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232)화 (232/522)

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 기현(祁縣) 사람이었던 왕윤은 여포가 태어났을 당시 태원의 관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병주를 떠났지만, 그 무렵 분명 왕윤은 오랑캐 여인과 정을 통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황상 여포가 제 아들이 분명했다. 오랑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았다는 것은 한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었다. 비록 여포가 양부인 정원을 죽였다고는 하나 설마 제 혈육인 친아비를 죽이진 않을 거로 생각했다. 왕윤은 여포에게 내가 네 아비라, 제발 이 아비를 살려 달라 애원하려 했다.

하지만 왕윤의 입에서는 사람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컥컥거리는 신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벙긋거리는 입을 타고 피가 꿀럭꿀럭 뱉어졌다. 바닥에 뚝뚝 흐르는 왕윤의 피를 보며 여포는 킬킬대었다.

“뭐, 그냥 그저 그런 이야기야. 짐승의 아비가 누구인지 그 무어가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안 그래?”

여포는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몸은 고양잇과 맹수처럼 유연하게 균형을 잡았다. 탕, 한 번 바닥에 내리찍은 방천화극을 한 바퀴 유려하게 휘두른 여포는 그대로 팔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번뜩이는 날카로운 쇳날에서 한기가 자르르 흘렀다.

왕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으로 여포를 올려다보았다. 제 삶의 종말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고작 여포가 제 혈육일지도 모른다는 단편적인 정보에 의지하여 아무런 위기감도 비치지 않는 모습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여포는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뱉었다.

왕윤은 여포의 앞에서는 굽실대었으면서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안색을 바꾸어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던 자였다. 그런 왕윤이 멍청하게 구는 꼴을 보는 건 퍽 재미있었으나, 충분히 즐길 만큼 즐겼다. 이제 끝내야 할 때였다.

방천화극은 작두처럼 왕윤의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날의 끝은 주저함 하나 없었다.

“크헉, 크흑…….”

피 섞인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왕윤은 여포의 방천화극에 명을 달리했다. 소동백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허탈할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확실한 죽음을 위해, 그리고 리리가 남긴 단도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여포의 방천화극은 왕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방천화극의 날이 왕윤의 몸을 찍었다 들릴 때마다 왕윤의 사지가 처참히 분리되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죽였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였으나, 그 결과물은 지저분할 뿐이었다.

무거운 방천화극을 몇 번이나 내리쳤지만, 여포는 숨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포는 건조한 시선으로 방 안을 훑었다. 아까와는 달리 사방이 피 칠갑 되었고 바닥의 왕윤은 곤죽이 되어 있었다. 여포는 방천화극을 허공에 휘둘러 칼날에 묻은 살점과 핏덩이를 떨쳐 내었다.

왕윤의 짐작대로, 여포는 왕윤의 친자가 맞았다. 죽기 직전의 순간, 왕윤은 제 아들의 존재만을 간신히 알았을 뿐 제 피를 이은 자가 어떤 괴물로 자라났는가를 깨닫지는 못했다.

여포는 왕윤이 제 아비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아비를 그리워하는 건 10살 남짓한 그 시절에 끝이 났다.

여포에게 있어 아비라는 작자는 타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타인보다도 못하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뭔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포 본인이 왕윤에게 갖는 감정은 고요할 뿐이었다.

여포는 여(呂)포였다. 왕(王)씨 성에 대한 미련도 없었고, 그것은 굳이 취하고자 할 만큼의 쓸모도 없었다.

여포는 유교 윤리에 따른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양부에 이어 친부까지 제 손으로 죽였지만, 여포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제 인생을 꼬이게 한 그에 대해 분노가 치솟는 것도 아니요, 친부를 살해했다는 사실에 대한 배덕감에 겨운 흥분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여포는 덤덤하게 이 이후에 벌어질 귀찮은 일들을 짐작해 보았다. 그에게 있어 왕윤의 죽음은 언제나와 같이 사람을 죽였다, 그저 그뿐이었다.

하지만 왕윤을 죽이게 된 원인은 그리 마냥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제 성질대로, 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죽였던 것과는 다른 이유.

소동백을 위해.

여포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를 죽였느냐가 아니었다. 누구를 위해 죽였는가였다. 여포가 타인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동백은 언제나 여포에게 있어서 예외를 만들어 냈다.

여포는 자신의 변칙 대상을 떠올렸다. 곱상한 얼굴을 찡그리며 여포 너 때문에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며 투덜거릴 소동백의 모습이 선했다. 투닥거릴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배 속 깊은 곳이 홧홧이 타오르며 폐를 지나 심장까지 뜨거워졌다.

여포의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뜨거운 태양을 삼켜 배가 부른, 맹수의 흡족한 웃음이었다.

* * *

왕윤을 만나러 간 리리가 피투성이로 쫓기듯 저택에 돌아오자, 그 모습과 마주친 동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겁니까? 어쩌다 이런 꼴이!”

“……제가 왕윤을 처리하였습니다. 상공께서는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실 것이 없어요.”

갑작스러운 정적의 죽음에 동백의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시퍼렇게 질렸다. 동백은 다급한 손길로 리리를 매만졌다. 어디 다친 데라도 없는지 꼼꼼한 눈길로 확인하면서도 입에서는 연신 비탄의 질타가 쏟아졌다.

“내가 그리도 하지 말라 하였는데!”

“소녀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공께서는 언제나 소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녀는 원하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내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은 무사히 온 것 같다만 일이 틀어져 잘못되기라도 하였으면 어찌하려고 했어요!”

분기에 찬 동백의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방 안을 울렸다. 리리는 죄책감에 동백에게서 시선을 흘렸다. 자신이 한 짓에 후회는 없었고,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짓을 했을 테지만 동백이 화를 내게 한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리리는 죄인의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동백은 침묵하는 리리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동백도 리리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되레 이렇게까지 리리를 몰아넣은 자신의 무력함이 더 한스러웠다. 어떻게 만나게 된 리리인데, 제가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 자책했다.

그래도 리리가 다친 곳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동백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저택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다행입니다. 집주인을 죽였는데도 어찌 먼저 내게 올 수 있었던 겁니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여 공이 도와주었습니다.”

“여포가?”

동백의 목소리 끝에 의아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여포는 순순히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는 이가 아니었다. 동백은 리리에게 좀 더 자세한 경위를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때마침 여 공이 왕윤의 저택에 도착해서……. 자신이 죽인 것으로 할 테니, 먼저 나가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 공을 두고 빠져나왔습니다.”

“그놈은 또 왜 갑자기…….”

“그게 더 나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백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여포가 그 상황을 모르는 척했다면 리리가 위험에 빠졌을 테니 동백으로서는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울렁임이 동백의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러니까, 여포가 먼저 제안했다고? 자기가 죽인 걸로 하겠다고?”

“네.”

여포가 왜? 왕윤을 자신이 죽였다 하여 그에게 득이 될 이유가 하나 없었다. 오히려 해가 되었다.

여포는 귀찮은 걸 싫어했다. 동탁의 치세라고는 하나 한인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고, 최근 들어 동탁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다.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보여 주기 식의 제약이나마 사도를 죽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여포로서는 그것이 기껍지 않을 터였다.

〈왕윤을 죽여 줘?〉

동백의 머릿속에 여포의 목소리가 웽웽였다. 물론 그가 그리 말하기는 했다. 산책하러 나가듯,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목소리로.

〈그자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말해.〉

〈당장 죽일 테니까.〉

하지만 막상 그가 말했던 그대로 이루어지니 남는 것은 의심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동백의 편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했지만, 정작 그 이유에 대해 동백이 공감하지 못하니 여포의 주장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알 수 없이 흐릿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동백이 쌓아 온 여포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 상황을 몇 번을 되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동백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피곤함이 몰려왔던지라, 동백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답답함이 치밀었다. 리리를 만나 평소 같지 않게 굴었던 동백에게 여포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성을 내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저놈이 왜 저러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또한 같았으리라. 그 자신이 알고 있는 소동백과 다른 행동을 하는 소동백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답답했으리라.

동백은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여포를 이해할 것 같으면 현재의 여포가 동백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리리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백의 옆에 앉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상공?”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저…….”

괜찮지 않았다. 기분파인 여포라고는 하나 그런 행동을 취한 데에는 분명 무슨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날 기분이 유독 좋았다거나, 그도 아니면 왕윤이 자꾸 불러 대어 기분이 상했다거나. 아니면 제 손으로 왕윤을 죽인 리리에게 관심이 생겼다거나.

“왜?”

동백의 입을 타고 의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런 동백을 바라보는 리리의 표정에 상심이 가득했다. 리리는 이유를 알았다. 동백이 의아해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진실은 명백하고도 단순했다.

하지만 리리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제 입으로 말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여포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 해도 달라질 일은 없었다. 지금 당장 동백이 알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엇에도 욕심이 없는 리리였지만, 동백의 일, 오로지 그것 하나에 대해서는 이기적이 되었다. 리리의 눈동자 위로 드리운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