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고 새싹이 움트며 봄을 알리는 봄비가 내렸다. 겨울바람을 피해 문을 꽁꽁 닫아 두었던 장안성의 사람들은 하나둘 문을 열어 빗소리를 즐겼다. 부슬비가 이파리를 적시며 바닥을 짙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흙바닥은 말발굽에 패여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내 수많은 장정들이 흙을 다지듯 밟아 나가니, 어지럽힌 것이 거짓말처럼 길이 다시 정돈되었다.
굽이굽이 길을 따라 길게 늘어진 군사들은 하나같이 기세등등했으며 얼굴에는 승리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소동백군의 귀환이었다.
동백이 목표로 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겉으로는 대승 그 자체였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뛰쳐나와 소동백군을 반겼다.
담 너머에서 전해지는 사람들의 환호성만으로도 위풍당당한 개선식의 모습이 짐작 갔다. 본디 그곳에 함께했어야 할 중랑장 악진은 자신의 저택에 홀로 틀어박힌 채, 빗소리도 집어삼킬 정도로 요란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 무장을 빈틈없이 차려입었던 것과 달리 흰 상복을 입은 채였다. 흰 삼베가 대들보를 비롯하여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정당의 한가운데에는 모친의 시신이 놓인 목관이 있었다.
그가 자리한 북쪽 정당은 저택의 내대문에 들어서면 중정을 지나 바로 일직선에 위치해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인해 내대문만 들어서면 바로 그런 악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터이나, 하필 오늘 개선식이 겹치는 바람에 아무도 장례식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개선 행렬이 완전히 지나갔는지 서서히 환호 소리가 줄어들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드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고요한 침묵이 자리했다. 그제야 중정 바닥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자박. 정갈하게 걸어오는 발소리는 몇 번이고 귀 기울여 들은 적 있는 것처럼 익숙했다.
상대가 외대문을 지나 내대문에 다다르고 나서야 악진은 갑작스레 찾아온 조문객을 정확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서 악진과 조문객의 눈이 마주쳤다. 악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문객, 소동백은 삼베로 만든 상복 위에 흰 비단 장포를 걸친 채 머리에는 흰 두건을 매고 빗속에 서 있었다. 입가에 느른한 미소를 띤 동백이 머쓱함을 감추고 말을 건넸다.
“너무 늦지 않은 모양이야.”
악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황궁에서 황제를 만나며 승전 연회를 즐기고 있어야 할 동백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단 말인가 동백이 승전 연회보다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부인을 만나러 가길 선호한다는 건 알고 있으나, 그 또한 동백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되어 주진 못했다.
동백의 어깨 위로 탁탁 튄 빗방울이 열기를 식히며 뿌옇게 김이 서렸다. 얼마나 급하게 이곳을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동백은 성큼성큼 중정을 가로질러 악진이 있는 정당의 계단 앞까지 도달했다.
“자네 모친과 나 사이에 인연이 있거늘, 내 그래도 보내 드리는 길 배웅은 나와야 하지 않겠나.”
우연인지, 아니면 운명인지. 악진의 모친이 숨을 거둔 것은 동백이 입성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미리 장안으로 보내 둔 자오가 물어 온 소식에 걸음을 재촉한 덕에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저야말로 태위님께서 입성하는 길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덤덤히 대답하기는 했지만, 동백이 저에게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을뿐더러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제 모친의 장례식장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악진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내 그대 사정을 알고 진심을 아는데 굳이 그리 체면치레할 것 있나. 노잣돈은”
“지전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래도 악 장군의 모친 아닌가. 내 부인께 드리는 노잣돈을 가져왔으니 이걸로 대신 하게.”
동백이 돈 꾸러미를 건넸다. 본디 실제 돈을 시체와 함께 묻었으나, 점점 삶이 각박해지며 종이를 돈 모양으로 만든 지전을 대신 사용하는 사람이 늘었다. 악진 또한 집이 부유한 편이 아니다 보니 지전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그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동백이 이만큼이나 신경 써 줄 거라 생각지 못한 악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동백이 건네준 돈 꾸러미를 받았다.
상주인 악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동백은 악진의 모친 앞에 섰다. 동백은 수의로 온몸을 감싼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서 장례식장에 온 건 처음이었다.
장양도, 금단요도. 둘 다 변변한 장례식마저 치러 주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한으로 남았다.
악진의 모친이 작고하였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이곳에 온 것은 악진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금단요의 죽음을 어디 대놓고 고할 수 없는 제 처지에 이렇게라도 대리 만족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악진과 타계한 악진의 모친이 제 속내를 알면 실망할까, 아니면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자신들을 이용하시라 할까……. 항상 강직하였으며 저에게 맹목적이었던 두 모자의 성품을 보면, 후자라 하여도 놀랍지 않을 터였다.
동백은 술을 채운 술잔을 얼굴 높이까지 올리며 말했다.
“이 잔을 받고 편히 가시게. 아들 걱정은 마시고.”
악진은 그런 동백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를 맞아서일까, 아니면 고된 여정으로 피로해서일까. 빳빳하고 곧은 동백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악진은 주저하다 덧붙였다.
“……그래도 태위님 말씀대로, 어머니 가시기 전까지 족히 효도하였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그래…….”
동백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흐릿했다. 그래, 적어도 악진이라도 만족하였다니 다행이다. 불효한 자는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동백은 눈앞의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승전의 열기와 흥분으로 온 장안성이 들썩거리는 아래, 그사이 더 거세진 빗소리만이 타닥타닥 두 사람의 침묵 어린 공백을 메웠다.
악진 모친의 장례식 이후, 동백은 금단요의 죽음은 잊은 사람처럼 바로 냉정을 되찾고 이성적으로 움직였다. 감정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뜨겁게 타오른 분노의 불꽃은 동백을 덥혔다. 그리고 복수는 동백을 식혔다. 그렇게 몇 번을 담금질하고 나니 남은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었다.
동백이 금단요를 얼마나 극진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리리는 혹여 그 불이 동백을 집어삼키기라도 할까 걱정했다. 하지만 동백이 거침없이 나아가니 차마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제가 하는 걱정의 한마디가 동백의 등을 떠밀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붙들까 두려웠다.
동백은 지금 찬후였으나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이었다. 단계를 밟지 않고 뛰어오르다간 그대로 미끄러지기도 쉽다.
동백이 굳이 승상(丞相)이 아닌 태위(太尉)직을 택한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삼공(三公)이라 하여 다 같은 삼공이 아니었다. 동백이 맡은 태위직은 삼공 중 군사 부문을 담당하였으나,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는 실권 없는 명예직으로 실제 전쟁 업무는 대장군이 수행하곤 했다.
본래 태위는 전한기 호칭이고, 후한에 들어서는 사마(司馬)로 불렸다. 하지만 동탁이 부득부득 상국에 오르겠다 우기니 당시 그럴듯하게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한 단계로 장안 천도와 함께 전한기 호칭을 부활시켰는데, 그로 인해 태위의 호칭 또한 부활하게 된 것이었다.
태위 위로는 황제의 보좌관이자 조정의 우두머리인 승상직이 있었다. 상국이 승상을 예우한 호칭인 만큼, 동백이 동탁에 이어 승상에 오르면 아무래도 동탁을 계승하는 느낌을 주기 마련이었다. 동탁과 한데 묶이는 일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태위직을 받았다.
어차피 태위 위에 승상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도 존재할 때나 의미 있는 일이다. 승상과 어사대부 자리가 공석으로 있으니, 태위인 동백 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높은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 위에 아무도 없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그 또한 홀로 짊어지기엔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는 태위인 동백이 대장군의 역할까지 하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곤란했다. 이제 틀어쥐고 있던 권력을 조금씩, 손바닥에 쥐고 있던 모래를 흘리듯 아래로 내려 줄 차례였다. 그래야 빈손으로 새로운 모래를 움켜쥘 수 있을 테니.
새로 대장군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동백은 이번 전쟁의 공을 여포에게로 돌려 그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동백이 막 태위가 되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제 여포에게도 양주와 익주, 서주를 정벌한 공이 있고 소동백의 치세가 안정적이니 감히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동백은 출정했던 병사들을 이용해 서주의 일에 대해 장안과 근처에 알음알음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되어 먹고살 만해진 백성과 관료들은 서주의 참사에 대해 듣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시체로 강이 막혔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진짜 봤다니까 그래서 서주민들은 태반이 죽고, 남은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주가 텅텅 비었다고.”
“서주 자사는 뭘 하고 있다 하나”
“조조가 두려워 숨어 있던 모양이야. 태위님께서 가서 간신히 한숨 돌렸지.”
“한숨 돌리면 뭘 하나. 사람이 없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낙양 보게. 오랫동안 수도였다지만 사람이 모두 장안으로 옮겨 오니 지금은 그저 버려진 땅덩이 아닌가 장안 또한 오랫동안 쇠락하였으나 사람이 몰리니 금세 전한 시대의 위엄을 되찾았지. 서주가 기세를 되찾기까지 오래 걸리겠구먼!”
모두가 입을 모아 서주를 걱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컸다. 가끔 서주에 지인이나 친척이 있는 이들이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내 먼 친척이 서주에 머물고 있는데, 이번 환란을 피했는지 모르겠구먼.”
“아이고, 걱정 많겠구려. 무사히 빠져나갔을 게요.”
“그럼 좋겠구려.”
“어차피 고향을 떠난 것, 형주고 청주고 다른 곳보다는 장안으로 오는 것이 나을 텐데. 적어도 소 태위께서 서량과 파촉을 정벌하시니 한동안은 별일 없을 것 아니오.”
“맞소. 아무래도 형주는……. 그…….”
맞장구치던 사내는 슬쩍 주변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는 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형주 자사가……. 아무래도 좀 불안하다는 소문이 있어서. 형주도 안전치 못할 수가 있소.”
“아니, 전 익주 자사도 그러더니, 황실의 피를 이었다는 사람들이 이 난세에 어린 황제를 지지하기는커녕 그 자리를 빼앗을 생각만 하니 파렴치하기 그지없구려!”
패기와 기개 넘치는 한탄에 사람들이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거니 받거니 하여 형주 자사 쪽으로 여론을 돌린 사내 둘은 슬쩍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장안의 여론이 술렁이며 퍼져 나갔고, 소식이 형주까지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안에 떠는 형주의 사람들이 하나둘 형주 자사를 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동백은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