신경에 거슬렸는지, 비죽이는 동탁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분노가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으니 동백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동백은 더는 동탁에게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백은 고개를 숙인 채 동탁의 명을 받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숙어진 고개 아래로 드리워진 얼굴 표정이 좋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변수로 인해 천천히 왕윤의 덜미를 잡으려던 계획이 미뤄지게 되었다. 제가 출전하고 난 뒤에 왕윤이 무슨 움직임이라도 보인다면 동백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억지로나마 동백이 명을 따른다고 하니 그제야 마음에 찬 듯 동탁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저들이 두려워하게 해라. 이 동(董)가의 깃발이 보이기만 해도 벌벌 떨게 만들고 오란 말이다!”

동탁의 말이 쩌렁쩌렁하게 대정전을 울렸다. 2열 종대로 늘어선 문무백관들이 동탁의 외침에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결국 동백과 여포는 야만족을 처리하기 위해 출전 준비를 끝내자마자 빠른 시일 내로 장안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왕윤은 교활하게도 동백이 출정하는 당일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고개를 들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조금의 꼬투리도 잡히지 않을 기세였다.

그렇다고 왕윤 때문에 이대로 계속 장안에 머물렀다가는 군법 위반으로 동탁이 노발대발할 터였다.

토벌군은 동탁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토벌군의 출정이 늦어진다면 동탁은 동백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 세간 시선들을 종용하는 거라 고깝게 받아들일 게 뻔했다. 아무리 동백이라 해도 동탁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에서 군령을 어기면서까지 선처를 바랄 수는 없었다.

결국 왕윤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일은 토벌 이후로 미루어졌다. 장양에게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누명 씌우는 방법에 대해 배워 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치밀었다.

계속해서 왕윤 따위를 견제하며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났던 동백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어쩌면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나을지도.”

“당연하지 않은가. 확 쓸어버리고 오자고.”

왕윤에 대한 동백의 혼잣말을 야만족에 대한 말로 알아들은 여포가 호기롭게 답했다. 동백은 그런 여포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은 채 영혼 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동백은 불안한 심정을 누르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어 내었다. 그나마 여포와 함께 간다는 게 다행이었다.

동백이 파악한 왕윤의 계략은 제 수양딸인 초선을 이용해 여포를 낚고, 동탁에게 넘겨 여포와 동탁의 불화를 조장하는 것일 터였다. 지금까지의 왕윤이 여포에게만 접선을 시도한 것을 볼 때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동백이 여포와의 만남을 계속 훼방 놓았고, 결국 여포와 동백이 함께 자리를 비우니 왕윤도 머리가 있는 자라면 계책을 수정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동탁에게 먼저 선을 보이려나?’

여포는 동탁의 침실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호위의 위치였다. 그들이 토벌을 나간 동안 진상된 초선이, 동탁의 수청을 드는 와중에 눈이 맞게 되는 것도 불가능한 흐름은 아니었다. 자오가 아름답다 인정할 정도니 눈길만 스쳐도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만약 동백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윤이 동탁에게 초선을 진상한다면, 토벌이 끝나고 여포가 초선과 만나기 전에 미리 초선을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동탁의 애희와 그 양부를 죽이는 것보다, 사도와 그 수양딸을 죽이는 게 뒷수습하기 쉬운 일인 건 자명해……. 역시 지금 장안으로 암살자를 보내서 그들을 일찍 처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도나 되는 자라고는 하지만 관점을 달리 생각하면 왕윤은 고작 사도 ‘정도’였다. 그냥 죽여 버리고 뒷수습이야 다소 얼기설기 처리해 버리면 동탁은 그냥 넘어가 줄 터였다. 관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어 나간 고관대작들이 한둘도 아니고, 곧 익숙해질 터였다.

거기까지 흘러가던 와중 돌연 동백은 도리질 쳐 상념을 떨쳐 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지. 요 근래 계속해서 왕윤과 초선의 일을 신경 쓰느라 나도 많이 지쳤나 보군. 인내심이 짧아졌어.’

왕윤과의 대국은 이제 막 초중반에 올라섰을 뿐이었다. 무리하게 둔 그 한 수가 훗날 자충수가 되어 저를 꿰뚫을지 누가 아는가. 동백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껏 동백이 봐 온 동탁은 여자에게 그리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천하절색의 첩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오롯이 ‘동탁’ 그 이름 두 글자가 중요한, 자기애가 강한 자였다. 고금제일의 미인을 품에 안는 쾌락보다, 그런 여인을 제가 차지했다는 과시적인 기쁨이 더 큰 인간이었다.

원전에서 여포와의 반목도 동탁이 진실로 초선에게 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제 권위에 도전한 여포에 대한 분노가 원인일 터였다.

그러니 동탁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왕윤의 꿍꿍이를 드러낼 수만 있다면, 동탁이 먼저 왕윤과 초선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초선을 죽이는 일은 영 탐탁지 않단 말이지……. 리리가 생각나서 그런가.’

제가 미처 지켜 주지 못한 그 아이가 자랐다면 초선과 비슷한 연치였을 것이다. 리리라면 분명 곱다는 초선보다도 더 아름답게 자랐겠지. 동백의 눈이 추억을 더듬듯 흐려졌다.

하지만 결국 그 죽음이 필요하다면 거리낌 없이 죽일 것이다. 동백이 직접 초선과 왕윤을 처리하는 시점에 된다면 명분이니 뭐니 가릴 여유도 없는 상황일 텐데, 고작 불편한 심기로 인해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런 동백의 복잡한 생각을 모르는 여포는 그저 신이 나서 시시덕거렸다. 토벌이 아니라 나들이라도 가는 사람 같았다.

여포는 말을 몰아 동백의 옆에 서며 한참을 뭐라 뭐라 나불대었다. 자기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동백은 여포가 좀 닥쳐 줬으면 했지만, 잔뜩 흥에 겨운 여포를 자제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에 무슨 음식이 유명하더라 하는 게 누가 보면 꽃이라도 따러 가는 줄 알겠다. 실제로는 꽃이 아니라 오랑캐의 머리를 따올 놈이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동백은 최대한 빨리 토벌을 정리하고 돌아오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만큼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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