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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날, 초선이 왕윤의 저택에 도착했다. 화려한 가마를 타고 호위를 거느리며 도착한 수양딸의 모습에 왕윤의 부인은 감격한 표정으로 초선을 맞이했다.
왕윤의 부인은 갑작스레 수양딸을 소동백에게 넘겨주었다는 왕윤의 말에 깜짝 놀랐다. 부인은 미리 언질이나마 주지 그랬느냐 항의를 했다. 하지만 왕윤은 입을 다물 뿐이었고, 부인은 초선이 걱정되어 전전긍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초선이 왕윤의 저택에 있을 때보다도 더 화려하고 곱게 꾸며진 모습으로 금의환향하니,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기뻐하였다.
초선은 꽃과 같은 자태로 왕윤과 부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오, 어서 오너라. 소 장군이 잘해 주더냐?”
“극진히 대해 주십니다.”
왕윤과 초선의 대화는 평범했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어디까지 소동백을 홀렸는가 하는 음흉한 계략이 숨어 있었다.
“부인, 내 초선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오.”
“알겠습니다.”
왕윤의 말에 부인은 호들갑스러운 심정을 잘 갈무리한 뒤 방을 나섰다. 뒷걸음질로 방을 나서는 왕윤의 부인은 지아비인 왕윤을 하늘처럼 여기는 순진하고도 가련한 늙은 여인일 뿐이었다.
리리는 명목상 제 모친인 이의 모습을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담리리였던 당시에도 일찍 타계한 모친으로 인해 모친의 품을 모르고 자랐었다. 모친처럼 여긴 유모는 저를 대신하여 암살자들의 손에 죽었다. 왕윤은 계산속이 있었지만, 부인은 리리를 친딸처럼 여기고 잘해 주었다.
그제야 리리는 제가 왕윤을 죽인다는 것은 부인도 함께 지옥으로 떠미는 것과 같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책감이 리리의 심장을 따끔따끔하게 옥죄었다. 품속의 단도가 제 심장을 할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낱 동정심과 죄책감으로 일을 물릴 수는 없었다.
분명히 동백은 반대했다. 지금 자신이 어떠한 결심을 품고 왕윤의 저택에 왔는지 모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아무도 리리를 질책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자신이 물러서면, 사태는 더더욱 몸을 불려 동백을 괴롭힐 것이었다. 더는 동백의 뒤에 숨어 있고 싶지 않았다. 너는 동백에게 있어 방해일 뿐이라는 여포의 시선이 리리의 가슴을 헤집었다. 리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제 앞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왕윤은 앞으로 있을 여포와의 만남을 생각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곧 여포가 올 것이다. 여포를 위한 잔칫상은 준비되어 있었고, 여포에게 소동백의 방해 없이 초선을 몰래 빼 오느라 힘들었다며 엄살을 피울 셈이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왕윤은 걱정스러워하는 어조로 리리에게 일렀다.
“반 시각 후에 여포가 올 것이다. 여포의 정신을 쏙 빼놓아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
“제가 누구이옵니까? 그 소동백 또한 적자 연주로 단번에 홀리지 않았습니까. 여포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도 그렇지……. 네 역할이 참으로 중하다. 너밖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없구나.”
수월히 진행되고 있다는 리리의 말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 왕윤은 답답한 속에 차를 벌컥 들이켰다. 빈 찻잔에 리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나 하여 추가로 준비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이 적시였다.
리리는 왕윤의 찻잔을 채워 주는 척, 다관(茶罐)을 기울이며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마비 약을 조심스레 왕윤의 차에 탔다.
동백의 우려대로 왕윤은 비록 지금은 쭉정이나 다름없는 노인이었지만, 한때 무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리 노인이라 하여도 힘 차이가 역력한 법. 리리는 확실히 왕윤을 처리하기 위해 약의 힘을 빌렸다.
요란하게 뛰는 심장과 달리 리리의 표정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손끝의 떨림까지 감출 수는 없어, 리리는 약봉지를 탁자에 떨어트리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왕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타는 목에 찻잔을 손에 쥐었다. 왕윤이 찻잔을 목 아래로 넘기기까지, 리리는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토할 지경이었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차가 쓰구나.”
왕윤은 차를 마셨는데도 멀쩡할뿐더러, 독을 넣은 리리가 켕길 말을 해 댔다. 리리는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른 듯 뜨거웠다. 리리는 제 얼굴로 손을 뻗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가녀린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가는 것을 긴 소맷자락이 가렸다. 리리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혹시라도 약이 듣지 않은 거면 어떻게 하지? 너무 약을 조금 쓴 건 아닐까? 아니면, 이미 내 변절을 눈치챈 왕윤이 방비하고 있던 건…….’
리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을 꾹꾹 눌러 삼켰다.
다행히도, 그런 리리의 걱정은 기우였다. 왕윤이 찻잔을 탁자 위로 올려 두기가 무섭게 왕윤의 몸이 휘청였다. 허우적대는 팔이 찻잔을 쳤다. 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왕윤은 어지러운 듯 손으로 머리를 짚었지만, 이내 그대로 몸이 허물어졌다. 바닥을 뒹구는 찻잔과 같은 위치에 놓인 시선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왕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혀끝은 이미 뻣뻣해져 의문조차 제대로 표해 내지 못했다.
“어, 어째, 서…….”
“다행입니다. 걱정했습니다.”
그제야 리리는 안도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리리는 턱에 송골 맺힌 식은땀을 훔쳐 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마비 약을 먹은 게 저인 것처럼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뒤늦게 평정심을 찾은 리리는 마비되어 컥컥거리는 왕윤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흔들림 없이 곧았다.
왕윤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지금 이런 꼴이 된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는 초선이 자신을 배신한 거라는 사실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초선을 마음속 깊이 신뢰했다기보다, 모든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피하려 해도, 지금 상황은 명백했다. 제가 제일 믿었던, 수양딸인 초선이 바로 저를 바닥에 뒹굴게 한 배신자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소동백을 홀리라 했더니, 제가 홀려서 왔단 말인가? 왕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윤과 리리의 눈이 마주쳤다. 리리의 여린 어깨는 바들바들 떨렸고, 얼굴은 목련처럼 하얬지만, 왕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방해자를 처리하기 위한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리리는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날카로운 칼날은, 인제야 칼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왕윤의 목숨을 취할 단도의 칼날은 초승달과 같이 환하게 빛났다. 왕윤의 목숨은 곧 저물 그믐달처럼 풍전등화가 따로 없었다.
왕윤은 바닥을 손톱으로 벅벅 긁으며 리리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었다. 역사가 이 왕윤을 무어라 평할 것이란 말인가. 폭군 동탁에게 아부하고, 그의 오른팔인 동백과 여포와 어울려 다닌, 한 황실의 변절자이자 협잡꾼이라 떠들어 댈 것이 눈에 선했다. 그 꼴만큼은 아니 되었다.
하지만 왕윤이 바락바락 외치고 싶어도, 현실에서 제 몸은 바닥에서 허우적댈 뿐이었다. 벌겋게 핏줄이 터진 왕윤의 눈동자에 원한이 가득했다.
단도를 양손으로 마주 잡은 리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번도 칼을 잡아 본 적이 없는 뽀얀 손에 들린 날붙이는 이질적이었다. 리리는 바닥에서 절 노려보는 양부를 향해, 처음으로 잡은 칼을 사람에게 겨누어졌다.
왕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그저 그의 죽음이 필요할 뿐이었다.
리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낮게 숨을 뱉은 리리는 각오와 함께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허공에 은빛 궤적이 그려졌다. 허공에 남은 시린 잔흔 그대로, 리리의 가슴에도 깊은 잔흔이 낙인처럼 남겨졌다.
살인자의 낙인이었다.
* * *
왕윤의 부름에 여포는 불편한 심기로 불퉁거렸다. 제가 한두 번 들러 주니 아주 오라 가라 제멋대로다.
하지만 소동백이가 한동안은 왕윤 하는 짓거리에 어울려 주라 했으니, 그리해 줄 뿐이었다. 뭐, 왕윤이 절 부를 때마다 잔칫상을 크게 벌여 주는 게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래서 여포는 평소보다 일찍 왕윤의 저택으로 향했다.
여포가 왕윤의 저택의 문을 쿵쿵 두드리니, 왕윤의 저택 시종이 문을 열어 익숙하게 여포를 반겼다.
대문을 성큼 넘어섬과 동시에 여포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여포의 시선이 자연스레 왕윤의 방으로 향했다.
“왕 사도는.”
“방에 계십니다.”
여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포는 턱짓으로 안내하라 시종에게 지시했다. 시종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온 여포의 모습에 당황했다. 본디 왕윤에게 먼저 일러 여포를 어디로 모실지 확인을 받았어야 했지만, 여포의 기세에 눌린 시종은 얼떨결에 여포를 그대로 왕윤의 방으로 안내했다.
왕윤의 방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향할 때마다 여포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여포로서는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인, 죽음의 향이었다.
여포의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왕윤이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궁금한 것이 구미가 당겼다.
여포가 초선에게 접근하지 않겠다 했지만, 동백은 여포를 믿지 않았던 만큼 초선에 대한 언급은 되도록 피했다. 동백이 여포에게 오늘 초선이 갈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여포는 지금 왕윤의 저택에서 벌어진 일을 일말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