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왜? 왜지? 소 부인이라면 당연히 화내야 하는 거 아닌가?”
손권은 머리를 싸맨 채 의아해했다. 아직 풋풋한 13살 나이로는 남녀 간의 오묘한 관계를 짐작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을뿐더러, 당사자인 감녕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으니 손권이 진실을 아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답답함은 손권 본인이 홀로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 * *
그렇게 장안이 동백의 화국공 취임으로 들썩이는 동안, 연주는 매일 매일 벌어지는 전쟁으로 피폐해져 갔다. 여포와 조조가 맞붙기를 수차례. 여포가 기어코 연주를 복속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메뚜기 떼의 피해에도 아랑곳 않고 동백이 계속해서 물자와 사람을 보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전쟁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한 숫자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동백은 전해진 승전보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슬슬 여 장군을 불러와야겠군. 때가 됐어.”
“조조를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으시고요? 조조가 청주까지 내몰린 지금 쉴 틈을 줘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조조를 끝장낼 기회입니다.”
동백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가후가 바로 반박했다. 가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연주를 잃은 조조가 기주도 아니고 바로 청주를 공략해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일찍부터 준비해 둔 계략이었는지 단번에 성공했다!
청주자사는 공손찬의 휘하에 있던 전해란 자였는데, 그가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을 지원 간 틈을 타 청주를 복속했다. 가후가 끈질기기 짝이 없는 약삭빠른 놈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동백 또한 아무 생각 없이 군을 물러 조조에게 살 틈을 내어주는 건 아니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 않던가. 아무런 기반도 남지 않게 된 조조가 과연 나에게 항복을 하겠는가, 아니면 원소의 밑으로 들어가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겠는가?”
“조조를 죽이면…….”
“물론 조조를 죽이고 홍농왕의 신변을 확실히 얻어 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테지만, 홍농왕이 다른 세력으로 빠져나가면 또 문제지.”
“태위님께서는 너무 걱정이 많으십니다.”
가후가 툴툴거렸으나 동백은 빙긋이 웃고 말 뿐이었다. 계산과 이성으로는 충분히 해 볼 만한 견적이었으나, 동백은 몇 번이고 운명이라는 비이성과 비논리 앞에서 고배를 마시지 않았던가.
‘여왕을 생각하면 절대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름이 터지지는 않을 거야. 특히 내가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장안에 있다면 더더욱.’
확실히 해 두기 위해서는 앨리스인 동백이 직접 출전하는 것이 제일이었으나, 화국공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친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조가 원소 밑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면, 원소가 서쪽의 패권을 완벽하게 장악할 테지. 그건 전혀 좋지 않아.”
원소와 조조가 줄다리기를 하면서 유비가 그들 사이의 변수로 존재하는 지금이 딱이었다.
특히 유비는 막 서주의 세력으로 급부상한 시점이 아니던가. 유비로서는 홀로 독불장군처럼 버틸 수는 없을 테니 다른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자신이 버리고 나온 공손찬보다는 서주자사로 인정해 준 원소와 함께하게 될 게 분명했다.
동백이 노리는 건 유비가 본격적으로 원소, 조조와 동맹을 맺는 그 순간이었다. 그 시점에서 조조가 원소의 객장이라면 그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지 않을 테지만, 하나의 세력으로 원소의 동맹과 같이 취급된다면 상황이 달랐다. 원소와만 손을 잡고 조조를 배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원소와 조조, 유비 셋이 손을 잡는 그림이 그려지겠지.
그렇게 되면 서주민들은 조조와 동맹을 맺으려는 유비를 과연 어디까지 믿고 따를 것인가?
조조는 서주를, 유비의 근간을 분열시킬 수 있는 핵심이었다.
동백의 설명을 들은 가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안색이 어두웠다.
“그래도 대장군을 장안으로 부르는 건 회의적입니다. 조조는 분명 연주를 수복하려고 할 텐데……. 대장군께서 연주에서 든든하게 자리 잡고 계셔 주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어디 여 장군이 수성하고 있으라 해서 정말로 얌전히 수성만 하고 있을 인사인가. 괜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겠다 날뛰다가 애써 획득한 연주를 날려 먹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한숨 쉬듯 덧붙인 동백의 말에 가후는 나직이 탄식했다. 여포의 성격이 수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건 가후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못내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가후는 조심스레 희망 사항을 덧붙였다.
“대장군께서 성정이 그러시기는 합니다만 태위님 명은 잘 듣잖습니까.”
“자네 방금 목소리가 떨렸어. 본인도 그렇게까지 확신하지 않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닐세.”
심드렁히 한쪽 손으로 턱을 괸 동백은 가후의 헛된 기대를 무참히 꺾었다.
여포가 동백의 말을 잘 듣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가 듣고 싶은 부분만, 자기 듣고 싶은 방법으로만 들었다. 여포 본인은 자기가 소동백 명이라면 배도 깐다며 억울해할 테지만, 오로지 여포 본인만 부정할 뿐 세상 모두가 동백에게 동조할 터였다.
옆에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시해 주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발 행동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러니 여포 홀로 저 먼 연주에 두는 것이 마음 편할 리가 있나. 동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겠다 나서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난 진심으로 여 대장군이 수성 중에 과연 그 누가 자신을 공격하겠냐며 큰소리치고는 술을 궤짝으로 쌓아 두고 마시며 연회를 벌이다가 지키던 성까지 같이 말아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
마치 과거에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동백의 말이 가후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가후는 침음을 흘렸다. 동백은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여 장군은 연주에서 조조를 몰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어. 그에게 이 이상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야.”
가후는 지금 여포라는 날 선 검으로 잔뜩 적을 베어 낸 경천동지할 위력에 취해 잠시 잊고 있는 모양이지만, 저 검에는 반동이 있었다. 잘못하면 칼을 쥔 이도 위험했다.
동물을 기를 때는 적당한 보상을 적절한 시기에 해 주는 것이 중요했다. 잘한다며 계속해서 방치해 두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백은 연주에 보낼 적합한 이가 누가 있나 명단을 눈으로 훑으며 읊조렸다.
“차라리 수성과 내정에 능한 이를 보내 연주를 복속시키는 게 나을 듯하네. 지금 연주에는 그럴듯한 호족이 없으니까.”
“……장막과 그 일족이 그리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가후가 혀를 찼다. 본디 계획대로라면 연주는 적당히 장막의 손에 쥐여 놓고 있다가 나중에 안정되면 그를 쓱싹하고 재분배할 셈이었는데, 이번 전쟁에서 그리 죽어 나갔으니 생각해 둔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장막의 죽음은 정말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에 여포와 연계하여 양동 작전으로 조조를 몰아넣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도권을 내어 준 것을 내심 못마땅해했던 장막은 여포에게 휘둘리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자신은 소 태위가 임명한 적법한 연주자사이자 연주 호족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다 하여 대놓고 자신이 주도권을 갖겠다 말할 용기 또한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여포의 명령을 듣는 척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른 곳을 공격하곤 했다. 그러니 손발이 맞지 않아 조조에게 활로를 내어 주기가 일쑤였다.
그런 불협화음을 조조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장막과 여포 사이의 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조조는 그 틈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조는 장막의 동생 장초와 여포 양쪽을 동시에 공격하는 척했다. 당연히 장막은 장초를 돕기 위해 군을 몰았다.
물론 여포를 공격하는 건 거짓이었다. 조조의 전력 대부분이 장초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장막은 장초를 둘러싼 조조의 군사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는 별생각 없이 장초를 지원하러 갔다.
그렇게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조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결국 장막은 길목에 파 둔 조조의 함정에 빠졌고, 그렇게 어지러운 난전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형의 죽음에 대해 모르는 장초는 장막의 합류를 기다리며 여유를 부리다가 조조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고 만다. 그는 필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이 함락당하고 자살하게 되는데, 그렇게 장막의 일족은 조조의 손에 멸족되었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동백과 가후 둘 다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차마 전령이 있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욕설이 시선을 타고 서로에게 전해졌다. 이심전심이라. 멍청한 놈들 까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쿵짝이 잘 맞는 군신은 그렇게 장막을 욕했다.
“여 장군과 손발만 잘 맞췄어도, 아니, 조금이라도 여포와 정보를 나눴더라면 그런 뻔히 보이는 함정에 속아 그리 허무하게 일가가 멸족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전부 끝난 일이지……. 아무튼 여 장군은 장안으로 불러오는 것으로 하겠네.”
“알겠습니다. 여 장군 성격을 생각하면 개선식은 대대적으로 챙겨야겠군요.”
“승전 장수니 그만큼 챙겨 줘야지. 그래야 나중에 다른 곳으로 보내도 투정 없이 가지 않겠나.”
“여 장군은 원한은 두고두고 기억해도 받은 건 기억에서 싹 날릴 것 같긴 합니다만…….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긴 해야겠군요. 개선식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트집 잡으면 고통스러운 건 저일 테니까요.”
가후가 비꼬거나 말거나, 동백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가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힘내게, 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