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에게 잡힌 어깨가 저릿저릿했다. 동백은 무언가 말을 잘못한 것이 있는지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짐작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탁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동백과 마주친 동탁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네놈에게서 나는 여자 냄새가 다른 사내들을 꾀어내는데, 그러면서도 너는 사내라 자신할 수 있는가?”
동탁은 끌끌 웃었다. 하지만 눈매에는 분기가 탱천했다. 올라간 입꼬리는 당장에라도 동백을 씹어 삼킬 것처럼 비틀린 채였다.
그 순간 동백은 깨달았다. 아, 여포와의 일을 동탁이 알았구나. 동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동탁의 위협에도 애써 무릎을 꿇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 무색하게, 순간의 막막함과 막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던 동백은 결국 다리가 풀려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동탁은 제 앞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는 동백을 만족스레 내려다보았다. 동백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엷은 머리카락이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가는 목덜미에 도드라진 뼈가 동탁의 구미를 당겼다.
동탁은 동백의 고개를 잡아 들었다. 동백의 턱은 손으로 쥐면 그대로 으스러질 것 같았다. 동백의 눈동자가 동탁을 쏘아보았다. 흔들림 없이 동탁을 직시하는 동백의 눈동자 아래, 콕콕이 박혀 있는 눈물 점이 요망했다. 동탁은 엄지로 동백의 눈물 점을 꾹 눌렀다. 안구 바로 아래에 가해지는 압력이 고통스러운지, 동백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탁은 그대로 동백의 머리를 제게로 잡아당겼다. 동백은 동탁의 몸 위로 엎어지지 않기 위해 동탁의 옥좌에 손을 뻗었지만, 그 꼴이 남들 보기엔 퍽 민망한 꼴이었다.
동백의 얼굴과 동탁의 얼굴이 한 뼘밖에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붙었다. 동백은 동탁의 무성한 수염 밑에 깊게 팬 주름의 수가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턱을 붙잡은 힘도,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제 정체를 들켰을 때, 빠져나갈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의 차로 인한 무력감은 더는 없었다. 동탁은 늙어서 지는 해였고, 동백은 이제 막 떠오르는, 드높이 떠오른 해였다. 그런데도 왜일까, 동백은 동탁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목줄에 매인 채 한평생 살아온 짐승은 목줄을 풀어도 도망치지 못한다고 한다. 길들여진 늑대는 개일 뿐 더는 늑대가 아니었다.
“어차피 네가 여자로 돌아가면, 그 주인이 될 사내는 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 속삭인 동탁은 동백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여자인 동백을 취할 이는 동탁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되어야만 했다. 동백에게 초선을 넘기는 것과, 여포에게 동백을 넘기는 것은 그 경중이 다른 문제였다.
소동백이 여자가 된다 하더라도 저 날카롭고도 간교한 머리가 어디 도망가는 것은 아니리라. 계집이 사내와 붙어먹으면 자연스레 저를 품은 사내를 마음에 담게 되는 법이었다. 동백이 지금은 순순히 동탁의 밑에서 지혜를 빌려주고는 있지만,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으면 그 사내를 이 동탁의 자리에 올리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특히 그 사내가 여포라면…….
그것만큼은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요, 이 동탁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보아 넘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동백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서고, 동탁은 옥좌에 등을 늘어지게 기댄 채 짝짝, 손뼉을 쳤다.
“지금껏 사내로서 수고했다, 소동백.”
동탁은 동백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통보뿐인 판결에 동백은 핏물 빠진 시퍼런 색을 하고 멀거니 동탁을 바라보았다. 퀭한 동백의 모습을 보며, 동탁은 흡족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입가에 매달린 웃음은 제 것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폭군의 탐욕, 그 자체였다.
“이제, 내 여자가 되어 차기 황제를 낳아라.”
노망이라도 난 거냐 묻고 싶었지만, 동백의 입술은 딱 들러붙은 채 떨어지지가 않았다. 동백은 동탁을 쏘아보았지만, 동탁은 고양이가 쥐를 보는 시선으로 동백을 조롱했다. 네놈이 다른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느냐는 것이 여실 없이 느껴졌다.
동백은 휙 돌아서 도망치듯 미오성을 빠져나갔다. 발걸음이 후들거렸다. 동탁은 동백을 잡지 않았다. 고민할 시간 정도는 주겠다는 듯, 그답지 않게 자비를 보였다.
동탁이 동백을 가소로이 여기며, 어차피 제게로 돌아올 거로 생각하는 것을 동백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동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했다. 분하고 분하고 분했다.
나는 소동백이다. 이 세계에 떨어진 십여 년 전의 그날, 나는 여자이기는 하나 사내로 살 것을 다짐했고, 많은 것을 포기하며 내 아성(牙城)을 이룩했다.
여포에게조차 여자로서의 몸은 내어 줄지언정 사내로서의 이름은 내어 주지 않겠다 맹세했다. 고작 동탁의 여자가 되고자 그리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목줄에 매인 개처럼 살 수는 없었다. 개도 목숨 줄이 간당할 정도로 몰리면 주인을 문다. 동백의 눈이 불길로 확 치솟았다.
절대 동탁이 원하는 대로는 하지 않을 것이리라.
이 정권을 전복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동백의 얼굴에 음울한 그림자가 졌다. 이 손에서 피비린내가 빠지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을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쌓아 길을 내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소동백은 그리 홀로 중얼거렸다.
* * *
여포 또한 소동백에게 추근거리기는 했으나, 동시에 그는 항상 동백을 저와 맞붙을 수 있는 유일한 사내라는 듯 추켜세웠다. 그랬기에 다들 여포가 소동백을 과하게 마음에 들어 한다고만 여겼을 뿐, 여포가 소동백을 계간질 상대로 여긴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과거의 동탁 또한 그러했다. 동탁이 아무리 소동백의 외견을 칭찬하고 동백을 특별 대우해도, 그가 동백을 아끼는 양아들 취급을 하는 한 아무도 그 사이를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동탁은 소동백을 자신의 여자로 삼겠다 선언한 이후로 더욱더 노골적으로 굴었다. 계속해서 금붙이며 패물 등을 동백에게 가져다 안기는데, 마치 구애라도 하는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으며, 되레 남들 보라는 듯이 조정 신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동백에게 선물을 하사했다. 그 선물이 전부 여인들이나 좋아할 만한 것이라,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 동탁의 기행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돌았다.
처음에는 동탁이 동백의 처인 초선에게 신경을 써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동백에게 넘기고 보니 아까운 아이라 후회가 남아 그러는 것이라는 요지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초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거니와, 이상할 정도로 동백에게 끈적대는 태도에 그들은 동탁의 내심을 곧 눈치채었다.
동탁이 수많은 여인을 첩으로 삼고 미오성에서 주지육림을 펼치더니 이제는 계간질까지 하려 한다며, 조정 신료들 모두가 미오성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물론, 동탁의 앞에서 직접 그런 말을 언급할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소동백의 부하들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직속상관에 대한 분연한 소문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른 소대의 이들이 소동백을 모욕하며 동백군에게도 손가락질을 했다. 진즉부터 동탁과 붙어먹은 것이 아니냐며, 동백이 몸을 팔아 저 지위에 오른 게 분명하다 소동백을 깎아내렸다. 완전무결, 흠 하나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 처리를 완벽하게 해 온 소동백에게 유일하게 붙일 수 있는 추문이었던 만큼, 평소 소동백을 아니꼽게 보던 이들은 더더욱 입을 놀렸다.
동백군은 우리 소 장군님이 계간질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들도 눈에 보이는 동탁의 태도를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동백군의 말단에서도 동백과 동탁의 관계에 대한 말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소문이 진짜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부하들의 태도가 하나둘 주변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조운과 악진, 진진, 왕필 모두가 밑에서 떠도는 소문을 죽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최근 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진 것 같군.”
“…….”
백부장과 측근들을 불러낸 동백이 나직이 말했다. 측근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동백의 질타 아닌 질타를 달게 받았다.
동백은 이런 소문이 익숙했다. 선황제 시절 물리도록 들었던 것이요, 처음 동탁의 밑으로 들어갔을 때도 그러했다. 그때는 전부 뜬소문이기에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동백은 창밖으로 보이는 연무장을 흘끔 보며, 백부장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운을 떼었다.
“동 상국과의 소문이 아주 자자한 모양인데.”
“소문을 잡지 못한 죄, 용서해 주십시오!”
백부장으로 있는 조운과 악진, 왕필이 무릎을 꿇었다. 군을 직접 이끄는 만큼, 수하들의 입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진과 가후도 뒤질세라 몸을 숙였다. 동백은 그들에게 호된 호령을 내리는 대신,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동 상국이 작정하고 저리 나오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쪽이 이상하지.”
그리 말하는 동백에게 창밖의 햇살이 드리웠다. 엷은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은 모습은 인계에 내려온 선인 같았다. 동백의 인외적인 외모가 동탁과의 악소문에 박차를 가했다. 동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부복한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불상과도 같이 미려한 얼굴선에 그들은 몸을 떨었다.
“동 상국의 눈엔 내가 여자처럼 보이는 모양이야.”
동백의 손가락 끝이 창의 난간을 톡톡 두드렸다. 새가 모이를 쪼는 듯한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무겁기 그지없어 쉬이 걷히지 않았다.
측근들의 얼굴에도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가득하였다. 확실히 동백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을 만큼 무신경한 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