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316)화 (316/522)

한빈의 몸뚱이가 속절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주변에 흩뿌려진 피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채염의 종사직에 대한 이야기가 어째서 착복으로 흘러가게 되어 한빈의 죽음으로 마무리 지어졌는지, 대정전에 있던 모두가 얼떨떨해했다. 그것은 동백의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헌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관례! 그 단어 하나만으로 상황이 이렇게 뒤바뀌었다. 소동백의 판을 뒤집어엎는 능력은 정말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몰려온 사대부들의 입이 꽉 다물렸다. 한빈이 한마디 내세웠다 저 꼴이 되었다. 소동백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의 약점을 쥐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고, 이곳에 몰려온 이들이라 하여 다를 건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무죄인 이는 없다. 그리고 소동백은 그 정도에 상관없이 일을 키워 목숨을 취할 명분으로 확대하는 데 기가 막힌 재주가 있었다.

고개를 조아린 채 턱만 덜덜 떨고 있는 관료들의 머리 위로 동백의 서릿발처럼 차갑고 뾰족한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고작 종사의 일로 나에게 소리를 높이다니, 내가 동탁처럼 굴어야 찍소리도 안 하려나? 상서 복야(尙書僕射)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나?”

동백에게 지목당한 사손서(士孫瑞)의 주름진 얼굴이 딱딱해졌다. 삼공의 자리가 빌 때마다 항상 거론되곤 하는 그는 명망 높은 관료였다. 그만큼 행동거지를 조심하였으며, 이번 채염의 일 또한 괜히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좋지 않겠다 사대부들을 말렸다.

하지만 치기 넘치는 젊은 관료들이 기어코 뭉쳐 소동백을 찾아가겠다 나섰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음흉한 이들은 한 발짝 빠진 채 되레 그들을 부추겼다. 그 꼴을 보니 젊은 놈들 목숨만 죽어 가겠다 싶어 여차하면 조금이라도 상황을 무마하려 함께 왔으나, 이렇게 자신이 소동백에게 지목당하는 것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동백의 뒤에 서 있는 여포는 팔짱을 낀 채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는 사손서를 노려보았다. 소동백이 손만 들어 신호를 주면 당장에라도 방천화극을 휘둘러 수급을 취할 듯 흉흉한 눈빛이었다.

“응? 나는 좀 대들 만해 보이나 보지? 내가 우습게 보여 이러는 게 아니냔 말이야.”

소동백은 답을 하지 않은 채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사손서를 재촉하듯 몰아쳤다.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날아와 박히는 칼날 같았던 터라 사손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도, 동탁은 폭정을 저지른 역적이요, 왕망(王莽)과 같은 자입니다. 사직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이 삼보를 풍요롭게 한 소 태위님과 비교하기 가당치도 않으며, 소 태위님의 명망 높은 이름과 함께 거론할 대상조차 아니라고 사료되는 바이외다.”

과연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닌지,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한 매끄러운 아첨이 바로 튀어나왔다. 동백은 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휘었다.

“사 복야께서는 이리도 현명하신데, 어찌하여 종사직에 연연하는 소인배들과 몰려다니는지 모르겠군.”

동백은 사손서의 뒤에서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이들을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라, 송사리 한 마리가 온 강물을 흐리는 법일진대 그 수가 이리 많으니 내 사직의 미래가 걱정되어 밤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모든 잡어를 다 잡아 죽인다 하여 과연 강물이 깨끗하겠나이까? 송사리와 같은 잡어도 여럿 잡으면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만찬이 되는 법이지요. 만물에 모든 것들이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니, 태위께서는 부디 그 점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소동백은 손속이 유한 이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낙양을 불태울 수도 있는 자였다. 소동백이 몰려온 관료들을 전부 참수하기라도 할까 두려웠던 사손서는 납작 엎드리며 간청했다.

소동백은 결코 변덕스러운 인간이 아니나, 정치적으로 변덕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종종 의도적으로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방심을 유도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소동백의 행동 밑에 깔린 것이 집요할 정도로 완벽하게 짜인 계산이라는 걸 알았다.

장안으로 천도한 일만 해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미친 짓이라 다들 수군거렸지만, 결국 다른 이들이 낙양을 비롯한 동쪽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소동백은 서쪽에서 안전하게 세력을 불렸다. 만약 그들이 낙양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세력이 안정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사손서가 기대는 것은 바로 그 변덕이었다. 지금 한빈을 죽여 기강을 세웠으니, 더한 죽음까지는 필요 없다는 계산을 끝냈을 터. 어쩌면 동백이 사손서를 지목한 것 또한 사손서가 이리 다른 이들을 두둔하고 나설 걸 짐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손서의 추측이요 소동백의 변덕이기에, 소동백의 계산이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사손서가 아무리 혀를 놀릴지언정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과연 소동백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찰나와 같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어졌다. 침묵이 밧줄처럼 드리워 사손서의 목을 죄었다. 바닥으로 고개를 숙인지라 소동백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던 사손서의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러면 내 오늘은 사 복야의 얼굴을 봐서 송사리들을 풀어 주겠소. 하지만 다음번에도 오늘과 같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어찌나 쥐락펴락을 잘하는지, 동백의 말에 대정전에 있던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지어 헌제마저도. 마치 소동백이 큰 은혜라도 베푼 듯, 모두의 얼굴에 안도와 감사의 기색이 서렸다. 여자를 사직에 등용하고 말고의 문제는 흐지부지된 지 오래였다.

위정자들은 모두 마음속에 뱀을 한 마리씩 품고 있다고는 하나 소동백은 그 모든 뱀을 삼키고 홀로 살아남은 뱀 중의 뱀이요, 독 중의 독인 고독(蠱毒)이었다. 소동백보다 반백 살은 더 먹은 노인 또한 그에 속절없이 휘둘리니, 실뱀에 불과한 젊은것들이 당해 낼 상대가 아니었다. 다들 오늘 그 사실을 단단히 알게 되었다.

* * *

한빈의 일 이후, 채염에 대해 대놓고 따지고 드는 이는 없었다. 하나 그런들 뒷말이 돌지 않는 것은 아닌지라, 알음알음 채염과 소동백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퍼졌다.

“혹시 소 태위와 채옹의 딸이 은밀한 사이인 것은 아니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소 태위의 처가 세상에 둘도 없을 미색이요,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끼고 돈답니다. 그런 소 태위가 뭣 하러 채옹의 여식을 곁에 둔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런 사이면 방에 꼭꼭 숨겨 두지, 왜 조정으로 부르겠습니까?”

“흥. 소동백이 그 일 중독자는 아주 조정에서 먹고 사니, 애인도 조정으로 불러온 게 아니겠소. 꼭꼭 숨겨 두고 싶은 처는 집 안에 두고, 밖에 보여도 상관없는 이를 따로 둔 것일 테지.”

“그건 채 중랑장에 대한 모욕이외다!”

“채 중랑장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 이였다면 딸을 그리 밖으로 내돌리지는 않았을 것 아니오? 저번 행궁에서 채 중랑장이 고양후(高陽侯)에 봉해진 것도 이상하오. 우리가 모르는 뒤편에서 소 태위에게 잔뜩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게 분명하오!”

자신들에 대해 무슨 추문이 돌지 미리 짐작했던 채옹과 채염은 자신들을 향한 손가락질에도 태연했으나, 그렇다 해서 소문을 꺼트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소동백과 채염 사이의 염문은 점점 살이 붙어 갔고, 그 이야기가 여포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하!”

여포는 코웃음 쳤다. 소동백과 채염은 본 적도 없는 사이다. 그건 채염이 종사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동백이가 무슨 속셈으로 채염을 등용했는지 여포가 모를 리 없었다. 소동백은 그 여자에게 스스로를 투영하며 대리 만족하는 것일 뿐이었다.

소동백 본인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채염이라는 여자를 대리로 세워 소동백 본인은 할 수 없는, 아무도 이끌어 주지 않았을뿐더러 가능성조차 보여 주지 않은 출세의 길을 닦아 줄 생각이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소태를 문 것처럼 입맛이 썼다.

〈자네는, 내가 죽여 없앨 수 없지 않나.〉

그리 읊조리던,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눈을 빛내던 소동백의 모습을 기억한다.

소동백에게 성별을 숨기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필요였다. 여포 또한 소동백에게 절대 다른 사내에게 성별을 밝힐 생각은 말라며 으름장을 놓긴 했으나 그건 단지 소동백을 독점하고 싶은 자신의 욕심의 표출일 뿐, 제가 그리 말하지 않았더라도 소동백은 절대 제 성별을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다른 이들이 소동백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이 견고하게 다져 놓은 세력은 금방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소동백은 태위 자리에서 끌어내질 테고, 지금껏 소동백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은 소동백보다 못한 아귀 같은 이들에게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여포의 한 줌 깜냥의 정치력으로도 그건 명백했다.

‘그리되도록 가만히 둘 생각은 없지만.’

소동백의 성별을 알게 된 이가 있다면 전부 없애면 그만이다. 하나로 안 되면 둘로, 둘로 안 되면 그 가족 전부를, 가족으로도 안 되면 소문이 돈 도시를…….

그렇게 전부 흙 밑에 파묻어 입을 다물리면 되는 일이다.

설령 먼 훗날 지쳐 버린 소동백이 이 판에서 내려가고 싶어진다 하여도 여포 본인이 그리 두지는 않을 것이다. 소동백은 제 목줄을 쥔 값을, 저를 굴복시킨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땅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서, 제일 고귀한 감투를 쓰고 모든 것을 지배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초선의 존재는 퍽 고마운 구석이 있었다. 그 여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동백의 성별이 한 꺼풀 가려지니까. 사람들이란 단순한 구석이 있어, 처를 들였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접는다.

‘그러고 보면 초선 그 여자는 이번 일을 알고 있으려나.’

알고 있을 것이다. 소동백은 도통 그 계집에게 숨기는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채염에 관해서 소동백이 미리 말해 두었다면……. 과연 그 여자는 어떤 생각으로 소동백의 그 선택을 지지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포 저였다면 소동백이 다른 사내에게 조금이라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 낌새가 보이는 즉시 갖은 지랄을 벌였을 것이다.

초선은 얌전한 낯짝과는 달리 천하의 여포에게도 눈을 형형히 빛내며 소동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여자다. 그런 독한 여자가 소동백이 이렇게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질투하지 않을 리 없다. 그것이 비록 대리 만족일지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초선의 속내가 궁금했던 여포는 참지 못하고 소동백의 퇴궐 시간보다 한발 일찍 소동백의 저택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