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372)화 (372/522)

여포는 동백이 그런 편지 따위 받기 싫다고 할 줄 알았는지, 동백의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냉큼 말을 돌렸다.

“그 명단에 있는 자들이 대장군인 나를 자꾸 꾀어내고 나에게 수를 쓰니, 그건 소동백 자네의 정권을 어지럽히려는 수작 아니겠는가.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내가 흔들릴 리는 없지만. 흥, 하여튼 심보가 새까만 놈들이니 자네가 미리 알아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최대한 빨리 준비한 것일 뿐이야.”

동백은 명단을 훑었다.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생각보다 내용이 알찼다. 상대가 누구와 친분이 있는지, 언제 만남을 제안했는지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해독할 만한 가치는 있군.’

내용을 암기한 동백은 다시 곱씹어 보더니, 어지간하다는 듯 여포를 바라보았다.

“이걸 또 기억을 하고 있었나 보아하니 꽤 오래전부터 적힌 모양인데.”

“날 이용해 먹으려는 새끼들인데,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지. 그래야 갚아 주니까.”

따지고 보면 이용당해 주기는커녕, 그들에게 거하게 대접만 받아먹었는데도 여포는 의도가 불손하면 다 소용없다는 주장을 들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도 없고 신의도 없는 것이, 태평성대였다면 탐관오리가 될 자질이 농후해 보였다.

‘아니, 그런 시대면 저놈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을 테니 끽해야 도적이나 되었겠지.’

여포라면 녹림호걸(綠林豪傑)이 되어 산채를 호령했을 것이다. 삼국지가 아니라 수호지 속 등장인물이었을 거라 생각해도 썩 잘 어울리긴 했다. 동백은 그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며 나직이 킥킥대었다.

“뭐야, 왜 웃어.”

“자네 말이 웃겨서.”

“흠. 딱히 농담을 하진 않았는데.”

“농담이 아니라서 웃긴 말이었어.”

동백이 정색하며 대꾸하니 머쓱해진 여포는 제 말을 되짚으며 턱을 긁적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동백이 제 말의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낀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동백은 생각에 골몰했다. 여포의 양심 없음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들이 동백의 정권을 어지럽히려는 놈들이라는 말에는 동백 또한 동의했다. 따지고 보면 여포에게 알랑방귀 뀌던 놈들 모두 마음속 한편에 외척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려는 흉악한 심계를 품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를 좀먹는 벌레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들도 여포가 자신들에게 신의를 지킬 거라고는 그리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빨리 뒤통수 칠 줄은 몰랐겠지만, 줄을 댄다는 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나름 몸을 사리기는 했다. 그들이 대놓고 행동한 것이라고 해 봐야 대장군인 여포에게 한턱낸 것뿐이니 트집 잡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꼭 트집 잡을 필요는 없지.’

동백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여포가 대장군이 되어 권력의 핵심층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 여포’다. 여포에게 줄을 대려 하다니. 심지어 제 딸자식을 안기면 여포가 책임질 거라고 생각한 것도 우스웠다. 그 말인즉슨 여포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고, 동탁 시절 소외된 이들이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다른 세력에 합류하지 않고 동백의 정권 밑에 붙어 있는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헌제의 정권을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다른 세력에 몸을 의탁할 만큼의 인맥이 없거나.

그렇다면 동백이 적당히 중용할 뜻을 보이면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내달릴 것이다. 달리 한눈팔 곳이 없으니 얼마나 필사적이겠는가.

안 그래도 때마침 사람이 필요하던 찰나였다. 동백의 눈에는 이 명단이 인력 사무소 명단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여기 이름이 있는 이들을 뽑아 측근에게 시키기는 위험하나, 아무나 보내자니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는 일을 시킬 셈이었다.

딱히 충성심을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동백에게 오랫동안 성의를 보이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아마 적당히 자리 잡았다 싶으면 또 저들은 분명 딴생각을 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백으로서는 그 단기간에 그들을 이용해 먹을 만큼 이용해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을 적대하여 공격한 것도 아니니 굳이 그들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 때문에 어제와 같은 곤궁한 일을 겪었으니 사감이 아주 없다 할 수는 없었지만, 그거야 앞으로 그들이 떠날 여정의 험난함으로 대신할 셈이었다.

하여간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어제의 일과 별개로 오늘 여포의 행적은 칭찬할 만했다.

“자네 덕에 또 한 차례 정리할 수 있겠는데. 이들 명단은 내 중히 쓰겠네.”

동백이 그리 말하며 여포의 공을 치하하자, 여포의 입꼬리가 채신머리없이 올라가며 만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역시 소동백은 쓸모 있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아까 실없이 웃은 것도 내가 건넨 명단이 도움이 되어서인 게 분명해. 하여간 그러면 그렇다 말하지. 괜히 내가 웃긴 말을 했다는 핑계나 대며 쑥스러워하기는.’

여포는 소동백이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렸다. 하지만 그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기에, 동백이 여포의 착각을 정정해 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런 사특한 모임 같은 게 있으면 제때제때 알려 줘야겠구먼. 하긴, 아무리 까마귀 놈들이 날고 길어 알려 줘 봐야 사람만 못한 법이지.’

여포는 그리 생각하며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그의 기분만큼 좋지는 못했다.

“좋아. 그러면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아직도 골이 울려.”

여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평소였다면 한 사나흘 숙소에 두문불출하며 숙취를 풀었을 터이나, 오늘은 급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명단은 사실 소동백을 만나러 올 핑계였다. 오늘 소동백의 얼굴을 안 보면, 한동안 소동백이 자신을 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굳이 짐승의 본능이니 뭐니 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소동백이 보였던 결벽적인 태도를 보건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런 거에 내가 속을 리 없지. 적어도 일주일간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내 얼굴 안 볼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어.’

그래서 소동백이 미처 방비하기 전에 쳐들어왔다.

어제와 같은 일이 있은 직후, 시간을 끌어 봐야 어색해지기만 할 뿐이다. 소동백은 생각이 많은 이라 시간을 길게 줘서는 안 된다. 아무 생각 못 하게 먼저 몰아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건 명백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소동백이 절 칭찬하지 않았던가. 이미 저 명단에 있는 놈들을 어떻게 굴릴지 생각하느라 어제의 일은 반쯤 잊은 얼굴이었다.

‘이게 전부 초선 그 계집애가 내 얼굴에 물을 뿌려 준 덕이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소동백을 이리 급하게 만나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 계집이 두 팔 걷어 올리고 저에게 물을 뿌릴 정도면, 어제 일에 소동백이 단단히 심통 났다는 뜻이었으니까.

초선은 자신의 행동이 여포의 엉덩이를 걷어차 준 줄로만 알지, 그렇게 걷어차인 여포가 소동백의 품으로 굴러떨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오늘 소동백이 집에 가서 제가 명단을 건넸다는 이야기를 하면, 초선 그 계집도 알게 모르게 분통을 터트릴 테지. 그 꼴은 생각만 해도 고소했다.

여포는 제 잔머리가 제대로 먹힌 것을 뿌듯해하며 궁을 나섰다. 숙취로 무거운 머리와 달리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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