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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 이후 조당(朝堂)에 피바람이 몰아치며 한시도 조용하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무관들은 제법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양주 무위군 조려현 사람인 장제(張濟)의 집 또한 같은 서량 출신 손님을 맞아 시끌시끌했다. 특히 오늘은 유난히 떠들썩했는데, 최근 장안에 자리하게 된 마초를 환영하기 위한 술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집주인인 장제가 분위기를 띄웠다.
“자, 자. 마 장군도 이제 장안에 자리하게 되었으니, 같은 서량 사람들끼리 앞으로 잘해 보세! 결국 어려울 때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고향 사람 아니겠나.”
“흥, 고향 사람도 고향 사람 나름이지요. 저희 부친의 뒤에 칼을 꽂은 이 또한 고향 사람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마초가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번조(樊稠)가 어색하게 웃으며 집주인인 장제의 눈치를 보았다. 장제는 특히나 곽사며 이각과 친밀했다.
다만 곽사와 이각은 양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마등이나 한수와 척을 지게 된지라 오늘 일부러 초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장제로선 최선을 다한 일이었는데, 바로 마초가 그를 거론할 줄이야. 번조는 혀를 찼다.
‘어쩐지. 한 문약(文約)이 왜 저 애송이를 좀 챙겨 달라 거듭 강조했는지 알겠구먼. 저 천둥벌거숭이처럼 제 싫은 티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장안에서 저러다 목 따일까 걱정됐겠지.’
번조는 한수와 고향 친구라는 이유로, 장제는 이각과 곽사와 친한 만큼 그를 경계하고자 나란히 서량과의 연락책을 맡아 자주 서량을 찾곤 했다.
한수와 마등은 매번 마초의 걱정을 했다. 처음에는 소 태위가 아무렴 마초를 괴롭히겠느냐, 다른 장수들은 너무 걱정 말라 다독였는데 원인이 타인이 아닌 마초에게 있었을 줄이야. 저 도련님을 다루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같이 마초를 부탁받은 장제 또한 번조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허공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비슷하게 흔들렸다.
곽사와 이각은 양주 출신 중 가후를 제외한다면 제일 소동백의 신뢰를 받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대놓고 비난하며 거리낀다면 멀쩡한 이들은 아무도 마초와 어울려 주지 않을 것이다. 마초가 관서 군벌의 필두인 마등의 장남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장안이었고, 마초는 기껏해야 18살 소년 장수일 뿐이다. 괜히 성가신 일에 발을 들이느니 다들 거리를 두는 것을 택할 테고, 그러면 군대에서 겉도는 것도 금방이었다.
지금 이 자리만 해도 서로 곁눈질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이들이 있었다. 마초와 얽히지 말자 시선을 주고받는 게 훤히 보였다.
‘처음 인간관계를 어떻게 꿰냐에 따라 앞으로의 인간관계가 결정되는데, 저러다 나중에는 어찌하려나 몰라. 어휴, 어린놈이 그리되는 걸 마냥 보고 있기만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장제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마초를 잘 타일렀다.
“곽 장군과 이 장군이 억하심정이 있어 마 장군과 한 장군을 그리 대한 것이 아니고. 두 분 다 서량 사람들의 영향력을 위해 그런 것 아니겠소.”
“맞소. 마 장군은 당시 장안에 없어 모르겠지만, 동탁 정권 이후 분위기가 어찌나 흉흉했는지 선을 제대로 대지 않으면 전부 축출될 판국이었다오.”
“결국 권력을 위해 강족을 버리고 한족을 택한 것 아닙니까. 같은 이야기를 돌려 말씀하십니다.”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고 툴툴거리는 마초의 모습에 두 어른들은 쓰게 웃었다. 한두 마디로 풀릴 앙금이 아니니만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컸다.
그때 잠깐 장제의 부인 추씨가 술상을 추가로 봐 왔다. 버드나무가 흔들리는 듯한 아름다운 자태에 양지옥 같은 희고 윤기 나는 피부, 그녀가 걸어 들어올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까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내가 넋을 잃었다.
그녀의 뒤로 따라온 하비들이 술과 안주를 채워 넣었다.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모이니 아무래도 술동이가 부족할 것 같아 좀 더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옵소서.”
추씨가 길게 읍하고 뒷걸음질 쳐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녀가 등장한 것은 찰나였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연회장에 남아 그 누구도 쉬이 입을 뗄 수 없게 하였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번조가 감탄하였다.
“장 장군의 부인께서는 언제나 아름답소. 매번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려.”
“하하. 이 몸에게는 과분한 이지. 부족한 나를 택해 주어 언제나 감사하고 있소.”
제 부인이 추켜세워지는 일이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장제는 호쾌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추씨처럼 아름다운 미인을 처음 본 마초는 차마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초는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부인께서 가히 국색(國色)이십니다.”
“내 눈에는 내 부인이 국색이기는 하다만, 나라의 으뜸을 논하기엔 부족한 점이 있지. 역시 국색이라 함은 소 태위님 저택에 계신 분이 아니겠소. 이에는 부정할 이가 없다 보오.”
장제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대부분은 초선이 왕윤의 소개로 연회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를 기억한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그때를 회상하는 듯 다른 장수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며 눈동자가 흐려졌다.
“소 태위님도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미남자 자도(子都)가 질투할 정도의 외모인데, 그 부인은 천향국색(天香國色)이자 만고절색(萬古絶色)이니, 태위님의 저택이 도화원이라 불리는 것 또한 이해가 가오.”
“하하, 장 장군은 태위님께 잘 보여야겠소. 그분에게 자식이 있으시면 아들이든 딸이든 헌헌하실 테니, 정말 일등 신랑신붓감이 아니겠소? 장 장군의 자제와 소 태위님의 자제가 결혼하면 그야말로 재능 있는 사내와 아리따운 여인의 만남이요, 경사스러운 혼사가 될 것이오.”
번조가 능글맞게 장제에게 농을 걸었다. 아무리 농이라도 그렇지 현실감이 없는 소리였다. 소 태위의 자식이라면 가히 황가와 엮여도 부족함이 없거늘, 뭐가 아쉽다고 저와 사돈지간이 된단 말인가? 소동백과 사돈 맺을 자신이 없던 장제는 머쓱히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아이고, 소 태위님 눈에 내 자식이 차기나 하겠소? 게다가 우선 자식이 있는 것이 먼저 아니겠소. 번 장군은 아직 닭이 달걀도 낳지 않았거늘 그 달걀을 장에 내다 팔 생각부터 하는구려.”
“어허, 원래 장에 내다 팔기 전부터 미리미리 밑 작업을 해 놔야 하는 법 아니겠소? 그래야 달걀이 생겼을 때 좋은 자리에서 팔 수 있지.”
“참으로 상재에 밝으시오. 번 장군이 이리 매자(媒子) 노릇에 흥미가 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소.”
장제의 농 섞인 대꾸에 다들 와르르 웃었다. 낄낄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마초가 돌연 물었다.
“보아하니 장군들께서는 소 태위를 좋게 보는 듯한데, 그 연유가 뭡니까? 어딜 보아도 기생오라비 같은 것이, 번지르르 혓바닥만 긴 놈 아닙니까. 서량에서는 옛적부터 강인함을 그 무슨 가치보다도 높게 쳤는데, 다들 이렇게 비리비리한 한족 협잡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겁니까?”
조금의 물러섬 없이 노골적으로 들이박는 단어 선별에 모두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걸 무시하자니 마초가 여기저기 저런 말을 흩뿌리고 다니면 같은 서량 출신으로 꼴이 난처해진다. 같이 엮여 뿌리 뽑힐지도 모르는 만큼, 저 잘못된 착각을 바로잡아 줘야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대동단결했다.
“일단……. 어디서부터 짚어 줘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장제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흐렸다.
“지금부터 해 주는 말은 그냥 같은 지역 출신 어른이 지나가듯 전해 준 충고라고 여기고 넘기게. 밖에서 공공연히 말하면 안 되는 말이라.”
그전까지 한 명의 장수로 대우하며 존대해 주던 말도 낮추며 이르는 말에 마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우선 소 태위님은 한족이 아니고.”
“네?”
마초가 뺨이라도 한 대 올려 맞은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며 펄쩍 뛰었다. 지금껏 계속 심각한 듯 얼굴을 구기고 있더니, 깜짝 놀라자 아직 풋풋한 얼굴이 드러났다.
다들 그런 마초를 한 번 보더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그 얼굴 어디가 한족이겠나? 소 태위님을 직접 본 놈 중에서 정말 한족이라고 믿는 놈은 마 장군밖에 없을 것이네.”
모두가 저를 보며 껄껄 웃으니 놀림당한 듯한 기분에 언짢아진 마초가 불퉁히 대꾸했다.
“소하의 후손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면 한족 중의 한족 아닙니까.”
“그렇게 치면 마 장군도 한족의 피가 섞였으니 한족이겠소.”
“…….”
“그 엷은 머리 색도 그렇고 이목구비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있는 이 중 그 누구보다도 소 태위님한테 한족 혈통이 덜 들어갔을 것 같은데……. 뭐, 그 한 줄기 혈통이 누구 것인가에 따라 이리 길이 갈린 것일 수는 있겠지. 아니 그렇소?”
마초는 남만을 정벌한 한 복파 장군 마원의 후손으로 저 또한 내심 자신의 선조를 존경하였던 만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짧은 세월이나마 잔뜩 담금질 된 그의 자아는 강했다. 마초는 바로 혈통을 구실로 소동백을 적대할 이유가 없음을 인정하는 대신, 또 다른 반박 거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결국 낙양에서 자랐으면 한족의 교육을 받았을 테니 우리를 이해 못 하는 건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물론 소 태위님이 한족식 가르침을 받기는 했겠지. 장양이 양부였으니까. 뭐, 그리 치면 다음 부친은 동탁이었으니 강족식 가르침도 받지 않았겠나.”
“강족식이건 한족식이건 어느 쪽이든 잘 배우셨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먼.”
번조는 소동백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가끔씩 빛을 발하는 소동백의 과감한 유목 민족식 처리와 인정사정 보지 않는 약탈 실력은 가히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