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358)화 (358/522)

조조와 소동백의 서주전은 조조가 물러서는 것으로 끝이 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백이 바로 장안으로 회군할 수는 없었는데, 조조는 그렇게 서주를 떠나는 와중에도 보복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주 곳곳에서 소규모의 조조군이 백성들을 꼼꼼히도 학살했다.

한때 당고의 화를 거론하며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기 서슴지 않았던 강직하고 혈기 넘쳤던 젊은 청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강직함은 고집이 되었고, 혈기는 오만함이 되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자신이 당한 일은 어떻게든 배로 갚아 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존심 강한 중년의 군웅뿐이었다.

동백군은 서주에 남아 조조군의 잔당을 뿌리 뽑는 한편 피난민들을 보호했다. 동백은 여포와 함께 예주를 통해 형주로 향하는 피난민들에게로 향했고, 조운과 왕필, 그리고 마초는 청주 쪽으로 가는 피난민 행렬로 보냈다. 젊은 둘을 붙여 놓은 게 걱정되긴 했지만, 왕필이 따라붙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곽사와 이각은 거리를 두고 조조군을 쫓게 시켰는데, 이들이 피난민 보호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후가 알았더라면 태위님도 못 믿는 건 매한가지 아니냐며 한 소리 하겠군.’

동백은 피식 웃으며 비단을 몰았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얼굴 한구석에 그늘이 드리웠다.

“왜. 아직도 청주로 갈 걸 그랬다 싶어”

동백의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자오가 말을 걸었다.

원래는 동백이 청주로 향하려고 했다. 자오에게 유비군이 청주 자사 전해와 함께 서주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백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이렇게 유비와 맞부딪칠 기회가 닿을지 알 수 없잖아.”

“뭐……. 어차피 맞부딪쳐도 죽이긴 쉽지 않잖아. 이번만 해도 조조 놈이 얼마나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던지, 이야, 감탄이 들 정도였다니까.”

자오의 말이 맞았다. 여왕으로 추정되는 유비를 비롯해 조조나 원소와 같은 군벌들 모두 악운에 강했다. 손견과 손책, 그 손가 이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죽은 게 아니라 다들 화병으로 죽었다. 유비의 옆에 관우와 장비가 있는 한, 설령 동백이 출전했다 하더라도 유비의 목을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너, 형주 쪽이 이상하게 찝찝하다며. 앨리스로서의 직감 같은 거 아냐 그런 건 흘려 넘기기 어렵지.”

“…….”

자오의 말대로, 이상하게도 형주 쪽으로 향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성과 본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끝에 결국 동백은 찝찝함을 이기지 못하고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고도 하늘의 뜻에 휘둘리는 느낌이 영 불쾌했다.

“아니면, 청주 쪽으로 보낸 인선이 조운과 마초여서 더 신경 쓰여 안 그래도 그 둘은 원래 유비에게 충성을 맹세한 오호 대장군이었다며.”

“딱히 그건 아냐.”

둘 다 지금은 자신의 부하일뿐더러 그들의 충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의 인연이 뒤바뀐 현재에 어떻게 작용할지 확신할 수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감, 특히 조운과 쌓아 올린 기나긴 세월은 유비와 한 번 마주친 것 정도로 흔들릴 만큼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자오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래. 조운이 널 얼마나 신경 쓰는데. 너랑 여포 단둘이 두고 가기 두려워서라도 유비네로 전향하진 않을걸. 마초야……. 자기 가족이 다 네 수중이고.”

“뭐, 이 기회에 원래의 인연이 어떻게 작용할지 가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청주로 향한다고 해서 조운과 마초가 그들과 마주친다는 보장이 없기도 하고.”

“맞아. 그렇다고 이각과 곽사를 청주 쪽으로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조운과 마초 대신 여포를 보내는 것도 안 될 일이긴 매한가지고.”

자오가 말하는 찰나, 여포는 제 부하들 쪽으로 살금살금 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고, 겸사겸사 괴롭히려는 모양이었다. 참 나잇값 못한다. 동백과 자오는 동시에 혀를 찼다.

여포 또한 이각, 곽사와 같은 과였다. 저놈한테 피난민을 맡길 수는 없는데, 하필 여포는 동백이 데려온 이들 중에서 직위가 제일 높았다. 그러니 불쌍한 왕필한테 여포를 제어하라고 넘길 수도 없었다. 그냥 동백 제가 데리고 있는 수밖에. 동백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여차하면 왕필이 잘해 주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한다니까. 그냥 신들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같아서 짜증 나는 것일 뿐이야.”

동백이 아미를 찡그렸다. 어차피 되짚으며 후회해 봐야 늦었다. 동백이 그리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조조군의 잔당을 처리하던 여포의 부하들은 관성적으로 창을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이거 도겸한테 돈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몰라.”

“도겸은 뭐 하고 있다던가”

“뭐, 담현에 처박혀 있겠지.”

서주를 지켜 준 것도 모자라 뒤처리까지 해 주는데, 감사의 인사는커녕 얽히기도 싫다는 듯 홀로 숨어 있는 도겸의 꼴이 웃겼다. 위속과 위월 형제가 그리 주거니 받거니 할 때마다 조조군이 한 명씩 바닥에 허물어졌다.

여포의 부하 중 한 명인 장료는 흙먼지 섞인 침을 바닥에 퉤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조조도 어지간하군. 퇴군하면서까지 어깃장을 놓다니. 뒤끝 길기로는 여 장군 뺨치는데.”

“누구 뒤끝이 길다고”

“히이익!”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위속과 위월 형제 사이로 여포의 고개가 쑥 들이밀어졌다. 그들은 갑자기 호랑이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코앞에서 들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여포와 고개를 마주한 장료 또한 매한가지였다. 장료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외쳤다.

“심장 떨어질 뻔했잖습니까!”

“어쭈, 많이 컸다”

대놓고 타박하는 장료의 건방진 말투에 여포가 자애롭게 눈을 휘어 접었다. 물론 어린아이 머리만 한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도 동시였다.

그렇게 장료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 다행히도 때마침 조조군의 잔당인 듯한 이들이 저 멀리 보였다. 넘어진 아이를 향해 칼을 휘두르려는 것이 일촉즉발이 따로 없었다. 장료는 호들갑을 떨며 그쪽으로 손가락질했다.

“저기, 저! 조조군! 아이고, 애가 넘어졌네요! 적토마면 단숨에 가서 구해 줄 수 있을 텐데! 여 장군이 있었는데도 애가 죽은 걸 소 태위님이 아시면……!”

“새끼가 약아빠진 짓만 배워 가지고……. 딱 기다려라, 내가 금방 돌아올 테니까.”

여포는 으름장을 놓고는 뛰쳐나갔다. 평소의 여포였다면 이런 잔챙이들 처리는 다른 놈들에게 맡겼을뿐더러 애가 죽거나 말거나 그건 다 약한 놈 잘못이라며 심드렁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소동백과 함께 왔다 보니 그럴 수가 없다.

평소 소동백은 절 소 닭 보듯 하지만, 그런다고 방심할 수는 없는 게 그러다가도 가끔 저를 빤히 주시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제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흡족하다는 듯 눈을 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여포 제 배 속 깊은 곳이 뻑적지근하며 가슴이 부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웃으며 바라봐 준다는 이유로 천하의 여봉선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날뛰다니. 마치 광대라도 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주나라의 경국지색 포사(褒姒)를 웃게 하기 위해 주유왕이 비단을 찢다 못해 거짓된 봉화까지 올렸다더니, 제가 그걸 듣고 비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소동백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추태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수시로 추태를 저지르지 않던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평범한 일로 잘 웃지 않는 미인을 웃길 수 있다는 것부터가 아무나 할 수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포는 그렇게 오늘도 자기 합리화를 했다.

“조조 그 양아치 같은 새끼가 백성을 핍박하라 시키더냐!”

여포가 웃으며 방천화극을 위협 삼아 붕 휘둘렀다. 적토마에 긴 산새 깃털이 꽂힌 자금관과 방천화극. 여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지만, 비단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풍기는 기세가 어마어마하였기에 조조군은 휘두르려던 검조차 내다 버린 채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모여 있던 새들이 사람 인기척에 도망치는 것도 저보다는 느릴 듯싶었다.

천천히 말을 몰며 서주민들에게 다가간 여포는 흥, 콧김을 내뿜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조군에게 위협당했던 서주민 한 무리는 바로 여포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점잖아 보이는 젊은 선비가 여포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읍했다.

“저희는 서주 낭야국 양도현(陽都縣)에서 왔습니다. 귀인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제 조카는 물론이거니와 저희 또한 이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입니다…….”

진실된 감사의 인사에 여포는 괜히 목덜미만 긁적였다. 이런 상황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여포는 어색해 죽겠는 걸 간신히 참아 내며 태연히 대꾸했다.

“뭐, 은혜는 무슨. 조조 놈이 헛짓거리 한 거지.”

남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힘들어도 남 욕하는 건 쉬웠다. 머쓱했던 여포는 숨 쉬는 것처럼 조조를 욕했다.

“다친 데는 없니”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동백이 웃으며 선비의 조카라던 아이에게 물었다. 말에서 훌쩍 내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태도가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포는 방천화극을 어깨에 얹고는 그 위에 팔을 걸친 채 못마땅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동백은 아이를 이모저모 살폈다. 헌제나 손권과 비슷한 또래였던지라 더 마음이 쓰였다.

동백을 고요히 응시하는 아이의 눈은 유난히도 또렷했다. 아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멀쩡해요.”

“다행이로구나. 이곳은 위험하니 얼른 떠나라.”

동백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작은 등을 떠밀었다. 아이는 숙부에게 달려가 그 허리를 덥석 안은 채, 동백이 있는 곳을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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