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길길이 날뛰었다. 조홍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서량 마초군 몇을 제외하고 소동백군은 보이지 않았다.
“자효(子孝) 형, 보시오. 주변에 다른 군이나 진지가 없고 저들만 보이니, 아마 저들이 발이 빨라 한발 먼저 도달한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저런 패기를 부리는 것이니, 내 저 건방진 것들을 사로잡아 단단히 본때를 보여 줄 것이오!”
그리 외치며 조홍은 성문을 열고 덜컥 출전해 버렸다.
“자렴(子廉)!”
조인이 안타까이 외쳤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조인이라 하여 별수 없었다. 조인 또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조홍에게 가세했다. 3천 명의 군사가 영채 밖으로 쏟아지듯 나왔다.
잠잠하더니 갑자기 달려드는 조홍·조인군에 당황한 마초군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조홍은 말을 몰아 마초를 추격하며 외쳤다.
“건방진 애송이! 네가 불러 왔건만 왜 도망치느냐!”
조홍의 의기양양한 외침에도 마초는 반응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의 말은 날랬으나 쫓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렴, 너무 깊게 쫓지 말아라!”
이렇게 쉽게 물러가다니, 마초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 여긴 조인이 재차 조홍을 만류하였으나 제 군마의 발걸음 하나에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마초군을 보고 흥이 오른 조홍의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저 꼬맹이를 그냥 놔줄 순 없지! 내 저 멀끔한 얼굴에 공포가 어리는 모습을 꼭 보고야 말 것이오!”
“맹덕 형이 오늘 일을 알면 네 곤욕을 치르게 될 게다!”
“맹덕 형은 어떻게든 소동백에게 한 방 먹이기를 바라지 않소! 두고 보시오, 저 어린것의 수급을 베어 가면 맹덕 형은 나를 크게 치하할 테니!”
마초군을 헤집고 다니며 제 위용을 뽐내니 의기양양해진 조홍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마초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거대한 언덕 아래서 불쑥 군사들이 뛰쳐나오며 함성을 내질렀다. 매복이었다.
“아뿔싸!”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조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참 도망치던 마초가 말머리를 돌리더니 의기양양하게 조홍과 마주했다.
“하하, 제 발로 죽기 위해 기어들어 왔구나!”
새하얀 얼굴에 청금석 같은 눈을 푸르게 빛내며 쏘아보니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인 소년 신장(神將), 나타(哪吒) 태자와도 같은 그 모습에 조홍과 조인을 따르던 군사들이 벌벌 떨었다.
“젠장, 취려로 돌아가자!”
조홍과 조인은 그 길로 말을 몰아 달아났다. 이번에 쫓는 쪽은 마초였다. 말을 몰고 그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마초에게서는 서량의 기개가 그대로 느껴졌다. 조홍과 조인 또한 잔뼈가 굵은 장수였으나, 날 때부터 말 위에서 노닌 마초와 승마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자칫하다가 따라잡히겠다 싶었던 그 순간, 취려의 성문을 부수고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마초군이 보였다. 어쩐지 마초와 함께 온 군사들의 수가 적다 싶더니, 애초에 인원을 나눠 두었던 모양이었다.
취려에서 버티던 조조군은 눈치를 살피다 이내 영채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장이 없으니 그들을 통솔할 이도 없었다. 아우성치며 달아나는 자신의 군사들을 보며, 조인은 이를 악물고 고삐를 꽉 쥐며 외쳤다.
“취려는 안 되겠다! 팽성으로 간다!”
그리 외치는 사이에도 마초는 시시각각 접근하여 거의 그들의 꽁무니에 다다랐다. 마초가 휘두르는 검의 풍압이 조홍의 뒷덜미를 선득하게 스쳤다.
하지만 조홍과 조인을 비롯한 조조 군도 아무 생각 없이 달아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함정을 파 둔 곳이 있었다. 조홍과 조인은 모르는 척 마초를 그쪽으로 유인했다.
“달아나는 꼴이 토끼 같구나! 내 토끼 사냥 또한 능함을 태위님께 보여 드려야겠다!”
그런 속내를 모르는 마초는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이 닿는 거리가 짧은 만큼, 그들에게 유효한 공격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검을 도로 검집으로 돌려보낸 마초는 활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마초의 말이 다리를 헛디디며 마초가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마초는 바로 그대로 말의 안장을 박차고 허공에서 몸을 돌려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덕에 무사했지만, 이미 그사이에 조홍과 조인은 멀찍이 거리를 벌린 뒤였다.
“좋다 말았군!”
마초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함정을 파 두었을 정도니, 저들을 너무 깊숙이 쫓았다가는 반대로 자신이 매복에 포위당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마초는 동백이 내린 명을 곱씹으며 말에게 다가서서 상태를 보았다. 다행히 말은 멀쩡했다. 말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해 온 만큼, 마초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자.”
마초는 말을 다독이며 그 고삐를 쥐었다. 꽉 쥔 주먹에 잡힌 것은 아쉬움이었다.
* * *
마초가 취려를 접수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동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맹기가 저런 계책도 쓸 줄이야.”
평소 마초는 융통성이 없고 고집과 자존심이 센 데다가 일대일로 정정당당히 대결하는 걸 즐기는 듯하여 내심 걱정했는데, 오늘 일을 보니 필요한 순간에는 꾀를 쓰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미소 짓는 동백의 입가에 흡족함이 서렸다.
왕필 또한 내심 깜짝 놀랐지만, 동백의 앞에선 태연한 듯 말을 거들었다.
“마 장군이 어린 만큼 도발이 잘 먹혔을 겁니다.”
“그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는 나도 많이 써 본 만큼 잘 알고 있지.”
동백의 말에 주변 장수들이 껄껄 웃었다. 동백이 어리다며 우습게 여겼다가 지금 명운을 달리했던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던가.
하진이 그 대표적인 예였으나 그를 제외해도 많았다. 어리니 견문이 얕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어떻게든 소동백의 체면을 바닥으로 고꾸라트리기 위해 혀에 칼을 두르고 나섰던 이들……. 그들은 모두 낙양과 장안에 묻혀 있다. 조조의 말대로 그들의 수만 헤아려도 아마 이 서주 땅까지 닿을 것이다.
저 멀리서 마초가 군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었다. 조홍과 조인을 놓쳤는지 마초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동백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마 장군의 자존심이 높은 건 진즉 알았지만, 욕심도 많구나. 취려를 함락했으면서 적의 장수의 목을 베어 오지 못했다고 저리 시무룩해하다니 말이야.”
“전공 욕심 없는 장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 태위님께서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완벽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니 여 장군도 조조를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습니까.”
“난 왜 끌고 와? 안 그래도 빡치는데 불난 데 부채질해? 어? 내가 우스워?”
“이크.”
그냥 둬도 조조를 놓쳐 속 쓰린 와중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왕필의 말에 여포가 눈을 부라렸다. 장수라기보다는 시정잡배 같은 여포의 윽박에 왕필은 아차 했다는 듯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조운이었다면 자신이 틀린 말을 했냐며 받아쳤을 테지만 왕필은 그 정도로 대범하지 못했다. 그는 곰만 한 체구를 구겨 소동백의 몸 뒤로 숨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여포의 칼날 같은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동백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행태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초가 가까이 온 듯하자 동백이 비단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자, 우리 입군식(入軍式)을 제대로 치른 마 장군을 환대하러 나가 보자고.”
비단은 익숙한 듯 발을 구르더니 한달음에 마초가 터덜터덜 돌아오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주공이 승전 장수를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리 친히 마중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마초가 단단히 소동백의 눈에 든 게 분명했다. 소동백을 혼자 가게 둘 수 없었던 여포는 쳇, 혀를 차고는 동백의 뒤를 쫓아 말을 몰았다.
‘내가 조조만 죽였어도 저 마초 놈이 활약할 틈은 없었을 텐데. 싸울 만한 놈이 나타났다고 희희낙락할 때가 아니었어.’
하지만 후회해 봐야 기회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이게 전부 그 전위라는 놈 때문이다. 여포는 투덜거리며 모든 원망을 조조와 전위에게 돌렸다.
* * *
조인과 조홍은 가까스로 팽성에 다다랐다. 1만 군은 어디로 갔는지, 그들과 함께 돌아온 군사는 5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마초의 활약을 전해 들은 조조는 나직이 탄식했다.
“듣자 하니 기세가 마치 젊은 여포와 같구나. 어찌하여 하늘은 소동백군에 여포 같은 이를 저리도 많이 내려 주는지 모르겠도다!”
그와 달리 조조에게 있는 장수라고는 어린 마초에게 참패당한 조인이나 조홍과 같은 이였다. 조인과 조홍을 보고 노기를 참을 수 없었던 조조는 그들을 매섭게 질책했다.
“내 흥분치 말고 그저 문만 걸어 두어 시간을 벌라 했거늘! 그게 그리도 힘들었더냐! 내가 오래 버티라 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팽성의 보수가 끝날 때까지였을 뿐인데, 그도 못 버티고 애꿎은 군사만 날렸구나!”
조홍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꾸중 듣는 어린애처럼 신발 끝만 바라보며 어물거렸다. 날카로운 조조의 시선이 조홍의 옆에 있는 조인에게로 향했다.
“조인, 너는 조홍을 말리겠다며 따라가 놓고선 저놈이 수에 빠지는 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느냐? 그럴 거면 도대체 왜 따라간 것이냐?”
조인 또한 면목이 없던 지라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사촌 형까지 질책을 당하자 조홍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결국은 제 고집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조홍이 무릎을 털썩 꿇으며 조조에게 간청했다.
“제 욕을 하는 건 애써 참았습니다만, 형님, 아니, 주공의 욕을 하는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신하가 주공의 큰 뜻을 어지럽혔으니, 부디 벌해 주십시오.”
평소에는 사촌이라는 이유로 조조와 허물없이 굴며 편히 불렀던 조홍이 예의를 깍듯이 지키며 제 죄를 벌하라 하니 머리끝까지 치솟은 조조의 화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런들 근심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취려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함락당해 시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조조의 중후한 낯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