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분위기를 보다 못한 동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 자. 그렇게 윽박질러서야 되겠나. 흥이라는 게 억지로 붙는 것이던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지.”
“술 깔아 놨겠다, 판도 벌여 놨겠다. 더 뭘 해야 하나? 내가 가운데서 춤이라도 출까?”
눈을 부라리는 꼴이 추라고 말하기만 하면 당장 칼춤을 출 모양새였다. 예민한 여포의 반응에 동백이 그를 좋게 좋게 타일렀다.
“그래, 말 잘했네. 자네 좋아하는 음주 가무에서 가무가 빠지지 않았는가. 평소에는 곁에 기생을 끼지 않고선 술자리 기분이 잘 안 난다며 불평하더니 오늘은 웬일인가? 좋은 선율이라도 함께하면 분위기가 살겠지. 자네가 이곳을 잘 안다 하니, 분위기라도 살릴 겸 괜찮은 가기라도 올리라 시키게.”
여포가 동백 저를 꼬드기려고 하는 것과 별개로, 여포는 여자 하나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종마 같은 사내였다. 하물며 지금은 가기를 부르는 것은 술을 마실 때 안주를 곁들이는 일이나 다름없다 여기는 시대였다.
오히려 여포가 제 눈치를 봐서 여자를 곁에 두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동백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이번엔 아마 자기 입으로 군사 모임 운운했으니 가기를 불러 대놓고 놀자 판을 벌이기 머쓱했던 모양이지.’
그러니 동백은 여포가 제 제안에 내심 좋아하며 당장 가기를 불러오게 시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웬걸. 여포는 바락 성을 내었다.
“군과 관련된 일인데 문란하게 무슨 가기란 말인가! 소동백이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참으로 방만하구만!”
여포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장안 모든 여자들이 소동백에게 추파를 던지는데 가기를 들이라니?
제가 소동백을 아우로 여겼을 때는 그쯤이야 내 아우 잘났다며 흔쾌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소동백을 어떻게든 제 짝지로 삼겠다 생각하고 나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여자인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초선인가 뭔가 하는 여자도 소동백이 여자라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목을 매지 않던가.
여포의 과민한 반응에 동백이 얼떨떨해하는 찰나, 구석에 조용히 있던 이가 슬그머니 말을 얹었다.
“따지고 보면 업무 외 시간이니……. 그리 빡빡하게 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쯤이야 동 상국께서 알게 되어도 이해하실 겁니다.”
곽사였다. 그 옆에 있던 친구 이각이 말리려고 했지만 한발 늦어 버리고 말았다. 이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곽사로서는 나름 선의로 끼어든 것이라지만, 시기가 참으로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곽사를 향한 여포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내가 동 상국 눈치 봐서 이러는 줄 알아? 내가 언제 동 상국 눈치 봐서 계집질했나?”
“여포!”
동탁을 거론하는 여포의 오만한 발언에 기겁한 동백이 저도 모르게 여포를 찰싹 때렸다. 그 스스럼없는 손짓에 여포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그렇다 하여 곽사와 이각을 순순히 눈감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곽사, 이각 자네들은 왜 여기에 은근슬쩍 같이 있는 건가? 어? 내가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연막 삼아 데려온 부관들도 방해꾼처럼 느껴지는데, 지금껏 안중에 없어서 몰랐던 쥐새끼 두 마리의 존재에 여포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그……. 동 상국께서 시키신 일이라…….”
곽사가 눈치를 보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곽사라 해도 평소와 달리 자신들이 초대받지 못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위속은 이각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건넸다. 애초에 곽사가 입이라도 다물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눈치 없는 인간을 단속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같은 입장인 만큼 그 고난이 대충 짐작이 갔다.
“동 상국이? 설마?”
여포가 동백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동백은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했다. 여포가 짜증스레 되물었다.
“동 상국에게 그걸 또 말했어?”
“말을 안 하면 어쩌려고. 자네 동 상국 성질을 아직도 모르나? 나중에 알았다가 양아들 둘이 짜고 거병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며 역정이라도 부리시면 곤란하지.”
역정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동탁의 성정을 봤을 때 의심병이 돋아 그들을 삶아 먹으려고 들지도 몰랐다. 좌우지간 동탁이 여포와 동백이 부관들과 함께 회동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알게 되어 좋을 게 없는 만큼, 동백은 바로 동탁에게 고한 뒤였다.
하지만 자진 신고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인지, 그 자리에 데려가라며 딸려 붙인 것이 바로 이각과 곽사였다.
한마디로 오늘 술자리에서 오가는 내용이 동탁의 귀에 들어간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백이야 딱히 거리낄 것이 없으니 응당 좋다 고개를 끄덕였고. 설령 거리낄 것이 있었어도 데려왔을 터였다. 동백은 여포를 설득하듯 타일렀다.
“뭐, 겸사겸사 곽 장군과 이 장군과도 같이 술자리를 가지면 좋지. 예전에도 같이 술자리도 왕왕하지 않았나. 자네도 좋아했었으면서.”
“그때랑 지금이 같나!”
“아니, 같지 않을 게 또 무에 있나.”
“하……. 내 진짜…….”
꿍꿍이를 털어놓을 수 없는 여포는 제 답답한 속내를 속 시원하게 밝히지도 못한 채 끙끙 앓았다. 우기는 건 자신 있으나 설득하는 건 달랐다. 여포는 애꿎은 술만 벌컥 들이켰다.
그러는 와중, 눈치 없는 세 번째 인간이 이제야 진실을 깨닫고는 등 뒤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여 장군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추근덕거리고 싶다던 상대가 소 장군일 줄이야!’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장료는 안색이 시퍼레진 채 소동백을 안쓰러이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제가 건넨 의견에서 비롯되었다는 미안함이 양심을 따끔따끔 찔렀다.
하지만 마냥 속 편하게 미안해할 때가 아니었다. 남아일언중천금. 장료는 이미 술에 취한 척하면 분명 상대가 받아 줄 거라 호언장담을 한 뒤였다.
그런데 소동백이 여포를 받아 주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까닥하다 제가 죽을지도 몰랐다.
‘술에 취해 칭얼거리는 여 장군이라니, 여자도 아니고 남자 중의 남자인 소 장군께서 그런 걸 귀여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장료의 소리 없는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포는 껄껄 웃으며 소동백에게 바짝 붙어 술을 권했다.
“사소한 것들은 됐어. 일단은 자, 마시자고!”
동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술자리도 제가 여포를 전담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야 저 꼬장이 좀 줄어들겠지. 어차피 술에 취하면 다시 늘어날 테지만.
애초에 술에 취할 기분으로 온 자리가 아니라 망정이지……. 동백은 그리 생각하며 여포의 술잔에 술을 기울였다.
“그래. 일단 마시자고.”
* * *
여포의 주량은 대단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빨리 취했다. 동백이 여포를 빨리 뻗게 시켜 치우려고 계속해서 술을 건넨 게 주효했던 모양이었다.
술을 따라 주면 따라 주는 대로 넙죽넙죽 마시니 아무리 장사라 해도 퍼질 수밖에 없었다. 동백은 떡이 되어 탁자에 눌어붙은 여포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다행히 오늘은 술주정이 얌전한 편이었다. 술에 취해 고래고래 제가 여자인 걸 외칠까 동백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물론 여포가 아무리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 하여도 술에 취했다 하여 말의 경중을 모르고 내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비밀이라는 것의 중요성이 그에게 얼마나 무거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여포에게 들킨 이상, 이 불안과 걱정은 한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붙을 터였다.
“여 장군이 많이 취하셨군.”
“오늘 신이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만 먼저 자리를 피해 주겠네. 대금은 내가 계산할 터이니 자네들은 좀 더 놀다 가게.”
“네?”
“왜 그리 놀라는가?”
“그게…….”
여포의 부관들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상대의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을 보니 뭔가 사정이 있는 터였다. 그렇게 의미 없는 손가락질만 계속되던 찰나, 이 안건의 책임자인 장료가 떠밀려 나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저, 소 장군. 실례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그……. 여 장군을 좀 댁에 모셔다드릴 수 있는지…….”
“내가?”
동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물론 소싯적 술에 취한 여포를 옮기는 것은 동백의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야 최후까지 살아남은 것이 여포와 동백 둘뿐이어서 그런 것이고, 오늘은 다른 이들도 많은데 굳이 제가 옮길 필요가 있나 싶었다.
동백의 부관들도 눈을 치켜뜨며 들고 있던 술잔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원래 장군 뒤치다꺼리는 우리 부관들 몫 아닙니까. 소 장군께서 여 장군의 부관도 아니고, 굳이 소 장군께서 여 장군을 부축할 필요가 있으실까요.”
조운의 말이 날카로웠다. 아까까지만 하여도 사람 좋아 보이는 성실한 청년이었던 모습과 다르게 예의와 인성은 사라져 있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조 장군. 설마 저희가 제 일을 하기 싫어 소 장군께 미루는 거겠습니까? 저도 마음만 같아서는 제가 여 장군을 모셔 가고 싶지요……. 하지만 요즘 여 장군께서 얼마나 예민하신지, 남들이 손만 대도 허리를 꺾으려 하십니다.”
하긴, 요즘 여포가 좀 난봉을 부렸던가. 짚이는 게 아주 없지 않았던 동백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백의 부관들은 아니었다. 조운과 왕필, 심지어 말수 없는 악진까지 나서서 말도 안 된다 입을 모았다.
“그러면 소 장군께서 나서면 더 큰일이지요!”
“맞습니다. 내 장문원의 솜씨는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 장수께서도 곤죽이 나실 정도면, 우리 소 장군께서도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어찌 저와 소 장군을 비교하십니까? 저는 여 장군께 걸리면 삼합도 제대로 못 버티고 나동그라집니다. 한참 부족하지요. 하지만 소 장군의 무예는 이 장안에서 여 장군께 필적할 만한 유일한 실력 아니겠습니까?”
장료 또한 기죽지 않고 맞서 의견을 내세웠다. 여포의 부관들 모두 그런 장료의 뒤에서 맞다 맞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