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서류였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급한 서류가 어디 한두 건인가요. 그렇게 예외를 두면 결국 자시 넘겨서 주무시게 되는 걸 아시잖아요.”
“어제는 그거 하나만 보고 바로 잤으니까 봐주세요.”
“오늘 바로 잠자리에 들면요.”
“약조합니다. 약조할게요.”
동백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리리는 그제야 꽃이 만개하듯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해사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리리가 웃으니 동백 또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동백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하여간 그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강동과의 동맹에 차질이 생기겠죠. 호위를 붙이기는 해야겠습니다.”
동백은 손책과 주유가 밖에 머무는 것에 대해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위한 배려였을 뿐, 굳이 제집에 둘 이유 또한 없었다. 그 뒤로 손책과 주유의 숙소 문제가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동백도 내심 이 상황의 이상함에 대해 눈치챘을 터였다. 누군가의 개입 없이 벌어졌다기엔 상황이 공교롭지 않은가. 하물며 그 누군가들이 저지른 일은 엉성한 데다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의지도 딱히 없었다. 동백이 시시비비를 따지려 했다면 금방 진실은 수면으로 드러났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여포가 손을 잡고 동백을 기만한 일이다. 이 정도 방종은 개의치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진실로 그들을 믿기 때문일까……. 둘은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큰 차이가 있었으나, 리리로서는 어느 쪽이든 기꺼웠다. 리리는 만족스레 웃었다.
* * *
손책과 주유가 어디서 묵는지와 같은 일은 동백에게 무척이나 사소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짊어지고 온 옥새마저도 동백의 뇌리에 그다지 길게 머물지 않았다.
지금의 동백에게는 따로 신경이 몰려 있는 일이 있었다.
이번에 손권을 강동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인가?
강동에서 온 서신을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고민하였으나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손견이 옥새를 준 건 그저 충심일 뿐이라 못을 박았으니, 옥새와 교환한 손권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리했다가는 훗날 이 일이 강동 쪽 불만의 불씨가 될 터였다.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 게 아니냐부터, 소동백은 손가의 체면을 봐 줄 생각이 없었다는 핑계가 될 게 분명했다.
사실 답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손권을 데려오며 동백이 목적한 바는 이뤘다. 이 혼란스러운 난세에서 동백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할 정도로 손가와 끈끈한 연을 맺었고, 손권 또한 제 영향력 아래에 두었으니까. 더 이상 손권을 장안에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
손권을 데려오며 인질일 뿐이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자신의 장기짝이라 몇 번이고 마음에 선을 그었음에도 결국 동백은 손권을 제 안에 들이고 말았다. 그건 동백이 거부한다 하여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부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동백은 장안에 막 정착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텅 빈 저택에는 손권과 동백 단둘만이 머물고 있었다. 리리와 재회하지 못하고, 장양과 금단요를 잃은 동백 홀로 남은 저택의 한편에 제가 책임져야 할 손권이 있다는 것은 당시 부평초 같던 동백의 마음을 붙드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을 때는 이미 손권에게 정을 내어 준 뒤였다.
‘언젠가는 손권을 강동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동백도 자신의 고뇌가 그저 개인의 욕심일 뿐, 대의도, 명분도, 심지어 동백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점마저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주저하게 되는 것은 미련일 터였다.
남의 자식을 언제까지고 제 품에 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것이 설령 남의 자식이 아니라 제 자식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의 순간은, 헤어짐의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동백은 결단을 내렸다. 동백을 위해서가 아니라 손권을 위해서.
* * *
“이번에 형과 함께 강동으로 돌아가라.”
손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작스레 동백이 자신을 불렀기에 당연히 형들이 저택을 나간 일에 대해 물어볼 거라 생각했다. 자초지종을 순순히 털어놓는 것은 여포와 국부인 두 사람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만큼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떻게 변명하면 좋을지 한참을 머리를 싸맸는데, 정작 동백이 꺼낸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강동에서 널 오정후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다는 말은 기억하지?”
“……네.”
동백의 말에 손권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동에서 연락이 오자마자 동백이 손권에게 미리 언질 주었다. 형들과 식사 자리에서 그에 관한 화두가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형들은 은연중에 몇 번이고 그런 어조를 풍겼다.
“강동에서 너를 후계자로 삼는다 공표하기는 했지만, 후계자라는 것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져도 되는 것은 아니야. 그들에게 네가 후계자로서 한 치의 부족함 없음을 증명해야 하지……. 네 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한 중요하고 말이야.”
손책이 손권을 후계로 주장하고 손책이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고는 하지만, 강동의 모든 이들이 그 의견에 수긍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손책이 흠 없는 장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손권이 그 자리에 없다면 더더욱 지난할 터였다. 나중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장안에서 자란 장안 놈이 강동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며 백안시될 터였다.
손권도 동백의 말이 옳고,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족은 그리웠지만, 그렇다고 동백과 이별할 준비가 된 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동백의 곁에 머무른 지도 3년이다. 유년기의 3년은 길었지만, 어른의 3년은 짧았다. 손권에게 동백의 흔적이 깊게 남은 것과 달리, 손권이 떠나면 동백은 금방 손권을 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내지 말라 떼를 쓸 수도 없다. 그건 동백을 실망시키는 일이니까.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건 손권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런 갈등을 읽은 동백은 손권을 향해 손짓했다. 손권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조용히 동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동백은 손권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아이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난다. 제 손바닥만 했던 손은 어느새 제 손과 크기를 견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동백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훌쩍 자란 손권의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너는 똑똑하고, 영특한 아이지.”
다정한 손짓, 부드러운 목소리. 동백과 몇 년간 함께해 왔지만 동백이 이렇게 상냥하게 말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손권은 차마 동백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제 발끝만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흘린 시선에는 동백의 매끈한 턱 끝과 조곤조곤 움직이는 입술만이 보였다.
“너는 오정후의 자식으로 오정후의 작위를 이을 테지만…….”
혹여나 동백의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까 손권의 신경이 곤두섰다. 손권은 끊어진 목걸이의 구슬을 전부 그러모으듯 동백이 건네는 속삭임을 귀 기울여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국공이 키운 아이임을 명심해라. 그건 절대 변하지 않을 진실이니.”
동백이 키운 아이. 손권의 심장이 크게 뛰며 속이 울렁였다. 손권은 단 한 번도 제 이름 앞에 소동백과 관련된 무언가가 오리라고 기대한 적이 없다. 그것은 동백이 자신을 아끼는 것과는 별개였다.
객관적으로 그들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인질일 뿐인, 동백이 귀여워할 뿐인, 동백의 집에 머물 뿐인……. 아무리 좋게 말해 줘야 결국 그것뿐인 관계.
그렇게 지난 3년간 이름 붙지 않은 채 이어지던 관계가 드디어 정의 내려졌다. 동백이 자신을 인정했다. 이제 나는 화국공이 키운 아이다. 그 사실이 손권을 벅차오르게 했다.
“내 귀여운 아권. 나도 너와 헤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구나…….”
동백은 손권의 뺨을 매만지던 손을 뻗어 손권을 끌어안았다.
손권은 동백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 등을 끌어안고 그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동백의 품에서는 동백 향과 목단 향, 그리고 선향을 태운 향이 뒤섞여 화사하면서도 씁쓰레한 향이 났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벌게진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 동백의 옷자락을 적셨다.
거칠거칠한 삼베 밑으로 단단하게 동여맨 갑옷이 느껴졌다. 철옹성 같은 저택에서도 동백은 잠시도 방심하지 않았다. 상중이라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함을 기하는 철저함인가, 아니면 위태로움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손권은 그런 동백의 곁에서, 동백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동백이 가르쳐 주는 것은 모두 제 것으로 삼아서, 동백이 짊어진 짐을 거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될 거라 막연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리 이별의 순간이 금방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동백은 제 품에 강아지처럼 파고드는 손권을 그대로 두었다. 키가 껑충 자라기는 했지만 뼈대는 아직이었다. 성인에 비하면 덜 자라 왜소한 등과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동백은 자장가라도 불러 주듯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내 훗날, 너를 오왕으로 삼을 것이야.”
오왕. 단 두 음절의 단어에 손권은 잘게 몸을 떨었다. 손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동백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왕위는 고작 국공이 논하기에는 과분한 자리였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국공이 아닌, 화국공 소동백이다. 이미 황제 또한 제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는 그가 아니던가. 왕위 또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이미 받아 놓은 거나 다름없는 이이니 다른 자를 왕위에 올린다 하여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