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237)화 (237/522)

동백을 깔아뭉개고 나서야 조금 흡족한지, 여포는 동백의 위에서 숨을 골랐다. 헉헉거리는 여포의 숨소리와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가 동백의 양쪽 귀를 메웠다. 이제는 여포의 옷이 축 젖은 게 비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질척이고 야릇한 분위기가 잠시 유지되었다. 여포가 행동을 멈추었다고는 하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축축한 분위기를 찢었다.

여포가 그쪽으로 몸을 틀었고, 자연스레 생긴 공간의 틈으로 동백 또한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린 곳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리리가 있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주안상이 엉망이었다.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한 리리의 표정이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리리는 추적추적, 동백과 여포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옮겼다. 바닥에 날카로운 자기 파편이 널려 있는데도 개의치 않은 채 리리는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술병 조각에 찔렸는지, 리리가 발을 뗄 때마다 피가 숭숭 바닥에 떨어졌다.

여포는 동백을 짓누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네년.”

여포의 눈이 휘어지며 리리를 바라보았다. 백전무장의 살기 어린 시선은 아녀자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리리의 몸이 크게 움찔하였다. 하지만 땅을 디딘 발은 물러섬이 하나 없었다.

리리는 손을 뻗었다. 그곳엔 동백의 쌍검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리리는 동백의 검 하나를 빼 들었다. 스르릉. 달빛을 반사한 예기가 방 안을 비추었다.

동백은 한 손으로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검이라지만, 리리의 가녀린 팔뚝으로는 양손으로 들어도 무거웠다. 여포에겐 가소로워 보이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만 했다. 리리는 검을 들어 여포에게 겨누며, 여포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여 공.”

리리의 표정은 결연했다. 저에게 칼끝이 향하였음에도 여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다른 것으로 흥분한 듯, 여포는 동백의 목을 틀어쥐며 소리쳤다.

“너도 알고 있었구나? 둘이서 날 속인 거야? 아주 서로 못 죽을 듯이 굴더니, 소동백이가 여자였다고?”

“큿!”

동백은 괴로운 듯 여포의 손등을 긁었다. 여포가 동백의 목을 쥐기가 무섭게 리리의 표정이 시퍼렇게 변했다. 저 손이 단숨에 사람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물론 여포가 동백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리리의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리리는 그제야 동백이 여포의 행동 하나하나에 노심초사하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포의 변덕과 생각 없는 행동으로 밀려오는 결과의 여파가 무시무시했다.

여포는 그대로 동백을 끌고 침대로 향했다. 동백은 꽉 죄는 목의 고통과 순순히 끌려갈 수 없다는 반항으로 힘껏 발버둥 쳤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리리는 그대로 관성을 이용해 동백의 검을 치켜들어 여포를 향해 휘둘렀다. 휘이익, 제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칼날이 여포를 향해 내리쳐졌다.

하지만 역시 그 정도로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여포를 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여포는 칼이 내려오는 속도에 맞춰 주먹으로 칼의 면을 그대로 후려쳤다.

깡!

수직으로 꽂히는 충격에 칼을 놓친 리리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포는 리리의 방해에도 개의치 않고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했다. 여포는 동백을 번쩍 들어 침대에 던져 넣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리리와 단잠을 자고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여포의 침략으로 어수선해졌다.

동백은 침대에 닿기가 무섭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반동으로 몸을 튕겼다. 빠져나가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으나, 여포의 손 하나에 가로막혀 저지당했다. 여포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여포는 그대로 동백을 찍어 눌렀다. 꽉 눌리는 폐부의 고통에 동백은 숨을 헐떡였다. 동백은 흐려지는 눈을 간신히 떠 저를 내리누른 여포를 올려다보았다. 여포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동백을 핥듯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풀어 헤쳐진 상의 사이로, 흰 목덜미와 두드러진 쇄골, 그 밑으로 미약한 여자의 흔적이 보였다. 여포는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레 동백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단단한 근육 위로 슬며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여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로? 정말 소동백이 여자라고?’

제 눈이 삐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다시 한 번 만져봤지만 손바닥의 촉감은 거짓말이 아니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쉬이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여포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저와 함께했던 소동백의 모습들이 곤죽이 되어 뒤죽박죽 섞였다. 

그때 여포의 발에 매달리는 것이 있었다. 리리였다.

“안 됩니다! 상공은 안 돼요! 차라리 저를, 저를 안아요. 상공은…….”

리리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여포는 제 발밑의 리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년도 참 독한 년이었다. 리리는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도 참으로 가녀렸다. 빗물을 가득 머금은 모란꽃이 이러할까, 가히 생긴 것은 천하절색이요, 만약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취했을 만큼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포에게는 귀찮을 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런 것이 아니었다. 동백이 진짜 여자인지, 아랫도리까지 까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여포의 가슴속에 불쑥 의문이 치솟았다. 그렇게 해서 확인하고 나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증거를 제 코 앞에 들이댄 후에는 어찌할 것인가? 이미 정황상 확실한 일이다. 굳이 재차 확인하고자 하는 이유가 뭐지?

아, 모르겠다. 여포는 이렇게 머리가 어려운 건 딱 질색이었다. 최근 들어 소동백에게 어울려 준답시고 그답지 않게 머리를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포화 상태였다. 일단 저지른 후에 생각하는 것이 여포의 성미에 맞았다.

그리 생각한 여포는 우선적으로 귀찮게 바락거리는 리리를 치우기 위해 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포의 손이 떨어져 나가 리리에게로 향한 순간, 동백은 눈을 크게 떴다. 동백은 여포가 목표를 리리로 옮겼다고 생각했다. 리리를 안을 셈이다. 그렇게 판단한 동백은 여포의 손에 힘이 떨어져 나가기가 무섭게 리리를 향해 뻗은 여포의 팔에 몸을 내던졌다.

“안 돼, 얘는 안 돼.”

동백은 애원했다. 지금껏 여포를 밀어내던 것과 달리, 동백은 여포의 굵은 팔뚝에 온몸으로 매달렸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흘러내린 웃옷으로 인해 동백은 거의 알몸뚱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지 따위는 없었다. 동백은 여포를 보며 간절히 말했다.

“응? 얘는 진짜 안 돼, 리리만은, 내가 얘를 어떻게 되찾았는데……. 그냥, 응? 그냥 리리는 보내 주고…….”

급한 상황에서 리리를 초선으로 부르는 것도 잊었다. 동백은 필사적으로 여포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다.

리리에게는 충분히 많은 고난이 있었다. 리리에게 두 번 다시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두진 않을 거다, 평생 너를 지키겠노라 다짐했던 게 어제 일처럼 눈에 선했다. 그런 리리를, 저 대신 제물로 바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제가 겪는 게 나았다.

게다가 여포가 리리를 안게 되면, 그 후 제가 느낄 자괴심을 풀 곳이 없었다. 이미 여왕으로 짐작되는 유비 패거리들과 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거기에 여포까지 얹어서 복수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당하는 건 달랐다. 그냥,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며 정신승리라도 하고 잊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여포는 욕심이 많은 사내였다. 동탁에게는 여자라는 걸 숨겨 주는 대신 그의 부하가 되기로 약조했다. 여포에게도 비밀을 지켜 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차피 저는 여자로 살 것도 아니니 수치심을 느낄 일도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각오한 동백은 애써 미소 지었다.

여포는 제게 매달린 동백을 바라보았다. 동백은 모르고 있었지만, 눈가는 눈물범벅이었다. 어색하게 올라간 입가는 겁에 질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포에게 달라붙어 여포가 리리에게 향하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아까는 닿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으면서,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필사적이었다.

그 순간 여포의 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듯, 애써 억눌렀던 것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여포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그대로 손을 휘둘러 동백을 뿌리쳤다. 동백의 몸이 침대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큿!”

여포는 주먹을 쥐었다. 아기 두개골만 한 주먹이 꾸욱 쥐어지며 손등에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침대 벽에 등을 부딪친 동백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여포를 보았다. 그 순간에도 리리는 무사한지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꼴을 본 여포의 눈이 돌아갔다. 끓는 분기를 참아 누르지 못한 여포는 그대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포효에 동백과 리리 둘 다 순간 굳어 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여포는 이글이글한 눈으로 동백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이내 이를 악물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키고는 동백의 방을 떠났다. 떠나면서 주먹을 휘둘러 방 문기둥을 완전 박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백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침대에 앉아 여포가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탁 틀어막힌 숨이 간신히 쉬어지는 사람처럼, 동백은 한참을 숨을 고르며 방문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리리가 몸을 일으켜 동백에게 다가왔다. 리리는 여포가 사라진 흔적을 계속해서 눈으로 좇는 동백을 끌어안았다. 동백을 껴안은 리리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몸이 떨리는 것은 동백 또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동백은 여포가 자신을 안을 줄 알았다. 왜냐면 여포는 그런 남자니까. 판은 깔렸고, 그는 여자가 좋아하든 말든 취하는 것에 한 점 거리낌 없는 사내였다.

게다가 동백이 한참 여포를 피한 상태요, 그런 상황에서 동백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직면한 여포는 분노로 눈이 돌아가 있었다. 그는 끓는 제 화를 애써 삭이는 편이 아니었고, 심지어 그 화의 대상이 코앞에 고스란히 대접되어 있었다. 여포가 동백을 취하는 건 당연했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동백은 당혹스러웠다.

왜?

리리의 품에 안긴 채, 동백은 여포를 예측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생각을 파악해 내려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백은 눈물을 뚝뚝 흘려 내면서도, 바스러질 정도로 메마른 정신을 부여잡고 머리를 굴렸다. 살기 위해. 이 치욕을 당했음에도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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