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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헌제의 황조는 동탁에 의해 농락된 괴뢰 정부이니, 억지로 끌어내려진 홍농왕을 복권하는 것만이 정당한 한의 혈통을 잇는 길이라는 요지의 원소의 공표는 바람을 타고 온 중원에 퍼져나갔다.
그 말을 조조가 받았다. 혹여나 원소에게 자신의 존재감이 지워질까 싶었던 조조는 더욱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소동백과 역적 동탁은 결국 같은 놈들이라! 천자를 끌어내린 것도 모자라 감옥에 유폐하고 거동을 제한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기실 소동백이 한나라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면 저지를 수 없는 짓이구나!”
원소가 동탁에게 화살을 향한 것과 달리, 조조는 본격적으로 소동백을 중심 삼아 공격했다. 그 또한 태위직을 얻은 것과 같이, 소동백에 대항하는 숙적의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조조는 투견처럼 소동백을 물고 늘어졌다.
“의지를 함께하는 충의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가까스로 저 소동백의 마수에서 폐하를 구출해 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한나라는 저 소동백 손에 쥐락펴락되다 못해 유씨 황조가 결국은 소씨로 뒤바뀌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천하는 저 소동백의 꼭두각시를 황제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통한을 금할 길이 없구나! 정작 우리 정당한 폐하께서는 소동백의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당하는 백성들을 걱정하며 하루하루 시름하시며 눈물지으시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불충한 신하로서 그 안타까움을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조조의 말은 구구절절하였으나 핵심은 간단했다. 한마디로 홍농왕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며, 자신들은 그를 황제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겠노라는 공표였다.
갑작스러운 홍농왕의 등장에 중원이 모두 얼떨떨해했다. 폐위된 이래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 없던 이가 아니던가. 소동백을 선두로 고착화되어 가던 중원의 판도가 느닷없는 또 다른 황제의 존재로 술렁이듯 흔들렸다. 새로운 지각 변동의 시작이었다.
원소와 조조의 주장은 금방 대륙을 지나 장안까지 전해졌다. 소문이 퍼져 나가는 속도가 가히 메뚜기 떼, 혹은 가을에 번지는 산불에 비견될 만했다. 까마귀 떼가 물어 온 정보로 동백이 사태를 파악하기가 무섭게 장안에 소식이 다다르다니. 고의로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속도였다.
‘원가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나 보군. 조조 놈, 어지간히도 이를 갈았나 보지? 원소에게 끼어들 여지를 주다니…….’
동백은 코웃음 쳤다. 동백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일찍 원소와 조조가 손을 잡았다. 그 자존심에 조금 더 버틸 거라 생각했는데. 조조의 결단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기의 문제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동백은 냉정히 앞으로의 조조와 원소가 둘 수와 제가 어찌 반박해야 할지를 가늠해 보았다. 고요히 때를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숨죽인 맹수 같았다.
소동백이 먹잇감을 노리기 위해 숨을 죽이는 것과 달리, 장안성 깊은 곳에 머무는 헌제가 숨을 죽이는 이유는 혹여 누군가에게 집어삼켜지기라도 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기어코 현실이 되었다. 장안성이 철통같은 요새면 뭘 하나. 헌제를 노리는 흉수는 저 먼 청주에서도 개의치 않고 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소제 복권이라는 말을 들은 헌제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지금껏 그 어떤 굴욕과 곤혹 속에서도 어린 나이답지 않게 평정심을 유지해 온 그였으나, 잠시 잊고 있던 형님의 등장에 마저 태연할 수는 없었다.
홍농왕이 아직 황자였던 시절, 그를 위해 검무를 춰 주겠다며 다독이던 소동백이 겹쳐 떠올랐다. 어렸던 헌제는 차마 그 자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기에, 부러워하는 것조차도 과분하다 여겨 오도카니 선 채 그 모습을 그저 눈에만 담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소동백에게 찰나의 눈길마저 받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였던 그때로.
자신이 황제이기에 동탁도, 소동백도 수렴청정에 가까운 일을 하더라도 결국 명목상이나마 헌제의 인가를 받았다. 헌제에게는 손에 쥐인 이 허울 좋을 뿐인 권력이 너무나 소중했다. 이 자리의 온당한 주인이 형님이라는 걸 알면서도, 형님에게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황제가 침전(寢殿)에 기거하는데 시비들이 부산스레 누군가를 맞이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로지 한 사람에게는 가능했다. 황제의 침전에도 저리 보무당당히 행차할 수 있는 이가 이 장안 땅에 있지 않던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헌제의 눈동자에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로 들어서는 동백이 보였다.
저보다 한발 먼저 동쪽의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소동백은 평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수면처럼 고요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헌제 저 홀로 안달복달 못하는 듯하여 절로 부끄러워졌다.
소 태위는 금을 뜯는 듯 청아한 목소리로 나긋이 타이르듯 말했다.
“미령해 보이십니다, 폐하. 옥체를 보중하시어야지요.”
“내 몸이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지러워 그런다.”
헌제는 애써 침착한 척하려 했다. 하지만 헛된 시도였다. 기어코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헌제는 소동백의 옷자락을 붙든 채 창밖을 손가락질했다.
“저들이 뭐라 하는 줄 들었느냐?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동한의 핏줄을 이은 정당한 한의 계승자라 주장하더구나. 저들이 나를 끌어내리고 형님을 올리려 하고 있어……. 결국 그들에게 나는 만들어진 하늘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냐?”
동탁의 아래서도 약한 척 한 번 해 본 적 없는 이가 동백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제 혼란스러운 속내를 고스란히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동백이 언제 자신을 자연스레 떨쳐 낼지를 짐작하며 연신 동백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다정한 목소리나 말투와 달리, 평소의 소동백은 사사로운 접촉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건조하고 냉정한 이였다. 가끔 헌제의 뺨에 무언가가 묻었다며 손끝으로 쓸어 준다든가, 과일을 깎아 건네준다든가, 어깨를 다독인다든가 하는 것처럼 툭툭 전해지는 상냥함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동백이 내어 주는 가뭄에 내리는 단비 같은 것일 뿐, 헌제 쪽에서는 그 무엇도 소동백에게 요구할 수 없었다.
물론 헌제가 황명이라 말한다면 소동백은 못 이기는 척 헌제의 바람을 들어줄 터이나, 그 순간 소동백의 얼굴에 떠오를 불쾌감과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감수하고서라도 저 서늘한 온기가, 날카로운 다정함이 자신을 다독여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의 내가 황명을 거론할 처지인가? 소동백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염치가……. 나에게 남아 있는가?’
적어도 소동백이 자신을 옷자락에 묻은 먼지 털어 내듯 밀어낼 순간까지만이라도. 눈을 질끈 감은 헌제는 손에 쥔 소동백의 옷자락을 구명줄처럼 움켜쥐었다.
그런 헌제의 마른 등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숨결처럼 미약하게 내려앉았다. 헌제의 등을 두어 번 쓸어 낸 그 손길은 이내 일정한 주기를 두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손의 주인, 동백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헌제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감히 생각지도 못한, 한겨울 마주친 화톳불과 같은 온기에 순간 헌제의 눈 밑으로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매정한 저 이가 자신을 다독일 정도로 지금이 위험한 순간인지에 대한 불안과, 그럼에도 이 상황을 이용하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헌제는 그 모든 것을 꽉 눌러 내렸다. 그런 것 따위를 셈하느라 두 번 없을 이 기회를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았다.
민들레 홀씨가 기어코 땅에 뿌리를 내리듯 소동백의 손길이 헌제의 심장에 닿았다. 소동백의 위로에 미약하게 용기를 얻은 헌제는 조금 더 칭얼대듯 읊조렸다.
“저들의……. 저들의 주장은 크게 틀리지 않아. 나는 그게 너무 불안하다.”
제 옷자락을 잡은 헌제의 손을 그대로 둔 동백은 휘청거리는 헌제를 부축해 용상(龍牀)에 앉혔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헌제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손이 차게 식어 있었다.
동백은 기계적으로 손을 도닥이며 그 연합군이라 주장하는 조조 패거리들이 내건 강령을 복기했다.
‘동한의 핏줄을 이은 정당한 한의 계승자라…….’
기존의 한나라를 왕망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구분할 때 전한과 후한이라고 일컫기도 했지만, 수도를 기준으로 장안이 수도였던 전한은 서한으로, 낙양을 수도로 하였던 후한은 동한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동한의 계승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한의 후계자라는 걸 알림과 동시에, 낙양 전소와 천도는 왕망이나 할 법한 짓거리라며 과거의 일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소동백의 정권을 매섭게 공격했다.
동백은 혀를 찼다. 장안 천도는 동탁 정권일 때 벌어졌던 일이니만큼 낙양 전소에 관해서는 면피할 구석이 많기는 했지만, 당시 그 천도를 주장한 것은 결국 동백인 만큼 그리 오래 거론되어 좋을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조조가 생각해 둔 수가 뭐든지 간에 내 쪽 황제가 얼간이처럼 겁에 질린 꼴은 말도 안 되지.’
동백은 자신에게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벌벌 떠는 헌제의 관모를 쓴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나약하기 짝이 없다. 하늘 아래 두 천자는 없다며 동백에게 당당히 말했을 당시의 모습은 세월에 희미하게 흐려져 흔적만 간신히 남았다.
동백이 이리 만들었다. 자신이 이용하기 쉽게. 자신이 휘두르기 쉽게.
그러면 제가 잘 휘둘러야지.
그리 생각한 동백이 돌연 물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제가 문종후(文終侯)의 피를 이었다 생각하셔서 저에게 찬후직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그거야…….”
헌제는 당연하다 말하려 하였으나, 동백의 엷은 사금색 눈동자가 헌제를 꿰뚫어 볼 듯 바라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동백의 입꼬리가 가느스름하게 길어졌다.
“아니지요. 제 양부의 안배라는 것을 폐하께서도 아시고, 문무백관들도 짐작하며, 제 정적들 또한 의심치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무도 제가 문종후(文終侯)의 작위를 가져가는 것에 반박하지 않았지요. 그게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동백이 자신의 치부를 이리 거리낌 없이 거론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헌제는 당황하여 화들짝 놀랐다. 답을 채근하는 듯한 동백의 곧은 시선에 떠밀린 그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증좌……. 자네에게는 족보가 있었으니까…….”
비록 예전처럼 당당하지는 못하다 하나 영민함은 여전했다. 그는 동백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답을 읊었다.
“예. 진실을 만드는 건 증거입니다. 증좌가 없으면 저들의 주장은 헛되이 흐트러질 뿐이고, 증좌만 있으면 우리의 주장이 우뚝 서서 진실이 되는 것이지요.”
동백은 잘했다는 듯 헌제의 손등을 다독였다. 별거 아닌 소동백의 손짓에도 헌제는 마치 스승에게 칭찬받은 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헌제의 해쓱한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기실, 실제로 소동백은 황제를 보좌하는 보정대신(輔政大臣)이었으니 헌제가 소동백을 스승처럼 여기는 것이 틀린 건 아니었다.
동백은 가르침을 주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마치 홍농왕께서 태자였던 적 한 번 없거늘, 당연히 태자였던 듯이 취급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영사황후(靈思皇后)의 적자 아닌가. 그러면 응당…….”
“응당 같은 건 없습니다. 선제께서 그리 직접 내린 유훈이 없으면 의미 없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