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279)화 (279/522)

“좋아.”

동백은 손뼉을 짝 쳤다. 사람을 솎아 내기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면 소문을 퍼트리는 것은 내 이 중랑장에게 맡기지. 내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못하니, 빨리 결과물을 가져와야 할 것이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각이 우렁차게 답했다. 대충 정할 것은 다 정했으니 더 이상 논할 것이 없었다. 동백은 회의를 파했다.

“그러면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이야기하세. 다들 일하러 가도록.”

동백의 축객령에 장수들은 제각기 부대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회의 내내 히죽거리며 동백의 얼굴만 감상하던 여포는 다들 자리를 뜨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백에게 들러붙으러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가후와 마저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가서 일 보게.”

동백의 거절에 치켜 올라간 여포의 눈이 흉흉히 빛났으나, 동백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손을 내저어 귀찮은 고양이 내쫓듯 여포를 쫓아냈다.

“쳇!”

쫓겨난 여포가 성질을 내며 복도 옆에 가지런히 놓인 화병에 발길질을 하는 사이, 앞서 복도를 걸어 나가는 이각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친우인 곽사가 그의 옆을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오늘따라 적극적이던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원래 소동백과 친분을 갖고자 했던 것은 그를 무인으로 존경했던 곽사였고, 이각은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그런 친우를 도와줄 뿐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소동백이 명백히 권력의 핵심이 된 만큼, 이각은 적극적으로 소동백의 눈에 띄려 애썼다.

“소 태위님 눈에 잘 들어야 우리 미래도 탄탄대로일 게 아닌가. 적극적이어야지.”

“하지만 동 상국 시절에도 이렇게 적극적이진 않았지 않나.”

“그때야 동탁 주변에 양주 사람은 깔려 있었잖나. 게다가 동탁은 친인척도 많았으니 아무리 잘해 봐야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었지. 반면 소 태위는? 일가친척이라고는 없어, 부인으로 들인 이도 왕윤이 죽으면서 천애 고아가 됐지. 그러니 외척도 없고.”

처음에는 출신을 들어 자신들을 쳐 낼까 전전긍긍했는데, 눈치를 보는 사이 소동백의 주변을 알아보니 소동백이라는 인간 자체가 부평초가 따로 없었다. 이각은 곽사의 눈앞에 검지를 세워 들이밀며 말했다.

“한마디로 파고들 여지가 많다, 이 말이야.”

“하지만…….”

곽사는 넓은 어깨를 움츠러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동백과 지금껏 오래 함께해 온 다른 장군들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이각은 그런 곽사의 소심한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오게. 내 언제 자네 골탕 먹인 적 있었나?”

이각은 의기양양했다. 오늘 회의로 깨달은 것인데, 소동백 밑에 있던 장수들 중 계략에 능한 이가 생각보다 없었다. 가후야 모사(謀士)이니 예외였고.

지금까지는 소동백 본인이 대부분의 계략을 펼치기 때문에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동백이 태위가 되며 해야 할 일이 늘었고, 더 이상 그 혼자 그 모든 일을 처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양주의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그를 대신하여 움직일 이가 필요했다.

‘동탁이 소동백을 써서 정권을 안정시켰듯이, 소동백 또한 적당히 머리가 돌아가면서 군을 잘 다루는 수족이 필요할 거야. 생각해 보면 가후도 소동백의 밑으로 들어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이번 일만 잘 해내면 나 또한 소동백의 측근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한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곽사와 함께 제 부대로 향하는 이각의 눈이 권력욕으로 번뜩였다.

* * *

이각은 스스로 잘난 듯 의기양양했으나, 그런 이각의 꿍꿍이를 한평생 주변의 기색을 살피며 살아온 동백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동백은 모르는 척했다. 애초에 이각이 저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출세든 뭐든 목적이 있어 열심히 한다면 동백에게 또한 좋은 일이니, 굳이 그 의욕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동백에게 가후가 염려스레 물었다.

“이각을 믿으십니까?”

이각을 소동백군에 융합하도록 넌지시 제안한 것은 가후였으나, 가후 본인 또한 이각이라는 자를 신뢰하지 못했다.

“믿지 않을 이유도 없지. 동탁은 나를 완전히 믿어 정권을 꾸리는 일을 전적으로 맡겼겠는가?”

동백이 여상히 되묻자 가후의 입이 다물렸다. 동백은 가후를 다독이며 설득했다.

“원래 사람마다 쓰임새가 있는 법이야. 양주 사람은 그가 꽉 쥐고 있다 하니 한번 맡겨 보자고.”

“그 양주 사람을 몰고 마등이나 한수에게 가서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봐야 마등과 한수 밑이 될 뿐이지.”

동백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이각과 곽사가 이 기회를 틈타 마등과 한수의 밑으로 간다면 애초에 그들과 신의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뜻이요, 그런 불안 요소를 일찍 품에서 떨쳐 낼 수 있는 것이니 동백으로서는 그 또한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랫사람으로 있을 거라면 태위의 밑에 있겠나, 아니면 태수나 자사의 밑에 있겠나?”

“물론 생각이 있는 자라면 소 태위님이 태수고 마등이 태위더라도 응당 소 태위님을 따라야지요.”

“가후 자네, 그리 안 봤는데 아첨하는 실력이 꽤 좋군.”

동백이 웃으며 낸 듣기 좋은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가후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멍하니 동백을 보았다가 황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가히 황제가 2대에 걸쳐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며, 폭군 동탁마저도 좌지우지하던 미인답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사람을 홀렸다. 남색 따위는 혐오하던 가후마저도 일순 정신을 잃을 정도니, 동탁이 저 세기의 예술품과도 같은 사내를 쥐기 위해 자신에게 온갖 추문이 붙는 것도 아랑곳 않은 것도 이해가 갔다.

‘저 속에 든 것이 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혀를 차며 고개 숙인 가후는 그 밑으로 제 속내를 숨겼다. 다행히도 제 불충한 생각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동백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출세욕이 있으니 동탁 주살 이후에도 장안에 남아 내 눈에 띄려 그리 기웃거린 것이 아니었겠는가. 나는 이각의 충심을 믿진 않지만 그의 욕심은 믿네. 잘 해내겠지.”

동백은 이각의 일을 그리 가벼이 넘긴 채 지도를 살펴보았다.

“……양주 다음은 익주, 익주 다음은 형주겠군.”

형주는 익주의 동쪽에 붙어 있었다. 장강 중류를 끼고 있는 형주 또한 전략적으로 놓칠 수 없는 요충지였다. 만약 원소나 조조 혹은 유비가 하북 지역을 평정한다면 그 침략을 막기 위한 군사적 거점이요, 반대로 남방에서 위쪽 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최전선이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잠잠하나, 동백이 한번 군을 거병하면 그 뒤로는 쉴 새 없이 전쟁으로 휘몰아칠 것이다. 이제는 평화로운 삶이 어색할 지경이다.

“형주 자사인 유표가 유언의 방만한 행실을 황실에 고했다고는 하나, 그렇다 하여 익주가 태위님 손에 호락호락 떨어지도록 둘 이는 아닙니다. 그쪽도 미리 방비하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가후의 우려에 고개를 끄덕인 동백은 매끈한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띠며 가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형주 자사께서도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익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시겠지.”

본디라면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는 사이 원술이 원소를 치고, 원소는 원술을 견제하기 위해 유표를 불러오는 한편 원술 또한 손견으로 유표를 방비하느라 정세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손견과 원술이 그리 가깝지 않으니 원술 또한 제멋대로 날뛰지 못한 채 남양에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뜨뜻미지근하니 자리만 데우고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동백은 그가 깔고 앉은 지푸라기에 불을 붙일 생각이었다.

“말씀인즉슨…….”

“강동의 손견에게 서신을 써 둬야겠군.”

동백은 지도에 그려진 형주의 동쪽, 강동을 바라보았다. 서량에서부터 강동까지를 이어 보니 마치 잔월처럼 보였다. 쇠퇴해 가는 한을 상징하는 듯도 한 모습에 동백의 입술에 그믐달 같은 미소가 걸쳐졌다.

그믐달이 지고 초승달이 떠오르며 그것이 만월이 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이 그믐달 모양의 영지는 곧 동백의 손에서 차오를 것이다.

그때는 한(漢)의 이름이 아니겠지만.

동백은 엷은 눈동자로 지도를 응시하며 읊조렸다.

“슬슬 장사에 주둔시켜 둔 군대를 데려와야겠어.”

* * *

하북 지역에서 앞다투어 이권 분쟁을 빚던 군웅들은 장안에서 동백이 슬금슬금 세상을 잠식할 간계를 꾸미고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장안으로 거병하여 홍농왕을 데려온 조조라 하여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홍농왕을 어떻게든 제 손에 틀어쥐기 위해 집중하느라 장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천자께서 우리가 아닌 소동백을 택하셨다니…….”

전쟁이 끝나고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각자의 거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관중까지는 길이 겹치는 만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내내 유우는 길게 탄식했다.

“폐하께서 우리를 따라오시지 않은 것은 약삭빠른 소동백이 먼저 손을 썼기 때문이지, 유 공을 버렸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조의 속내는 달랐다. 소동백이 얼마나 사람을 잘 꾀는지 알고 있지 않던가. 천자는 제 의지로 소동백을 택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에 대한 유우의 충심은 조조에게 도움이 되는 만큼, 조조는 그런 유우를 잘 구슬렸다. 다행히도 그런 입 발린 말은 유우에게 꽤나 잘 먹혔다. 유우의 얼굴에서 시름이 한풀 가셨다.

“역시 그러하시겠지? 모셔 온 홍농왕 전하만이라도 잘 보필해야겠네그려.”

“다만 홍농왕 전하는 제가 모시는 것이 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유 자사.”

“아니, 어째서? 전하께서도 친척인 내가 모시는 것이 마음 편하시지 않겠는가?”

“하나 유주는 현재 공손찬이 날뛸뿐더러 북쪽으로는 국경 지대 아니옵니까. 전하를 편히 모시기엔 정황이 어지러울 것입니다.”

“그도 그러하다만…….”

“유 자사께서 공손찬을 억누르고 유주가 평탄해지면, 그때 전하를 모셔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그때까지만 전하를 잘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리가 있군. 그러면 그리하도록 하세.”

고민하던 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유주에서 날뛰는 공손찬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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