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254)화 (254/522)

동백군이 전부 미오성에 도착할 때쯤 되니, 미오성의 입구는 얼추 정리가 다 된 뒤였다. 여포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반각, 들이닥치고 나서 반각. 고작 일각 동안 단 세 사람으로 처리해 둔 결과에 동백군 또한 침을 꿀꺽 삼켰다.

동백은 대열을 정렬시키고 각 백부장들에게 말했다.

“왕필, 너는 가후와 함께 내궁으로 들어서서 동탁의 가족을 죽여라. 그 뒤 장안성으로 돌아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도록 해라. 가후, 장안에서의 지휘는 너에게 맡기겠다.”

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필은 동백의 명을 받잡고 바로 움직였다. 왕필을 필두로 한 휘하 부하들이 병장기를 들고 미오성의 내궁으로 향했다.

“악진은 우측 궁을, 조운은 좌측궁을 맡아라.”

“네!”

악진과 조운 또한 자신들의 군을 이끌고 좌우로 갈라졌다. 이제 한 무리의 군대만이 남았다.

“여포, 자네는.”

동백의 시선이 여포에게로 향했다. 여포군의 고순과 장료 등이 군을 이끌고 여포의 뒤에 서 있었다. 동백은 갑주 차림을 한 여포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주먹을 탁, 부딪치며 말했다.

“마음껏 날뛰게. 족할 정도로.”

씩 웃으며 여포를 보는 모습이 퍽 시원시원하다. 동백을 담담히 내려다보던 여포는, 정작 이 군란의 목적인 동탁을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동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고 물었다.

“동탁은?”

“내가 처리한다.”

동백의 엷은 눈동자가 결연히 빛났다. 동탁은 그 누구도 아닌 동백, 스스로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다. 동백은 동탁과 엮인 고리를 제 손으로 끊어 내야지만 자신이 완전한 자유가 될 수 있다 믿었다.

“악진과 조운, 그리고 자네가 미오성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동안 나는 동탁의 침실로 향할 것이다. 그리 가는 비밀 통로가 있어.”

“비밀 통로? 동탁의 호위를 맡으면서 그런 건 본 적도 없는데.”

여포가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본래 왕윤을 주살한 죄로 집에 칩거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탁의 호위를 맡고 있던 것은 여포였다. 동탁의 눈을 피해 다른 여자들과 붙어먹는다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도 퍽 자주 싸돌아다녔는데, 비밀 통로의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비밀 통로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동백이 그걸 어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이 미오성을 축성한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여포는 말을 잊었다. 그래. 소동백이가 숨겨 둔 비밀 통로라면 여포가 쉬이 눈치챌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마 동탁 또한 모를 것이다.

어쩌면, 동백은 미오성 축성 당시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포의 머리를 스쳤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아니. 하지만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동백은 웃었다. 동탁의 침실로 향하는 비밀 통로 말고도 수많은 비밀 통로들이 있다. 그 존재를 숨기기 위해 건축가들을 여럿 배치한 뒤, 각자 자신의 구역밖에 알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했다.

여포는 동탁에게 향하기 앞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백을 바라보았다. 갑주 위에 입은 터라 모양새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탁에게 보여 주기 아까운 꼴이었다.

하지만 동백이 굳이 여장을 한 까닭이 조금이나마 동탁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서인 만큼, 여포는 그런 동백을 저지하지 못했다. 여포는 방천화극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동백의 이마를 툭, 건들며 물었다.

“동탁과 대치해서 이길 수 있겠어?”

“동탁만이라면.”

동백은 미간을 찌푸리고 여포의 손이 닿은 이마를 괜히 문질렀다. 여포는 그런 동백의 반응에 낄낄 웃었다. 동백도 피식 웃었다.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고 있던 중압감이 여포의 장난에 씻기듯 사라졌다.

“그러니 여포, 자네가 이곳에서 잔뜩 날뛰어 주어야 하네. 자네가 동탁의 호위를 얼마나 끌어내느냐가 관점이니까.”

“호위 놈들을 다 죽이면?”

“그러면 내 엄호나 하러 오든가.”

동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동탁은 제 몫이라는 것이 말끝에서 묻어났다. 동백이 직접 제 손으로 동탁의 목숨을 거두는 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포는, 불퉁스레 대꾸했다.

“늦장부리면 내가 동탁을 죽이는 수가 있어.”

“하하. 기대해 보겠네.”

동백은 그리 웃으며 발을 돌렸다. 한 발짝씩 내딛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홀로 동탁을 죽이러 가는 이답지 않았다.

지금껏 미오성에 드리웠던 어둠이 떠오르는 동녘에 서서히 자리를 내어 주며 밀려 나갔다. 불그스름한 아침의 햇볕에 동백의 엷은 회색 머리칼이 반짝이듯 빛났다.

“소동백! 간교한 놈! 은혜도 모르는 놈! 네가 감히 동 상국을 치려 하느냐!”

그때, 사라지려는 동백의 뒤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동백은 뒤를 돌아보았다. 동탁의 사위로, 동백에게 질투를 품었던 우보였다. 우보는 처참한 편전 앞의 꼴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가도, 화극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내 네 배를 갈라 까뒤집어 동 상국께 네놈의 그 더러운 심보를 알려 드릴 터이니, 순순히 이리 오너라!”

우보는 길길이 날뛰었다. 갑작스러운 우보의 등장에 동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명 동백이 알기로 오늘 새벽 동탁군을 맡은 자는 우보가 아니었었다.

하지만 되레 우보여서 다행이었다. 우보는 절대 동백이 회유할 수 없는 자였고, 이번 군란이 성공한다면 상당히 거추장스럽고 귀찮게 굴게 자명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처리해 버리는 것이 깔끔하니 좋다. 그리 생각한 동백은 흘끗, 우보에게 시선만을 주고 뒤돌아서 제 갈 길을 갔다.

우보는 그런 동백의 모습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바락 외쳤다.

“도망치는 거냐!”

“아니, 네 상대는 나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받은 상대는 소동백이 아닌 여포였다. 여포는 무거운 방천화극을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다루며 제 목을 툭툭 건드렸다. 방금만 하더라도 소동백에 대한 증오와 혐오에 차 있던 우보는 그제야 제 앞에 펼쳐진 것이 지옥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포는 제 수하들에게 휙휙 손을 내저었다. 여기는 저에게 맡기고 각자 움직이란 뜻이었다. 장료와 고순, 그리고 위씨 형제가 자리를 뜨고, 여포는 한 발짝, 한 발짝 우보에게 다가섰다.

우보는 여포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편전에서 동탁에게 맞설 때만 하더라도 혹시나 하였는데, 정말 여포도 소동백에게 붙은 모양이었다. 고작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에게! 괜한 배신감이 들었던 우보는 여포를 힐난했다.

“그 남창이 무슨 말을 속살거렸기에 여 공, 그대도 넘어간 것이오!”

우보의 말에도 여포는 귀를 후비적대었다.

‘남들이 들으면 내가 애초부터 동탁과 죽고 못 사는 사이였던 것처럼 들리겠구만.’

여포는 코웃음을 쳤다. 동백과 여포 사이의 비밀을 제하더라도, 애초에 정원의 밑에 있던 여포를 회유하러 온 것도 동백이요, 여포와 전쟁이며 뭐며 동고동락해 온 이도 동백이었다. 동탁의 편을 들어 주어야 할 만한 이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여포의 그런 생각을 알지 못하는 우보는 여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비난 어린 말을 내뱉었다.

“양아들 둘이 붙어먹고 아비를 친다니, 이 무슨 참담하고도 부끄러운 꼴이란 말이오! 여 공, 그대의 꼴을 돌아보시오!”

“아니, 그러니까.”

하지만 악수일 뿐이었다. 여포는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목을 툭툭 두드리던 방천화극을 휙휙 허공에서 휘저었다.

방천화극이 허공을 가르며 공기 베는 소리가 붕붕 위협스레 들렸다. 당장에라도 화극의 날 끝이 목을 스치고 지나갈 것 같은 섬뜩한 기분에 우보는 목을 움츠러트렸다. 여포의 입 끝이 올라가며 허연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치면 아들이랑 붙어먹으려 드는 거나 아들들끼리 붙어먹은 거나, 무슨 차이가 그렇게 큰지 원.”

여포의 말에 우보의 얼굴이 벌게졌다. 동탁이 최근 들어 소동백이에게 해 온 짓거리에 대해 우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이유를 동백에게로 돌렸었다. 소동백이가 꾀어서. 소동백이가 간사하게 속살거려서. 우보는 동탁이 잠시 소동백에게 홀려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지만, 곧 과거의 패기를 되찾고 소동백 같은 기생오라비는 단칼에 내칠 것이라 그리 믿었다.

그런 우보의 심정을 비웃듯, 여포가 히죽였다.

“우보 자네나 장인 어르신 똥구멍 열심히 핥아 대다 그대로 뒈지도록 하게. 나는 우리 소동백이 그리 만들 생각 없으니까.”

그와 동시에 화극 끝이 번개가 내리치듯, 폭풍이 몰아치듯 둘 사이의 공간을 일순에 허물었다. 여포는 그대로 우보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 우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겠구만.”

여포가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우보의 우뚝 선 몸에서 목이 비틀, 비껴져 내렸다. 그대로 우보의 머리통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여포는 저를 향해 굴러온 우보의 머리통 위 그대로 발을 내리찍었다. 쩌억. 수박 갈라지는 듯 두개골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우보의 머리였던 것은 형체를 잃었다.

방금까지만 하여도 사람이었던 것을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여포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붕붕, 허공에 돌리며 외쳤다.

“자, 자. 소동백이 명대로 한바탕 난리 치고 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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