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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212)화 (212/522)

리리는 씁쓸히 웃었다. 그러려고 했다. 동백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이 한 몸 바쳐 동백을 지키는 것만이 리리의 바람이었다.

이렇게 동백이 자신을 데려오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리리에게 과분한 처우였다.

한때나마 동백과 재회하여 저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을 희망으로 삼아 살았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왕윤이 저에게 연환계를 제안한 순간,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소망인가 깨닫게 되었다.

리리는 지금껏 계속해서 사내들에게 발목 잡힌 인생을 살아왔다. 동백의 곁에 있다가, 이 끔찍한 인생이 동백까지 옭아맨다면……. 순간의 제 행복을 위해 동백의 미래까지 진창으로 처박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리리는 동백과 시선을 마주했다. 동백의 밀빛 눈동자에 리리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저는 예전의 리리가 아니에요.”

수줍게 웃던, 소동백의 어린 색시 담리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초선입니다. 양부라도, 아니, 그게 혹여 친부라도 죽일 수 있는 독한 여자예요.”

사모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리리는 굳이 그 말을 뱉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소동백의 처 담리리의 이름을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동백을 사모한다 입에 올릴 자격이 저에게는 없었다. 남은 것은 담리리의 겉껍데기를 뒤집어 쓴 초선이라는 여자였다.

리리의 입술이 미약하게 올라갔다. 자조적인 웃음 또한 처연한 미가 있었다. 리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꼼짝없이 굳어 있는 동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상공께서 봄꽃 같다 해 주셨던 저는 이제 없어요. 겉은 아름다워 보이나 남은 것은 악(惡)뿐인 독초입니다.”

스스로를 매도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으며, 조금의 약한 틈도 내보이지 않으려는 리리의 모습에 동백의 심장이 손으로 쥐어짜인 듯 괴로웠다. 리리가 지금껏 얼마나 마음고생했을지 짐작 갔다.

동백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앞뒤 가리지 않고 토해 놓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분노의 고삐를 놓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리리를 이렇게 만든 놈들과 마주한 뒤여야 했다. 지금 급한 것은 제 화를 흩뿌리는 것이 아닌, 간신히 찾게 된, 깨질 듯 위태로운 보물을 소중하게 들어 올려 조심스레 제 품에 넣는 것이었다.

“……분명 저는 순수하고, 마냥 밝고 환했던 그대가 좋았습니다.”

동백의 손등이 리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느릿한 손길에 리리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더 이상 순수하지도, 밝고 환하지도 못했다.

리리는 차라리 동백의 손에 죽고 싶었다. 동백의 품 안에서, 사랑하는 이를 눈에 담아 펄떡이는 심장이 꿰뚫린 채로……. 아름답고 순수했던 담리리로서 남겨지고 싶었다.

눈이 감기기 직전, 리리의 시선 끝에 동백의 방 한편에 고이 놓여 있는 장포가 닿았다. 감색 비단에 어설픈 솜씨로 붉은 동백꽃이 수놓아진 장포는 리리 또한 잘 아는 것이었다. 닫힌 눈꺼풀 너머로도 그 모습이 선명히 그려질 만큼. 동백이 저 장포를 아직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리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하지만 연이어 제 입술에 마주 닿아 오는 말캉한 감촉에 리리의 심장은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뒤흔들렸다. 깜짝 놀란 리리는 눈을 떴다. 리리의 시야 가득히 동백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리감긴 동백의 속눈썹은 머리카락과 같이 엷은 색이었고, 가까이에서 보이는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닿았을 뿐인,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리리는 그것만으로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술이 불타는 듯 뜨거웠다.

낙인이라도 찍듯 내리누른 동백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정을 유지했던 리리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무, 무슨……!”

마주한 동백의 얼굴은 진지했다. 동백은 농 한 점 섞지 않은 진심 그 자체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당신도 좋습니다. 제 눈엔 그대가 연꽃으로 보입니다. 그대가 그 어떤 진흙탕을 헤치고 나왔는지는 몰라도, 그 속에서도 그대의 아름다움은 쉬이 가려지지가 않아요. 초선이든 리리든 아무 상관 없어요. 저는 그저 그대가 그대라서 좋은 겁니다.”

처음에는 여동생 같았기에, 그저 지켜야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리는 되레 동백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속이 깊었고, 동백은 그런 리리에게 심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동백에게 있어서 리리는 특별했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며, 언제 누구에게 버려질지 모르는 척박한 이세계에서 유일하게 동백을 받아 주는 존재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장양의 저택에서 금단요와 장양, 그리고 리리와 함께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계속해서 그때를 꿈에서 덧그릴 정도로. 하나 다신 돌아갈 수 없는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었다.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동백 홀로 남았다. 그리고 과거를 곱씹을 때마다 동백은 계속해서 다짐하는 것이었다. 다시는 내 손에 들어온 것을 쉬이 넘기지 않으리라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악귀라도 기꺼이 되어 주겠노라고.

“독하고 더럽다라.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제 손이 아직도 깨끗하겠습니까? 내가 당신 부친을 죽였습니다. 아편에 취하게 하여 자살로 몰아갔지요. 당신 부친과 결탁하여 당신을 내게서 뺏어 간 하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이런 제가 혐오스럽습니까?”

갑작스러운 동백의 고백에 리리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부친의 존재에 대해서는 동백이 털어놓을 때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리리의 머리를 꽉 채운 것은 오로지 동백의 안위뿐이었으니까.

어렴풋이 잘 지내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부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그것도 동백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기는 했지만 가슴은 놀랄 정도로 고요했다. 부친은 이미 리리에게 있어 가슴 밖의 사람이 되었다.

리리에게는 동백이 더 중요했다. 동백밖에 없었다. 리리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려 했지만 동백이 말을 잇는 것이 먼저였다.

“제 손에는 이미 몇 천의 피가 묻어 있지요. 낙양을 불태우도록 지시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포악한 동탁의 치세가 하루라도 더 갈 수 있도록 지탱하고 있는 게 저예요. 내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피를 한데 그러모은다면 난 피 속에서 익사할 테지요.”

동백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심지어 자신은 이 두 손으로 초선을 죽일 생각 또한 했었다. 제 앞길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운명의 신은 잔인했다. 내가 내 손으로 초선을 죽였다면 어찌 될지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상황을 몰아갔다.

동백의 입술이 비틀렸다. 동탁이 어째서 순순히 저에게 초선을 넘겨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포는 동탁과 다를 것이다.

신이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가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기어코 동탁군을 몰락시키겠단 속셈일 터였다. 그래야 군웅할거, 본격적인 사분오열의 전황이 펼쳐지고 그 기회를 틈타 유비들도 세력을 불릴 테니까.

그리고 동백은 그런 신이 정해 준 길이 무엇인지 빤히 알면서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지 못했다. 초선이 리리인 시점에서 모든 게 정해졌다. 상대가 동탁이건 여포건, 답은 간단했다. 동백은 리리를 지킨다. 그뿐이었다.

동백은 오롯이 리리가 돌아오기만을 기원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동백은 감사했다. 지금껏 있었던 고생과 고통을 잊고 이제는 그저 행복하게만 지냈으면. 그것만이 동백이 리리에게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그 모든 복잡한 속내를 삼킨 채, 동백은 리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니 그대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전부.”

리리의 가녀린 어깨 너머, 동백의 눈이 살의로 번뜩였다. 성역을 침범당한 광신자의 눈길이었다.

리리는 동백의 품 안에서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동백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 품을 얼마나 그렸던가. 동백과 함께했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과거를 계속해서 덧그린 건 리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자신은 너무 순진했었다.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그게 전부 타인에게 의미를 두어 생긴 일이었다.

그래도 과거의 과오로부터 얻는 게 있었다. 동백을 위해서라면 리리는 누구든 버릴 수 있는 무정한 여자가 되었다. 만약 필요로 한다면 양부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제 생명의 은인조차도 담보로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초선이든 리리든 아무 상관 없다며, 나는 그저 네가 너라서 좋은 거라 말하는 동백의 말이 꿀과 같이 리리의 귀를 적셨다.

동백이 붙잡으면 자신은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없다는 걸 리리는 진즉 알고 있었다. 제가 동백의 곁에 있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동백의 간절한 얼굴을 보며 동백의 청을 거절하는 일은 리리로서는 불가능했을뿐더러, 리리 또한 진심으로 동백과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동백이 바라는 한, 다시는 동백을 떠나지 않으리라. 리리는 동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동백을 위해서라면 악귀라도 기꺼이 되어 주겠노라. 리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행복에 가득 찬, 꽃과 같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렇게 한 쌍의 연인 아닌 연인은 8년 만에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둘 사이에 있었던 공백에 관한 이야기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둘 사이의 이야기만이 오갔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평탄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덧그리는 건 오로지 행복한 미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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