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가 누각의 3층에서 몸을 날린 순간 조조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단 말인가 저게 인간인가
하여튼 여포의 눈에 띄었으니 한시바삐 서둘러야 했다. 저 미친개는 분명 앞뒤 안 가리고 자신을 쫓을 것이다. 복양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붙들리면 제가 한 고생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여포군이 당황하는 틈을 타 조조는 준비된 말을 향해 달려갔다.
탈출로에도 불이 옮겨붙은 듯 불길이 거셌다. 조조는 아랑곳 않은 채 불더미를 뚫고 빠져나왔다. 하지만 너무 서둘렀는지, 아니면 불길에 말이 겁먹었는지 조조가 말에서 떨어졌다.
“큿!”
“주공!”
전위가 재빨리 조조를 부축해 다시 말에 오르게 했다. 정신없었던 조조는 제가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은 것도 모른 채 고삐를 쥐고 말을 몰았다. 전위는 그런 조조를 호위하며 내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이렇게까지 복양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 차라리 이 기회에 복양을 치는 것도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복양성의 상황이 어지러운 덕에 여포군이 정신없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곳이 우리에게도 유리한 전장은 아니다. 성안같이 막다른 곳에서 여포군과 붙어 이기기는 쉽지 않아.”
여포를 제외하고도 여포군의 개개인의 무력 또한 대단했다. 게다가 성벽은 이미 여포군이 점거하고 있으니, 괜히 쳐들어갔다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여포를 꾀어내어 우리에게 유리한 곳에서 요격하는 것이 차라리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여포만 무찌르면 복양이고 뭐고 그대로 우리 손으로 들어올 테니까.”
여포가 쉽게 도발되었더라면 조조 또한 이런 수까지 쓰지는 않았을 터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참았던 모양인데, 아까 본 꼴을 생각하면 분명 여포는 바로 자신을 뒤쫓을 것이다. 진궁은 머리가 돌아가니 부랴부랴 지원군을 보낼 테고……. 하지만 그런 군대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겠는가
“그래도 주공께서 직접 나서실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내가 나서야 확실하게 도발이 됐겠지. 지금 우리는 일말의 변수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야.”
조조는 결연히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조도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았다. 까닥 잘못하다가는 근거지를 전부 빼앗기고 방랑하게 될 처지 아니던가! 군주가 아닌 객장 신세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치가 떨렸다.
조조로서는 연주를 확고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미끼로 삼는 것도 아랑곳할 것이 없었다. 애초에 조조가 복양성을 공격하며 난리 법석을 피운 것 또한 여포의 시선을 최대한 자신에게 붙들어 두어 시간을 끌기 위한 속임수였다.
조조가 정말로 노린 곳은 복양이 아니라 제음군의 핵심인 정도(定陶)였다. 견성의 남쪽에 있는 정도는 장막의 근거지인 진류의 동쪽인 만큼 장막을 공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복하여야 하는 요충지였다. 장막을 공격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장막이 견성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정도를 공략해야 했다.
그래서 조조가 앞서 나서서 복양을 공격하는 척하며 시선을 빼앗는 사이, 하후돈과 정욱은 군을 이끌고 정도로 향했다. 상대가 여포도 아니고, 제음 태수인 오자(吳資)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자가 지키는 성의 수비가 견고하여 좀처럼 공략할 수가 없다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도 끝내 정도를 제압했다. 조조는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바로 복양에 불을 질렀다. 자신들이 정도를 취했다는 사실을 여포군이 최대한 늦게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제음군 쪽으로 도망쳐도 여포군은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여포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눈앞에 확고하게 그리는 이상이 있는 한, 화끈거리는 손바닥의 고통 정도로는 조조를 머뭇거리게 할 수 없었다.
여포는 조조의 흔적을 되짚어 조조가 갔으리라 예측되는 곳을 향해 군을 몰았다. 적토마는 그 어떤 말보다도 날쌨지만, 여포 홀로 조조군을 추격하다 보니 결국 뒤따라 온 진궁과 장료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어떻게 군사를 추린 건지, 진궁은 1만이나 되는 군사를 데리고 왔다. 참으로 재주도 좋았다. 여포를 알아본 진궁이 여포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다급히 그를 불렀다.
“여 장군!”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 장군!”
“에잇, 귀찮게!”
못 들은 척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거듭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여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여포는 진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귀를 막으며 외쳤다.
“조조 놈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안 돌아갈 거다!”
여포가 저리 말할 줄 알았던 진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쯤 되면 더 이상 말려 봐야 역효과뿐이라는 걸 진궁도 알았다. 진궁은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조조가 저렇게까지 장군을 도발하는 데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여 장군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군사를 이끌고 가시지요.”
“흠…….”
여포 또한 진궁의 말에 내심 수긍했다. 아까는 혈기가 뻗쳐 대뜸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적토마를 이끌고 달리는 동안 열이 올랐던 머리도 많이 식었다. 아무리 여포가 천하제일에 홀로 만 명을 능히 상대한다고는 하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쪽수와 간계 앞에는 결국 장사 없는 법이었다.
여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자연스레 진궁이 몰고 온 군사와 합류했다. 그제야 진궁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조조군이 복양을 치며 보여 주었던 군사의 수를 생각하면, 진궁이 이끌고 온 만 명의 군사는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지금 그들이 가는 길에 조조군이 함정을 파 놨다 해도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능히 대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포와 진궁은 조조군의 흔적을 되짚어갔다. 그들은 이내 연주 산양군의 동민현에 다다랐다. 논밭이 많아 길이 좁다 보니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가기 쉽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조조의 군사가 쉬고 있는지 방만히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림잡아 헤아려 보니 그 수가 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좋아. 바로 요격하여 조조를 사로잡자.”
여포는 잘되었다는 마음에 말을 몰고 조조군을 공격했다.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여포의 모습에 조조군은 허둥지둥하며 도망치는 듯했다. 진궁이 여포의 뒤에 대고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그놈의 잔소리!”
하지만 조조가 앞에 있다 생각하니 그전만큼 화가 나지는 않았다. 진궁의 잔소리 정도야 껄껄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여포는 히죽 웃으며 우왕좌왕하는 조조군을 짓밟았다. 그의 방천화극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여포군은 뒤늦게 그런 여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길이 좁다 보니 바로 뒤에 바짝 따라붙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여포는 무리에서 떨어져 조조군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조조군 또한 나름 격렬하게 응전하니, 두 무리가 이리저리 뒤섞여 어지러워졌다.
“조조 놈은 어딨느냐! 또 쥐새끼처럼 숨었느냐!”
여포는 조조군을 학살하는 와중에도 두리번거리며 조조를 찾아 외쳤으나, 조조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전투가 무르익은 찰나, 갑자기 여포군을 향해 어디서 쏘아진 것인지 모를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여포군이 당황하기가 무섭게 논밭 근처 제방 밑에서 복병이 일제히 둑 위로 올라 여포군의 허리를 공격했다. 기다란 창이 아래에서부터 여포군을 찌르니 보병은 여지없이 몸통이 꿰뚫렸고, 기병 또한 말이 공격당하니 그대로 낙마하였다.
제방 위에 있던 수만큼의 군사들이 여포군을 공격했다. 조조군의 역격(逆擊)으로 여포군이 쭉쭉 밀고 나가던 전황이 일시에 뒤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여포의 뒤를 쫓아 합류하려던 군사들이 우후죽순 고꾸라지니, 이내 여포 홀로 조조군 사이에 고립되었다.
하지만 여포는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껏 여포가 홀로 뛰쳐나가 적들 사이에 고립된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했다. 이만한 일로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는 오만한 마음도 있었다.
“겨우 이 정도 매복으로 날 상대하려 한 것이냐!”
여포의 쩌렁쩌렁한 호령이 공기를 터트리듯 퍼져 나갔다. 여포의 팔뚝이 크게 부풀더니, 무거운 방천화극을 나무막대기처럼 휘둘러 일격에 수 명의 군사를 베었다. 적을 보는 여포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적토마 또한 주인의 기세를 읽었는지 희번덕이는 눈이 흉흉했다. 적토마의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며 땀 거품이 났다. 누가 적토마를 말이라 보겠는가. 맹수와도 같은 기세가 어찌나 살벌했는지 여포가 차라리 호랑이를 타고 있는 게 덜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 한번 해 봐라! 내가 바로 여봉선이니!”
여포는 그리 외치며 고립된 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날뛰었다. 군의 우두머리가 홀로 남으면 모두 공을 세우기 위해 덤벼드는 법이건만, 여포와 맞닥트린 조조군은 정반대였다.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심장은 정반대의 소리를 내질렀다.
여포가 보여 주는 무용은 단순히 뛰어난 무장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전장의 분위기가 여포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고함도, 날아오는 화살과 내지르는 창칼의 날붙이도. 그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힘은 인간을 벗어난 경지였다.
매복으로 잠시 승기를 잡았으나 여포의 무력 아래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여포를 어찌하지 못한 조조군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건 조조군의 패배로 이어졌다.
하지만 여포군도 타격이 컸다. 1만의 군대와 2천 명의 군사가 맞부딪쳤다. 조조군이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여포군은 반 토막이 났으니 이걸 승리라 불러도 될지가 의문이었다. 더불어 조조군에는 그럴듯한 장수도 없었다. 여포는 짜증을 곱씹으며 바로 제 측근들의 생존을 확인했다.
“장료!”
“네!”
“진궁!”
진궁의 이름을 불렀으나 잠잠하기만 했다. 여포는 눈살을 찌푸리며 엄지로 제 목을 긁적였다.
“죽었나”
“아이고, 여기, 여기 있습니다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한발 늦게 바닥에서 들렸다. 여포와 장료가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보니, 진궁이 엉거주춤한 꼴로 제방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혼란 속에 굴러떨어졌던 모양이다.
여포는 진궁이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도 힘들게 기어오르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며 감탄했다.
“용케 살아 있었군. 생각보다 명이 긴데.”
“제, 제가 함정, 함정이 있을 거라 몇 번이나…….”
진궁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여포는 진궁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며 귀를 후볐다.
“무슨 함정인지 정확히 말했어야지.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하라. 이건 나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뻔뻔한 그 작태에 진궁은 입이 바짝 마르고 속이 탔으나, 방금 전에 봤던 여포의 무용을 생각하면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홀로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작자에게 함정이라느니 조심해야 한다느니 하는 제 말이 들릴 리가 없겠지. 강자가 약자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척 드문 경우였다.
진궁이 시무룩해하거나 말거나, 여포는 군을 추스르며 혀를 찼다. 진궁과 장료가 무사한 건 다행이었지만 군의 손실은 뼈 아팠다. 여포가 아무리 저 홀로 수백 병사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과 군사 수의 중요성은 별개였다.
군을 재정비해야 할 텐데, 생각보다 멀리 나섰던지라 고순이 지키고 있을 복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근처의 근거지에서 군을 추스르는 것이 좀 더 나을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제음 태수 오자는 장막과 손을 잡아 조조와 적대한다는 표명을 내세웠다. 그렇다면 여포군이 가도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여포군은 정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