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가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패전보다는 승전하여 개선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게 훨씬 낫다. 가후는 오늘도 내정을 담당해 줄 인재가 어디선가 똑 떨어지기를 꿈꾸며, 일을 산더미같이 끌어안고 동백의 집무실을 나섰다. 막상 손에 든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깨와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여포가 1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적토마를 탄 채 제일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기고만장했다. 하지만 연주를 제패하고 조조를 청주로 내쫓은 승전 장수니만큼, 그 거만한 꼬락서니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장료와 고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포가 이렇게 승전행렬을 하게 되기까지 말로는 다 못 할 그들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소동백을 보겠다며, 군사들을 이끌고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저 혼자라도 먼저 가겠다 얼마나 엉덩이를 들썩거리던지. 만약 장료와 고순이 발에 매달려 말리지 않았더라면, 먼저 장안에 가겠다며 적토마를 타고 홀로 튀어 나갔을 것이다.
〈태위님께서 그렇게 불쑥 찾아온 대장군을 마주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몇 달 기다린 거 좀만 더 기다리면 고생했다 칭찬도 듣고 연회도 열어 주고 좋을 텐데. 꼭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태위님께 한 소리 들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지요!〉
……물론 여포의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고스란히 옮길 용기는 없었다. 목 끝까지 치민 마음의 소리를 좋게 좋게 돌려 한 끝에 간신히 여포를 멈출 수 있었다.
물론 여포의 행동은 멈췄다지만 기분마저 풀어 준 것은 아닌지라, 불편한 심기로 인한 그의 행패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왜 그렇게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냐고 성을 내며 주변 사람들의 엉덩이를 뻥뻥 차 댔다. 여포의 부관들 또한 여포만큼이나 하루빨리 장안에 도착하기만을 손을 꼽아 바랐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장안이다. 지금 여포가 위풍당당한 척 가슴을 활짝 펴고 만면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고삐를 쥔 손등에 핏줄이 울룩불룩 섰을뿐더러 볼살이 파들거리는 게 가까이 있는 장료의 눈에 훤히 보였다. 안 그래도 짧은 인내심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 끌어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젠장, 본성까지 가도는 또 왜 이렇게 길어!”
여포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소동백이 있을 장안성이 눈앞에 보이는데 세월아 네월아 하며 가야 하니 더더욱 초조해졌다.
다행히도 여포의 인내심이 심지마저 남기지 않고 다 타 버리기 전에 승전군은 본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성문을 넘으며 여포는 적토마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걸어서 가야만 했다.
여포는 빠른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다른 이들 또한 서로 눈치를 보며 그에 발맞췄다. 다들 지금까지 여포가 얼마나 참아 왔는지를 알기 때문에 이 정도는 맞춰 줄 만했다.
계단 위 저 멀리, 고대하던 소동백의 모습이 보였다. 그 외의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여포가 알 바도 아니었다.
“소 태위!”
여포는 한달음에 계단을 몇 개씩이나 건너뛰며 동백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요 1년간 얼굴을 구긴 채 펼 일이 없던 여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동안 하도 인상을 쓴 채 있었던 탓인지, 웃고 있는 지금도 미간에 주름이 선연했다.
동백은 수컷 공작새처럼 한껏 치장한 채 저를 향해 달려 온 여포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를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시키기를 잘했군.’
본디 승전 장수의 개선식이라 하면 황제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 승전 장수가 여포인 게 문제였다. 황제의 권위를 조금도 챙겨 주지 않을 놈이었으니까.
아무리 한 황실이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나 괜히 트집잡힐 거리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승전 장수가 황제를 코앞에 두고 무시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황제가 개선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왈가왈부하게 두는 게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의 여포는 뒤에 황제가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 기색이었다.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온 그는 오랜만에 보는 동백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꽤나 격렬한 재회 인사였지만, 다들 그런 여포의 소 태위 한정 예외적 돌발 행동에 익숙했던 만큼 태연히 대처했다. 눈치껏 빠져 눈을 내리깔았다는 뜻이었다.
동백 본인이 생각해도 여포를 연주에 처박아 두고 막 굴리긴 했다. 미안함이 남아 있던 만큼, 여포가 남들 보는 앞에서 입술을 들이미는 미친 짓을 저지르는 것만 아니면야 어느 정도 받아 주겠노라 각오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
이 정도 투정쯤이야. 호랑이가 앞발 들고 안겨 오는 것처럼 저를 짓누르다시피 하여 끌어안은 여포를 간신히 떠받든 동백은 그 어깨를 두드렸다. 호랑이 몸무게가 3백 근 정도 되던가. 지금 차려입은 갑주니 무기니 뭐니 다 합치면 정말 그쯤 나올 것 같았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아 낸 동백은 한 소리 하는 대신 대장군으로서의 위엄을 세워 주기 위해 엄숙히 말했다.
“대장군이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로군.”
“흥, 대장군은 무슨. 나는 내가 떠돌이 객장이 된 줄 알았지 뭔가.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
동백의 노력은 바로 수포로 돌아갔다. 위엄은 무슨. 입술이 댓 발 나와 있는 모습은 제 나잇값도 못 하듯 철없이 보였다.
‘이런 놈을 데리고 1년 동안 전쟁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동백은 안쓰러움 어린 시선으로 계단 아래 있는 여포의 부관들을 보았다.
상관은 패악을 부리고, 적은 기기묘묘한 꾀로 정신이 혼미해지게 판을 뒤흔드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들 얼굴 한구석이 폭삭 늙어 있는 것이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싶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해쓱해진 것은 바로 진궁이었다. 출정 전에 여포가 진궁을 보고 쪽파 운운했는데, 지금 보니 쪽파가 아니라 시든 부추였다.
비쩍 쪼그라든 상황에서도 여포의 고삐를 동백에게 다시 돌려주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진궁은 활짝 웃고 있었다. 동백을 바라보는 눈빛이 거의 여포나 다름없을 정도로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꼴을 보며 동백은 나직이 혀를 찼다.
‘하긴. 진궁 혼자만으로 여포를 달래 가며 조조의 책사 군단을 상대하기는 꽤 힘들었겠지.’
그렇다고 다른 책사를 덕지덕지 붙일 수도 없었다. 좋은 책사는 많을수록 좋다지만, 책사를 곁에 많이 둔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다. 그들의 수많은 의견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고 있되, 그들의 의견을 잘 걸러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칫하다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동백이 여포에게 진궁만을 붙인 건 그래서가 아니었다.
‘여포 저놈은 사공들 전부 배 밖으로 내던진 뒤에 홀로 배를 짊어지고 등산할 놈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니 책사를 많이 붙여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한 놈 의견만이라도 잘 들었으면 싶었는데, 진궁이 지금껏 살아 있는 걸 보니 나름 합이 잘 맞았던 듯싶다. 동백은 그렇게 진궁이 알았다가는 펄쩍 뛰다 못해 혈압 올라 쓰러질 착각을 했다.
그렇게 동백이 여포의 부하들을 안쓰러워하는 동안, 여포는 자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리고 뭐가 그리 서운했는지 종알종알 고했다. 이러다가 서서 하루를 꼬박 새우게 생겼다. 언제까지 남들 보는 앞에서 여포의 투정을 받아 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 만큼, 동백은 일단 연회장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여포를 다독였다.
“아주 연주에 처박아 두고 관심도 안 주고 말이야. 내가 서신 다섯 번 쓰면 한 번은 썼어? 썼냔 말이야.”
“그래그래. 자자,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래그래가 아니야! 내가? 어? 조조 놈이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걸 잡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래그래.”
* * *
승전 연회장에서도 여포는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는 소동백을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소동백은 의무적인 태도로 자신을 대한다는 게 삐짐의 요지였다.
연회의 주인공인 여포가 상석에 앉아 팔짱 끼고 앞만 노려보니, 춤추며 노래하는 가희와 연주하는 악단, 연회에 참석한 문무백관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여포의 눈치를 보았다. 오로지 여포 옆에 앉은 소동백만이 태연하게 음악을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하나같이 여포의 눈치만 보니, 동백이라 하여 여포를 언제까지 그리 방치해 둘 수만은 없었다. 동백은 일단 술을 기울여 타는 목을 적시고는, 바로 곁에서 술 시중을 들어 주는 시비들을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물렸다. 그러고는 여포 쪽으로 몸을 슬쩍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봤는데 계속 그렇게 죽상만 지을 겐가?”
“…….”
여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뺨이 씰룩이는 것이, 동백의 말에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 기색인 듯싶었다. 여기서 바로 말을 섞기엔 아직 삐진 게 안 풀렸다 이거지. 동백은 살살 여포를 자극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 좀 방긋방긋 웃고 그래야 내가 예쁘게 봐 주지 않겠나.”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여포가 홱 고개를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동백의 목소리는 여포만 들릴 정도로 작았으나 여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컸다. 순간 연회장의 노래가 딱 끊기며 침묵이 찾아왔다.
한 박자 늦게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깨달은 가희와 악단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멈추라는 태위의 명도 없이 노래가 끊기는 건 큰 실수였다. 그리고 승전 연회같이 큰 무대에서 벌어지는 예인의 실수는 죽을죄나 다름없었다. 다들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도살장에 끌려갈 가축들처럼 자신들의 처분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바로 그들의 목덜미와 팔을 휘어잡았다.
그 모습에 동백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남들이 봐서는 얼른 치우라는 뜻인지 그냥 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손짓이었으나, 동백의 속내를 찰떡같이 파악한 가후가 냉큼 상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