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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386)화 (386/522)

“그래. 곽공은 손해 보는 짓을 하기 싫어하니 우리가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선뜻 장막의 손을 잡기 저어되겠지. 문약의 계책이 옳다!”

순욱의 말에 납득한 조조는 그리 말하며 바로 곽공을 환영하라 명했다. 단단히 닫혔던 문이 열리며 조조가 그를 대대적으로 환대하니, 곽공은 그 배포에 감탄했다.

‘정말로 나를 초대하다니, 조조는 내가 돌연 마음을 바꿔 자신을 공격할까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조조는 곽공을 후히 대접하며 친근히 대했다. 순욱의 짐작대로 조조군의 전력을 살피러 온 곽공은 조조군의 얼굴에 두려움이 없는 것을 눈치챘다. 조조에게 숨겨진 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조는 승냥이 같은 작자요, 원한을 잊지 않지. 서주의 사례도 있지 않던가. 승패가 확실치도 않은데 괜히 척질 필요는 없음이야. 이번 전투에는 황급히 끼어들지 말자.’

그리 생각한 곽공은 조조에게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을 건네고는 그대로 군을 물렸다. 도와주겠다며 수만 군사를 데려온 명목이 무색한 꼴이었으나, 조조군 또한 곽공이 자신들을 정말로 지원할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곽공의 군사가 다시 예주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조군은 한시름을 놓았다.

그렇게 조조군이 안도하기가 무섭게 여포와 장막 군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미리 소식을 들어 수성 준비를 단단히 한 조조는 견성을 둘러싼 수만 군사들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범인이라면 의지가 꺾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성안에 틀어박혀 현실을 도피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조조는 회피 대신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 조조의 눈이 적군을 샅샅이 살폈다.

여포의 깃발뿐만 아니라 익숙한 장막의 깃도 보였다. 서주에서 소동백군과 싸우면서도 연주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 애를 썼는데, 정작 연주 호족들이 연주로 소동백군을 끌어들인 꼴이라 조조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놈들…….’

조조는 욕설을 뇌까렸다. 자신이 배신한 것도 아니고 배신을 당하다니.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조는 계속해서 적군을 훑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폈으나 소동백의 깃발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소동백이 일부러 참전을 숨긴 것일까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이유가 없었다. 조조는 나직이 탄식하며 이를 갈았다.

‘한번 나를 상대해 보니 직접 올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지 하! 오만하구나, 소동백!’

소동백도 없는 군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 소동백이 참전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조조의 독기에 불을 지폈다.

적진에 진궁이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조조의 성정에 더 길길이 날뛰었을 터이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대한 여포군 사이에서 가느다란 파 뿌리 같은 진궁의 존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성벽에 우뚝 선 조조의 기백이 어찌나 웅혼한지, 성을 둘러싸고 있는 여포 또한 조조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흥. 기고만장해하기는.”

여포는 코웃음 쳤다. 아무리 기세가 대단해 봤자 틀어박힌 놈의 헛된 저항일 뿐이다. 이대로 조조를 무찌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공성 부대, 앞으로!”

여포의 외침과 동시에 준비된 거대 공성 탑과 투석기, 그리고 충차 부대가 진의 앞으로 나섰다. 십수 명의 궁병과 쇠뇌병을 태운 공성 탑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조조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수성을 위한 방어용 무기들과 궁수들이 성벽에서 접근하는 공성 부대를 겨누었다. 이내 고함과 함께 돌덩이와 화살들이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루하면서도 격렬한 공성전의 시작이었다.

  

여포는 견성을 함락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이를 악물고 항전하는 조조군의 수비를 도무지 뚫을 수가 없었다.

조조 또한 동백과 마찬가지로 그의 약삭빠른 꾀와 매끈한 외모 때문에 종종 평가절하될 때가 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장수였을뿐더러 전쟁에 능했다. 간계에 익숙하고 시야가 넓은 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꼼꼼하기까지 한 그가 전력으로 수성에 임하니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았다.

“아, 쉽지 않구마안…….”

여포는 짜증을 내며 이를 갈았다. 여포군이 돌을 던지면 돌을, 화살을 쏘면 화살을 쏘아 보냈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은 안 그래도 없는 여포의 인내심을 바짝 마르게 하기 충분했다. 참지 못한 여포가 기어코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성문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천하의 여포도 상대할 인간이 있어야 방천화극에 피를 묻히든 뭘 하든 하는 법이다. 적군이 문을 닫고 농성할 뿐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으니 여포는 상대를 도발하기 위한 목적 반, 진심 섞인 화풀이 반으로 있는 욕 없는 욕 전부 끌어모아 조조를 모욕했다.

하지만 꽉 닫힌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여포는 배알도 없는 놈이라며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이쯤이면 조조가 아무리 화를 참아 눌러도 조조 밑의 부하들이 발끈해서 뛰쳐나올 만도 한데 잠잠한 걸 보니 다들 기강이 바짝 들어 있는 모양이다.

여포의 눈치를 보며 장료가 제안했다.

“군사들이 많이 피로해합니다. 공성 무기들도 멀쩡한 것이 드물고요. 잠시 근처의 복양으로 군을 물린 뒤 재정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수성하는 것보다 공성하는 쪽이 피로도가 높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장막군은 진즉 후퇴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진류로 돌아간 뒤였다. 여포군만이 남아 견성의 문을 두드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군사 한 명 숨어들어 갈 틈도 없이 단단하니 조조군 사이의 이간질도 불가능해 보였다. 진궁은 혀를 찼다.

하지만 여기서 벌써 포기하고 물러서기엔 상대 또한 타격을 많이 받아 전력 손실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상대의 전력을 가늠해 본 진궁은 장료의 주장을 만류했다.

“어차피 연주 대부분이 등을 돌렸을뿐더러 원소 또한 북쪽의 일로 바쁘니 저들은 고립무원이요, 지원을 부탁할 이가 없습니다. 증원이 불가능할 테니 조금만 더 버티며 압박하면 결국 저들은 무너질 것입니다.”

진궁의 말은 조조군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조조라 하여 자신들의 그런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이대로라면 안 되겠다 싶었던 조조는 꾀를 내었다. 바로 야밤에 어둠을 틈타 몰래 군사를 내보내고, 낮에는 지원군인 척 들여보내기를 반복하여 증원이 계속되는 양 착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인원을 차출하여 성벽에 배치된 인원을 점차 늘리고 깃대를 어지러이 세우니, 군사들이 성벽을 빽빽하게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조에게 지원군 따위는 없다 했었지. 그러면 저게 어디서 온 지원군이란 말이냐!”

여포가 성을 내며 성벽 위를 손가락질하니, 진궁 또한 얼떨떨해할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진궁이 곱씹을 새도 없이 조조군이 북을 치며 이리저리 소란스럽게 구니, 여포군의 사기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여포군은 복양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어졌다. 후퇴하는 와중에도 진궁은 누가 조조에게 지원을 보낸 건지 거듭 곱씹었다. 그러던 찰나, 깨달음이 진궁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차, 조조에게 속았구나!”

하지만 이미 군은 복양으로 물린 뒤였으니 후회해 봐야 늦었다. 진궁은 자신의 추측을 여포에게 말하려 달려갔으나 때가 좋지 않았다. 하필 여포가 자신이 후퇴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고 있던 와중이었다.

“하……. 돌아 버리겠네. 소동백한테 이 꼴을 어찌 전하란 말야!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면서 출발했는데! 후퇴애 이 여봉선이 후퇴애애애”

여포가 팔다리를 휘적일 때마다 방 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다. 어찌나 화가 치밀었는지 여포는 옆에 있던 창 다발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반으로 뚝 분지르고 바닥에 패대기쳤다. 창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 개였는데, 그걸 젓가락 분지르듯 하는 모습에 기가 질린 여포의 부하들은 슬금슬금 여포에게서 멀어졌다.

여포는 툭하면 성을 내는, 인내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작자로 진궁이 만나 본 이 중 제일가는 다혈질이었다. 진궁이 여포의 밑에 온 뒤로만 여포가 짜증을 낸 게 수십 번이니 진궁 또한 이제 슬슬 여포의 행패에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오늘처럼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를 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여포의 기세에 압도당한 진궁은 차마 자신이 조조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진궁의 입이 딱 다물렸다. 이대로 잠깐 여포가 진정할 때까지 빠져 있을 셈이었다.

“딸꾹!”

하지만 진궁 본인이 도와주지를 않았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딸꾹질에 깜짝 놀란 진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여포의 매서운 시선이 진궁에게로 향했다. 여포는 짐승 같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 전쟁을 재촉했지. 제 손으로 풀무질을 했으면 불씨라도 제대로 살려 봐야 할 거 아냐! 물을 끼얹기나 하고! 쓸데없는 놈!”

“아이고!”

여포의 발이 진궁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진궁의 몸이 바람 앞의 낙엽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진궁…….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얼마나 데굴데굴 굴러갔는지, 한발 물러서 있던 고순과 장료 근처까지 가서 엎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여포군의 책사인데 무시할 수는 없다. 고순과 장료가 냉큼 진궁을 부축했다.

여포는 그런 이들을 흘겨보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고는 쿵쾅쿵쾅 거친 발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여포의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이라는 핑계를 들며 병사들을 두들겨 패러 나간 게 분명했다.

오로지 여포의 돌발적 행태에 아직 익숙지 않았던 진궁 혼자만이, 밖에 나간 여포가 돌연 칼을 들고 뛰쳐 들어와 역시 진궁 제 목을 베어야 성이 풀리겠다며 칼춤을 추진 않을지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었다. 장료는 진궁을 다독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이 상황이 진 참모 때문이 아님을 장군 또한 잘 아실 겁니다. 그래도 장군께서 화가 그리 심하시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 저게”

진궁이 어안이 벙벙해하며 되물었다. 장료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진궁은 고순을 바라보았으나, 고순 역시 장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장료가 덧붙였다.

“정말 화가 나셨으면 발로 차는 게 아니라 방천화극을 꺼내 드셨겠지요. 게다가 장군께서 진심으로 걷어찼으면 참모께서는 이리 못 걸어 다니십니다.”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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