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은 짧았다. 찰나의 일탈과도 같은 혼란에서 금세 빠져나와 얼굴을 가다듬은 악진은 근엄히 덧붙였다.
“소 태위님께서는 상대에게 기대하는 선이 분명하신 편이지.”
정에 있어서는 무척 좁고, 인성에 관해서는 무척 널널하며, 능력에 관해서는 기가 막히게도 딱 본인이 낼 수 있는 선을 기대했다.
곁에 두고 마음을 의지할 상대는 무척 까다롭게 고르니 함부로 동백의 총애를 사고자 날뛰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제일 오래된 부하인 조운과 악진에게도 쉬이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감정이 막 요동치기 시작하던 당시, 혹은 전부 홀로 삭인 다음의 찌꺼기 정도가 그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여포 정도로 뻔뻔해야 강제로 그 문을 비집고 열어 들어가기라도 하지, 평범한 사람의 신경으로는 불가능했다. 오로지 동백 혼자 걸러 낸, 여과된 감정만을 보며 그가 얼마나 고뇌했을지 짐작하는 것밖에는.
선량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다 하여 인성 쓰레기 같은 놈들을 무조건 싫어하시는 건 아니었다. 최저치만 채워 주면 부하의 인성이 어떻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제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은 중요했다. 소동백은 능력이 뛰어난 이를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제 능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였다. 선량한 호의든, 악랄한 욕망이든. 인성이 어떻든 간에 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상을 품은 이를 볼 때마다 불쾌해하는 걸 생각하면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소동백에게는 수많은 선이 있다. 통일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제각각이기에 악진처럼 함께한 지 오래된 이들도 선뜻 소동백의 선을 다 파악하고 있다 주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러웠다.
악진은 감녕에게 충고했다.
“그게 바로 귀관이 앞으로 소동백군으로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네?”
“태위님의 선을 가늠하는 일 말이네.”
물론 선의는 거기까지뿐이었다. 악진이 감녕에게 충고를 건넨 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식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어 동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우려해서였다. 악진은 제가 알아낸 소동백의 선에 대해 저 양 거죽을 뒤집어쓴 늑대 새끼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감녕의 모습을 흘겨보고는, 악진은 마저 남은 일을 하기 위해 뒤돌아서 자리를 벗어났다.
* * *
회의에서 유표가 가만있을지 모르겠다는 오의의 우려대로, 소동백군이 익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유표는 퍼드득 몸을 떨며 길길이 날뛰었다.
“소동백이 군을 끌고 익주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량에서 마등과 한수가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다지 않았느냐! 그럼 소동백이 그 짧은 사이에 그들을 패배시키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것이, 그러니까…….”
소식을 전해 온 수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땀을 뻘뻘 흘렸다. 유표의 다른 수하가 냉큼 유표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덧붙였다.
“마등과 한수는 척박한 서량에서도 으뜸을 논하는 장수들이옵니다. 아무리 소동백군에 날고 기는 장수가 많다고는 하나, 그들이 그리 쉽게 패배할 리 없습니다. 애초에 서량 정벌은 눈속임이었고, 진짜 목적은 파촉 복속인 게 분명합니다.”
그 또한 일리가 있다. 유표와 그 밑의 가신들은 동백이 마등과 한수를 단번에 제압했으리라는 가능성은 도리질 쳐 흩어 냈다.
“그러면……. 유언에게 합류하여 소동백을 견제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유언과 소동백이 싸우는 걸 기다릴까요?”
수하의 질문에 유표는 움푹 팬 뺨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턱수염을 손등으로 살살 쓸며 고민에 잠겼다. 유표가 물었다.
“누가 군을 이끌고 있다 하던가?”
“소동백이 3만의 군사를 끌고 직접 출전했다 합니다. 그리고 여포 또한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
둘 다 착각하기 힘든 외견이다 보니 소동백과 여포가 왔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소동백과 여포가 장안을 비웠다니, 장안을 노리는 건 어떨까요?”
“그 뱀 같은 놈이 아무런 대책도 세워 두지 않고 장안을 비웠을 리 없지.”
유표는 혀를 찼다. 그렇게까지 위험 부담을 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3만 정도라면 적진 않지만 유언과 유표가 손을 합치면 대처 가능한 수였다. 유언 또한 그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소동백군이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와중에도 유언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되니 초조해지는 것은 유표였다. 유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익주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숟가락을 얹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훗날 유표의 목을 죌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유언 그놈은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왜 아무런 도움 요청도 않는 것이야.”
유표가 투덜거리기가 무섭게 익주에서 소식이 날아왔다. 유언의 사망 소식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졸도하다니, 그리 소심한 놈이 잘도 파촉 땅에서 황제라도 된 것처럼 떵떵거렸구나!”
제 자식들이 하나 빼고 전부 죽어 나간 데다 주도가 화재로 불타기까지 했으니 유언의 삶의 의지가 전부 사그라든 것도 당연하였다. 그러나 당장 소동백이 손도 안 대고 코 풀듯 아무런 피해 없이 익주를 홀랑 먹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유표는 길길이 날뛰었다.
“진즉 유언과 손을 잡아 소동백에 맞섰어야 했어. 괜히 주도권을 쥐겠다며 어영부영하는 바람에 시간도 기회도 날렸구나!”
“애초에 유언은 천하를 논할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황가의 피를 타고났다 하여 다 같은 혈통이 아닙니다. 고귀한 자리에는 어울리는 분이 따로 있는 법이죠.”
유표 휘하의 장수이자 형주를 꽉 잡고 있는 호족, 채모(蔡瑁)가 유언을 달랬다. 유표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타는 목이 젖으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유표는 내심 익주 또한 제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 만큼 주인 없이 빈 산이 된 익주를 소동백이 삼키는 꼴을 호락호락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유표는 정치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군사적 재능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가 여기서 출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채모가 유표에게 넌지시 일렀다.
“어쩌면 이게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동백은 손을 더럽히지도 않고 익주를 얻었으니 분명 의기양양할 것입니다. 회군할 때 틀림없이 방심할 테니, 그때를 노려 그들을 치고 소동백의 목을 베면 다른 것들도 넝쿨째 굴러들어 오지 않겠습니까?”
“흠…….”
우유부단한 유표가 갈등하고 있자, 채모가 그를 설득하듯 덧붙였다.
“서량 쪽으로 서신을 보내 넌지시 내심을 떠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왜 마등과 한수가 소동백의 장단에 맞춰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량 사람들은 자존심이 높을뿐더러 쉬이 얽매이지 않는 야생마 같은 이들이니 아마 일시적 동맹일 겁니다.”
아무리 소동백이 날고 기어도 익주를 끼고 있는 서량과 형주가 손을 잡고 동시에 공격을 하면 대처하기 어려울 것이다.
좋다. 그제야 결단을 내린 유표는 서량으로 서신을 보낼 준비를 하는 한편 군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유표의 뒤통수를 치듯 생각지도 못한 비보가 전해져 왔다. 형주 자사인 유표의 밑에 있는 남양 태수 원술이 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다. 내용도 어처구니가 없었을뿐더러 마치 노리기라도 한 듯한 시기에 유표가 버럭 외쳤다.
“아니, 원술이 무슨 배짱으로 쳐들어왔단 말이냐?”
“손견! 강동의 손견과 손을 잡았습니다!”
“뭣이!”
손견이라는 말에 유표의 눈에 불이 붙었다. 손견과는 이미 옥새를 두고 적대한 적이 있었다. 원술도 예전에 군량을 꿔 달라는 걸 거절한 이후로 저에게 으르렁대는 걸 생각하면 둘이 손을 잡은 게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껏 잠잠하다 왜 하필 이제서야? 마치 자신이 익주로 출군하려는 걸 저지하는 것처럼…….
“소동백!”
순간 머리에 뇌리처럼 떠오른 존재에 유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동백이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유표는 이 판의 뒤에 그가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표도 서량과 손을 잡아 방심한 소동백을 치려 했다. 소동백 또한 저와 같은 수를 쓴 게 분명했다. 다만 더 교묘하고, 시의적절했을 뿐. 소동백의 수는 그대로 유표의 발을 묶었다.
“소동백……! 이 뱀 같은 놈!”
어떻게 원술과 손견을 움직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저들을 이 형주 땅에서 몰아내야 했다. 유언처럼 얼간이같이 형주를 내어 줄 순 없었다. 이를 악문 유표의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 * *
“오랜만입니다, 원 태수!”
남양 태수로 있던 원술은 난데없이 찾아온 손견의 모습에 얼떨떨했다. 원술과 손견의 사이는 그리 살갑지 못했다. 물론 원술은 손견을 퍽 좋아하는 축이었다. 원술 자신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원소나 눈엣가시 같은 유표 둘 다와 척을 졌으니까. 그래서 손견의 옆구리를 찔러 차도살인(借刀殺人)을 꾀하려 했으나, 기가 막히게도 그 순간 소동백이 군을 이끌고 끼어드는 바람에 손가락만 빨게 되어 버렸다.
그 뒤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손견이 거리를 두니 원술로서도 어찌할 바가 없던 찰나, 이렇게 손견이 직접 찾아오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손견이 꺼낸 제안 또한 그러했다.
“유표를 치자, 이 말이오?”
“원 태수와 저, 둘의 힘을 합하면 유표 정도야 너끈히 상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형주 자사 밑에 계실 것입니까? 제가 아는 원공로(公路)는 능히 자사 정도는 부릴 수 있는 그릇이었을 텐데요.”
손견이 원술을 치켜세웠다. 원술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듯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되레 그래서 원술은 손견의 저의를 의심했다. 저자가 저렇게까지 아첨에 능한 자가 아닐 텐데. 애초에 그런 인간이었으면 원소와의 사이가 틀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 잘난 줄만 알고 뻣뻣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던 이가 갑자기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것이 수상쩍었다. 혹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원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레 물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었소? 내가 옛적 유표를 치자 하였을 때는 거절하지 않으셨소?”
“그때는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손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답지 않게 약한 기색을 띠며 엄살을 부렸다.
“당시 유표와 원소와 제가 척을 진 것은 그들이 나에게 없는 옥새를 내놓으라 어깃장을 부렸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그 소식을 들은 소동백이 저에게 옥새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장사까지 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옥새를 내놓으라 겁박하고 군으로 위협하더군요. 제가 아무리 없다 하여도 믿지 못하고 기어코 제 둘째 아들을 인질로 데려갔습니다.”
손견은 소동백과 손을 잡은 게 아니라, 소동백이 저를 감시하였으며 자신은 그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는 사정을 피력했다.
손견의 커다란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며 눈에 붉은 기가 서렸다. 손견은 연기에 썩 재능이 없는 편이었지만, 당시 저를 사냥개처럼 이용해 유표와 원소를 처리하려 했던 원술의 모습을 코앞에 두니 열이 절로 뻗쳤다. 덕분에 꽤나 실감 나는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원술이 쉽게 미끼를 물지 않으리라는 것은 염두에 두었던 일이다. 소동백과 손견의 관계가 언뜻 보기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변명거리는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손견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미리 준비했던 말을 읊었다. 정확히는 이리 읊으라 전해 받은 말이었다.
“제 아들을 데려간 것도 모자라, 소 태위는 제 거점에 군을 주둔시키며 저를 감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쉬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만, 최근 소 태위가 그 군을 물렀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군을 물렸다? 설마…….”
“예. 소 태위는 익주를 칠 생각이 분명합니다.”
동백이 이미 익주를 삼켰다는 소식을 듣기엔 익주와 거리가 있었던지라 원술은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손견 또한 강동으로 찾아온, 저를 이 자리로 떠민 전령이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전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원 태수의 명민한 뜻에 함께하지 못하여 분한 눈물만 삼켰으니, 지금 이렇게 함께할 기회를 얻자마자 바로 찾아온 것입니다. 유표는 형주에서 황제처럼 지낸다지요. 유표의 부덕함이 하늘을 찌르니, 같이 그를 단죄하여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웁시다.”
원소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소동백이 익주를 친다면 익주 자사는 형주에 도움을 요청하겠지……. 그때를 노려도 좋지만, 익주에서 형주에 지원을 보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상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소 태위 또한 정신없을 테니 우리가 사사로이 군을 일으키는 것 역시 제재하지 못하겠지.
판단은 끝났다. 의심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았던 원술은 손견을 이용해 형주를 먹을 수도 있는 이 상황을 쉬이 포기하기 어려웠다. 손견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 원술이 호기로이 대답했다.
“좋소. 얻게 되는 이득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눕시다.”
물론 말은 그리했지만 반이나 떼 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떼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원소의 머릿속에서는 제가 오롯이 형주를 집어삼키고, 손견마저 처리하는 미래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