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346)화 (346/522)

여포는 어떻게든 마초를 구슬리려 했다.

“네 맘대로 그렇게 행동하는 걸 소 태위가 반길 거라 여기나? 잘돼서 공을 세워도 문제, 안 돼서 모가지가 날아가도 문제라고.”

“태위께서 정말로 제가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면 미리 언질 주셨을 겁니다. 제가 죽음을 불사하고 조홍을 끄집어내려고 하니 소 태위님께서는 그럴 가치가 없다 하셨지요. 하지만 저기에는 조조가 있고, 태위님께서는 살아 돌아오라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여 장군 당신을 저에게 붙여 주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여차하면 우리가 일기당천(一騎當千)으로 저들을 짓밟길 바라신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소 태위께서 정찰만 필요하셨을 뿐이라면 평소 부리는 까마귀를 보내셨겠죠. 그런데 여 장군이 이리 겁쟁이처럼 구시니, 소 태위님의 크나큰 뜻은 저 혼자 행해야겠습니다.”

아니, 소동백은 그렇게 돌려 말하지 않는다고! 특히 장수들은 대부분 빡대가리인 걸 알아서, 장수들한테 명령할 때는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린단 말이야!

여포는 자신 또한 자기 합리화와 소동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지니고 있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코앞에서 마초가 저러고 있는 꼴을 보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네 말에서 지적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어디서부터 거론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내가 너한테 붙은 게 아니고…….”

여포가 한숨을 내쉬며 마초의 착각을 정정해 주려던 찰나, 조조군의 빈틈을 발견한 마초는 그대로 말을 내달리며 뛰쳐나갔다. 마초의 부하들 또한 하나같이 생각이라도 공유하고 있는 듯 일사불란하게 뛰쳐나갔다.

평소와 같은 전장이었다면 저 통솔력이 도움이 됐을 터이나, 오늘은 다 같이 불구덩이에 짚을 짊어지고 뛰어드는 꼴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애송이가!”

여포가 욕설을 짓씹으며 한발 늦게 마초의 뒤를 따랐다. 저러다가 정말 저 새끼 목이 따이기라도 하면 소동백 볼 낯이 없었다.

왠지 불안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초가 조조의 진지를 짓밟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동백군의 야습이다. 북을 두들겨라!”

북소리가 진동하자 사방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조의 복병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수백의 병사가 수천으로 불어나니, 수가 적은 마초군은 그대로 포위되고 말았다.

섣부른 제 치기가 불러온 참사에 마초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손을 들고 붙잡힐 수는 없는 법. 이렇게 된 거 저를 둘러싼 창에 꿰뚫려 죽게 된다 하더라도 조조의 목숨이라도 취할 요량으로 마초는 희번덕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다진 각오가 무색하게도 조조는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고, 주변에는 저와 서량 기병을 향해 창끝을 세운 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포위를 좁히는 일반 군사들밖에 없었다.

조조는 마초가 단번에 찾기 어려운 안전한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을 든 장수의 얼굴이 어린 걸 보니, 조홍과 조인을 패퇴시킨 마초인 듯합니다.”

“흠, 거물은 아니어도 꽤 괜찮은 놈이 걸려들었구나! 이 조조의 체면은 서겠어!”

이번에 마초가 활약했다고는 하나 소동백군에서 마초가 차지하는 위치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함정을 파 놓은 대가로 치기엔 나쁘지 않은 값이었다.

“으아아악!”

그때 저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휘몰아치는 돌풍에 낙엽 흩날리듯이 군사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여포가 말 그대로 인간을 쳐올리며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여포!”

여포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조조가 경악 어린 외침을 내질렀다.

“내가 여포를 몰랐구나! 정말로 여포가 찾아올 줄이야!”

무력으로 여포와 맞부딪쳐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포는 대군을 이끌 때보다 저렇게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등장했을 때가 더 두려운 상대였다. 이쪽의 군사가 2천 명이고 상대는 고작 스무 명 남짓인 상황에서도 조조는 감히 제 승리를 점칠 수 없었다. 조조는 처음으로 막막함에 탄식했다.

어둠을 가르듯 하얗게 쌓인 눈밭 위로 반사된 달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여포의 방천화극 끝이 눈송이의 사이를 피해 가르듯, 기기묘묘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잘 익은 과일 떨어지듯 병사들의 목이 하나둘씩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더운 숨이 찬 공기를 가르며 여포의 입김이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마치 지옥에서부터 죄인을 잡아가기 위해 현세로 올라온 옥졸, 나찰(羅刹)이나 야차(夜叉) 같은 모습에 조조의 군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여포는 붙들어 두기 위해 밧줄이 아니라 쇠사슬을 써야만 하는 자였다. 그마저도 저자에게 쇠사슬을 걸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가정 내의 일이었다.

조조는 제 곁에 둔 호위를 돌아보았다. 여포에 맞서 자신을 구해 낸 전위였다. 그 활약을 눈여겨보아 그를 바로 승진시켜 제 호위로 두었을뿐더러 이번에도 함께 왔다.

“전 장군은 여포를 지난번 상대했었지. 이번에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상대하라 명하시면 응당 저자를 상대하러 갈 것입니다.”

전위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조조는 기대를 품고 물었다.

“그러면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전위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에 대한 답 또한 덤덤히 말했다.

“그리 명하시면 따를 것이나 성공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어째서? 그대는 사수강에서도 여포를 상대하며 수십 합을 겨루지 않았나.”

“사수강에서의 일은 요행이었습니다. 그때는 주공께서 위기에 처해 앞뒤 볼 것 없이 뛰어들었을뿐더러, 여포 또한 스스로가 위험에 빠지지 않았으니 다소 방만한 마음으로 저를 상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여포는 잘 벼려진 칼처럼 기세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데다, 저는 말 타는 것에 능숙지 않고 여기 있는 병사들은 전부 보병이다 보니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목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처음에는 조조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여차 이어지는 전위의 말이 그럴듯했다.

“여포와 같은 무위를 지닌 자가 한세상에 둘 나오지는 않는 법이지!”

그런 이가 소동백의 손에 들려 있음에 조조는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여포에 비할 만한 장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조는 과거, 소동백과 여포에 맞서 나섰던 두 명의 장수를 떠올렸다. 유비를 따르는 관우와 장비였다. 특히 관우는 그 위용이 다른 이와 견줄 수 없는 만인지적의 인걸(人傑)이었다.

그런 이들이 전부 제가 아닌 다른 이들을 따르고 있으니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의 가느다란 눈에 탐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라! 산을 뽑을 만한 힘에 세상을 덮을 만한 기운을 지녔던 초패왕조차 시운이 불리하면 오추마를 타고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법. 결국 초왕 또한 오강(烏江)에서 명운을 달리하였으니, 언젠간 여포 역시 그리될 날이 올 것이야!”

조조는 해하가(垓下歌)의 한 구절을 들어 여포의 최후를 거론했다. 다만 당시 항우는 100여 명으로 5,000군의 포위를 뚫는 괴력을 발휘하였지만 그를 도와줄 이가 없어 결국 고립무원이 되어 죽었다. 반면 20여 명으로 2,000군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다 해도 여포는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소동백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되니, 여기서 그를 붙잡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결국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여포를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지만 이미 불을 붙인 뒤였다. 한번 칼을 뽑았으면 그대로 칼집에 꽂지 않는 것처럼, 한번 군사를 일으켰으니 뭐라도 얻어 내야 했다. 어떻게든 여포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그게 안 된다면 마초라도 죽여야 했다. 초조해진 조조는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명령을 했다.

“여포와 마초의 팔 한 짝에 화살을 맞히면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찬 궤짝 하나! 다리 한 짝에 궤짝 둘! 목에 장군의 직을 내리겠노라!”

쩌렁쩌렁 차가운 공기를 울린 조조의 외침을 듣고, 그저 두려워하던 조조군의 시선에 그제야 욕망으로 불붙은 용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조조의 외침에 화색이 돈 것은 조조군만이 아니었다. 조조의 위치를 그제야 특정한 여포는 그대로 방천화극을 옆구리에 끼고는 활을 꺼내 들어 조조를 겨누었다.

깜짝 놀란 조조는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그 덕에 가까스로 화살을 피할 수 있었고, 화살은 조조의 미간이 아닌 투구를 맞혔다. 조조는 벗겨진 제 투구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포의 행동에 깜짝 놀란 조조군이 흐트러진 사이, 자신들을 둘러싼 인간 장벽 중 취약한 곳을 발견한 마초가 바로 활로를 뚫기 위해 뛰어들었다.

칼을 휘두르며 말을 몰고 길을 여는 마초의 모습은 가히 통나무로 성문을 부수는 공성 무기인 충차(衝車)에 버금갔다.

마초의 뒤를 따라 서량 기병이 따라붙었고, 옆으로 여포가 대기시켜 두었던 병주 기병이 지친 그들을 엄호했다. 마지막으로 여포가 후미를 맡으니, 그 기세가 쫓기는 이들 같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군도 포기하지 않았다. 여포와 마초가 데리고 있는 군사의 수는 너무 적었다. 그마저도 하나둘 누락되어 목숨을 잃으니, 이제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 후미에서 달리던 여포는 어느새 마초와 나란히 말을 몰았다.

“쫓아라, 쫓아! 보석 한 궤짝이다!”

“날 공격해서 보석을 받는 것보다 조조를 약탈해서 보석을 얻는 게 더 쉬울 텐데!”

마초와 여포는 끈질기게 들러붙으며 포위를 좁히는 조조군을 떨쳐 내며 욕을 내질렀다. 그중 태반은 조조에 대한 욕이었고, 남은 3할은 자신과 등을 맞대고 있는 상대를 향한 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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