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불청객이 동백의 저택을 불쑥 찾아왔다. 불청객이라고는 하지만 동백의 저택을 제집처럼 드나드는지라, 다들 오늘은 평소보다 늦었다는 반응 따위를 보일 뿐이었다. 태위의 저택을 그리 활보할 수 있는 상대가 누구겠나. 다름 아닌 여포였다.
평소보다 느지막이 퇴청한 동백은 별채에 여포가 술에 떡이 되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썹을 휘어 올렸다.
“행패를 부리진 않고요”
“행패를 부리시긴 했습니다만 그게 좀 평소와 달라서……. 곁에 사람을 두게 하지 말라 버럭 성을 내시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찾아뵙지는 못했습니다.”
리리가 동백의 옷시중을 들며 덧붙였다. 동백 저택의 하인들을 제 종 부리듯이 하며 술이 부족하니 주안상을 더 봐 오라 뭐라 했을 인간인데, 별채에 조용히 처박혀 뭘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니 의아함이 들기는 했다.
“잘하였습니다. 이지는 있답니까”
“네. 혀끝이 어눌하다 뿐이지, 의사소통은 명쾌하다 하였습니다. 간헐적으로 상공께서 언제 오시는지 확인도 했다 하고요.”
“그러면 가 보지 않을 수도 없네요. 이대로 무시하면 내일 아침 매정하다느니 뭐라는 패악이 장난 아닐 것 같고……. 술주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생겼네.”
동백은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는 리리의 귀밑머리를 귓가로 넘겨 주며 다독였다.
“말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먼저 주무세요.”
“상공께서 연적의 침실을 찾으시는데 소첩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나 저도 사직의 중요성을 아니, 상공을 붙들지는 않겠습니다.”
지금껏 참아 눌렀음에도 기어코 본심이 새어 나왔다. 결국 정실은 자신이라는 우월감과 그럼에도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질투가 뒤섞였다.
사직을 거론하는 리리의 답이 마치 후궁에게로 가는 황제를 배웅하는 황후 같아 동백은 쓰게 웃었다. 리리의 속내를 동백이 어찌 모를까. 하지만 리리는 끝내 가지 말란 말을 꺼내지 않았고, 동백 또한 그 마음을 앎에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동백은 리리의 뺨에 다정히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섰다. 집에 들어설 때보다 더 차가워진 밤바람이 선득하게 동백의 뺨을 스쳤다.
여포가 머무는 별채는 저택의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현이나 리리가 머무는 곳에서 제일 먼 위치였다. 우연이라 해도 마주치지 않게 격리하기 위해서였다.
별채는 거의 그의 전용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오가며 자신의 물건을 들여놓고 제 취향대로 꾸미니, 여포의 집보다도 더 안락했다. 별채 뒤로는 자그마한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여포는 그 대나무 숲을 퍽 좋아했다. 절개니 뭐니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끔 섬뜩하게 들린다는 이유에서였다.
동백이 별채에 들어서자 하인들이 살았다는 속내가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자리를 피했다. 동백은 성큼 별채 문을 지나치며 여포를 불렀다.
“여포.”
“아,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네. 세상천지 일을 소 태위 혼자 도맡아 하나”
침상에 누워 있던 여포는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투정 부리며 동백을 맞이했다. 확실히 말끝이 고꾸라진 것이 술을 어지간히도 마신 듯싶었다. 대장군이 되고 나서 부르는 사람이 많다더니……. 동백은 못마땅히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쏘아붙였다.
“내가 자네 일까지 도맡은 덕에 자네는 그리 술이나 마시며 나다닐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잠깐, 자네 꼴이 그게 무언가”
동백이 한창 잔소리를 늘어놓던 와중, 여포가 몸을 일으켰다. 동백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그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렇게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간 시선에는,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불쑥 솟아 존재감을 흉흉히 드러내는 그의 하반신이 잡혔다.
여포의 맨몸이야 수차례 봤고, 예전에는 제 몸 아래에서 세운 적도 있었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동백으로서는 그냥 이 상황이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당사자인 여포는 개의치 않는지 침상에 앉아 성을 내며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쥐어뜯듯 헤집었다.
“아……. 진짜. 몸에 좋은 거라 해서 먹었는데 그게 사슴 피를 술에 탄 거였을 줄은 몰랐지.”
“사슴 피”
“몰라”
“아니,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라…….”
“하긴 그러시겠지. 기루에서도 많이 쓰니까. 다들 소 태위 자빠트릴 생각에 몇 번이나 권했을 텐데 말이야.”
여포가 빈정거렸다. 사슴 피는 보혈과 더불어 정기(精氣)를 보태는 효능이 있다. 말 그대로 정력 증진제였다. 기루 같은 곳에서는 보통 다른 약을 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한 집안 자제에게 수상쩍은 약을 강권하긴 그러니 사슴을 잡았다는 핑계를 대며 넌지시 권하곤 했다.
동백은 갑자기 저를 비난하는 여포의 발언에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왜 자신이 문란하다는 듯 매도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여포에게!
가후에게는 여포와 대화가 통하느니 마느니 운운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당장 그 말을 취소해야 할 성싶었다. 여포가 하는 말의 흐름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동백은 그를 설득하는 대신 질책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아니, 그러는 자네야말로. 남이 주는 수상쩍은 걸 그렇게 덥석덥석 먹으면 어떻게 해!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독살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냐!”
“독살 같았으면 바로 입에 대자마자 뱉었지. 그리고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니까”
여포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잘못하다 제 제일가는 무장을 잃을 뻔한 동백으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럴 분위기인지 아닌지 여포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여포는 배신의 대명사였지만, 그가 배신을 한 만큼 많이 당하기도 했다. 애초에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놈이었으면 그만큼 배신당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술도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보다 우기는 게 심해졌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는 동백 제가 잔소리를 하나 마나 들어먹질 않을 것이다. 동백은 내일 여포가 술이 깨면 단단히 한마디 해 두리라 각오했다.
“하여간 잘못했으면서도 한마디도 안 지려고……. 그나저나 사슴 피가 원래 이렇게 즉각적인가”
계속해서 그의 아랫도리가 눈에 밟히는 게 성가셨던 동백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약을 탄 것도 아니고 그저 피일 뿐인데 이 정도로 효과가 좋단 말인가
여포는 자신의 각진 턱을 긁적였다.
“예전에도 먹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진 않았는데……. 술에 섞어 먹은 데다 아무래도 최근 강제 수절한 지 너무 오래돼서 더 약발이 잘 받는 모양이야.”
여포의 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있었던 동백은 홀로 의문스럽게 읊조렸다.
“강제 수절”
혼잣말이 아니라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여포가 바로 답했다.
“널 못 안잖아.”
“다른 여자는”
“널 못 안는데 다른 여자를 왜 안아”
여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오히려 당황하여 말문이 막힌 것은 동백이었다. 동백은 그제야 여포가 저에게 고백했던 이후로 다른 여자를 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여포가 곁에 여자를 두지 않은 지 꽤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집무실에서 방사를 치르는 일도 없다는 건 알았다. 여포의 수하들만 하더라도 동탁이 죽으며 여포가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게 아니냐 삼삼오오 모여 수군댈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렇다 하여 그게 금욕이라는 단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동백이 여포를 받아 준 것도 아니고, 딱히 정조를 지킬 관계도 아닐뿐더러, 동백이 여포에게 그걸 요구하지도 않았다.
동백과 여포의 맹세는 단순했다. 동백이 남자와 깊은 관계가 된다면 그 상대가 여포일 것, 그리고 여포는 그 약속을 대가로 제 일신의 무력을 넘겨주고 충성할 것.
어차피 동백은 당장 그에게 여자인 자신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당장이 무엇이냐, 어쩌면 평생일지도 몰랐다. 반면 여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안다 못해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방사를 치르는 인간이 아니던가. 저 인간의 차고 넘치는 정력에 대해 아마 장안에서 제일 잘 아는 게 동백일 터였다. 그런 여포에게 저 말고 다른 여자를 두지 말라니. 동백도 양심이 있었다.
동백을 좋아한다 말한 게 있으니 동백 앞에서 방사를 치르는 걸 보이는 게 머쓱해서 숨길 뿐이지, 알음알음 몰래 뒤에서 만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확히는, 의심조차 할 필요 없이 당연하다 여긴 것에 가까웠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마 그건 아닐 터였다. 거짓말을 해 봐야 동백이라면 금방 진실을 알아내리라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그것까지 염려하여 증거를 인멸해 둘 만큼 주변머리가 있는 놈도 아니었다.
만약 여포의 말이 사실이라면, 금욕한 지 2년 가까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마음이 급속도로 누그러졌다. 동백이 조금 미안해지기가 무섭게 여포가 그런 동백의 기색을 눈치채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참았는데, 칭찬은 못 할망정 혼내기만 하다니. 너무하구먼…….”
“그, 그건 미안하군.”
자기도 모르게 사과하긴 했지만, 뭔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동백 자신이 참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동백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날 찾아와 봐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잘 알 텐데.”
동백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동백의 말에 뭔가 심기라도 거슬렸는지, 그는 못마땅한 듯 동백을 쏘아보더니 갑자기 허리띠를 풀고 제 바지춤을 잡아 내렸다.
“뭐 하는 건가!”
갑작스러운 난잡한 행태에 동백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여포는 능숙한 손짓으로 제 것을 꺼내 쥐며 뻔뻔히 목청을 높였다.
“소동백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니 혼자서라도 풀려고 하는 거지.”
“아니, 지금껏 잘 참더니 그걸 왜 지금……. 나가서 해! 아니다, 내가 나가겠어.”
동백이 고개를 돌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사슴 피 섞인 술에 취한 여포에게 상식적인 응대를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다.
“참 비싸게 구는구먼. 그 잘난 낯짝 보여 주기라도 하면 어디가 덧나”
“내 기분이 덧나!”
“그 정도는 참아 봐.”
여포는 동백의 옆얼굴을 쏘아보며 거침없이 손을 흔들었다. 수치라는 걸 모르는 자라는 건 알았지만 참으로 스스럼없었다.
여포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억누르려 이를 악물었다. 지금껏 잘 참아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소동백과 같은 공간에 있으니 둑이 터지듯 억누른 충동이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가까이에 있지 않아도 그러했다. 그저 소동백이 제 시선에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번 고삐를 푸니 내달리는 것은 쉬웠다. 그나마 소동백의 팔을 잡아 제 품에 끌어안지 않을 정신머리 정도는 있었다. 사실 거기에 자신의 남은 자제력을 전부 끌어 쓰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여포의 지금 이 뻔뻔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동백은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니지, 쟨 원래 저런 새끼였지…….’
여포의 말대로, 2년간 조용히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저놈은 동백이 보는 앞에서도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방사를 나누던 놈이었다. 저 정도야 거리낄 것도 없을 터였다.
나가려 했는데 말을 섞다 보니 저도 모르게 붙들렸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동백은 바로 방을 박차고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가 무섭게 여포가 동백의 뒤에 대고 바락바락 외쳤다.
“너 나가면……. 따라붙을 거야. 어 내가 꼴이 이렇다고 걷지 못하는 줄 알아 내가 아랫도리 덜렁덜렁 흔들면서 너 따라가는 꼴 보여 주고 싶으면 한번 나가 보든가.”
“미쳤어”
“지금 좀 그런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