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471)화 (47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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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는 아주 묫자리도 파 놓으라 하시지 그러냐며 시종일관 구시렁대었다. 그러면서도 동백의 등에 빼곡하게 침을 놓는 손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것이 과연 신의다웠다.

“젊을 때부터 날씨 궂은 걸 온몸으로 알고 싶으시다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자중하십시오.”

그러고는 쌩하니 장막을 나섰다. 동백의 성별을 알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찬바람이 풀풀 날리는 모습에 동백은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원, 사람하고는.”

화타 덕에 잠시나마 거동하기가 수월해진 동백은 옷을 차려입고는 조용히 측근들만 불러오게 했다.

오래지 않아 동백의 측근들이 침통한 낯을 한 채 하나둘 짚으로 엮인 굴비처럼 장막에 들어섰다. 그들은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소동백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태위님!”

“다들 안색이 그게 뭔가. 내가 죽은 줄 알기라도 했나?”

“주, 주, 죽다니요! 말씀만이라고 해도 소름 끼칩니다!”

왕필이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마음고생을 족히 했는지, 항상 능청스러웠던 얼굴이 해쓱했다. 그도 당연했다. 왕필은 악진과 동백이 만나기도 전부터 오래 동고동락해 온 사이였을뿐더러 동백과도 제일 인연이 오래되었다. 악진은 죽었고 동백은 생사를 오락가락하니, 신경줄이 바짝바짝 타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그래도 태위님께서 곧 쾌차하실 거라는 희망으로 버티던 찰나, 돌연 여포가 난리 법석을 치며 화타를 동백의 장막으로 끌고 갔다. 화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잔뜩 굳은 얼굴로 장막을 나섰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가슴 철렁했던 그들은 조심스레 화타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으나, 화타는 무덤을 파 둬야 한다느니 하는 재수 없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소동백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왕필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동백이 무사한 모습과 마주한 조운은 지금껏 애써 참아 온 눈물을 기어코 흘릴 수밖에 없었다. 조운은 무릎을 털썩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이 부족한 탓에 태위께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이 미거한 소신이 불충하였으니, 부디 죄를 묻고 벌을 내리시옵소서.”

동백은 수척해진 조운의 양 뺨과 움푹 파인 눈두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필에 이어 조운도 꼴이 말이 아니다. 관우를 상대하며 입은 부상 때문에 상태도 좋지 않았거니와, 마지막까지 동백을 보필하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에 죄책감으로 남은 듯싶었다.

그들이 못한 것이 무엇이 있나. 씁쓰름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일어선 동백은 조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게 어디 조 장군 탓인가. 조 장군은 언제나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지. 이번 일은 내가 스스로를 과신한 탓이요, 유비가 나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기 때문일 뿐이야.”

동백의 위로에 조운은 고개를 떨구었다. 조운의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조 장군이 악 장군을 데려와 주었다지? 그대 덕에 나는 악 장군에게 미안할 일 하나는 덜었어. 그이를 이 먼 서주 땅에 묻히게 할까 걱정되었는데……. 오히려 내 그대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동백은 그를 다독여 달랬다. 여포는 그 모습을 못마땅히 바라보았으나, 저지하지는 않았다.

“전황은 어떠한가?”

그렇게 수하들에게 자신의 무탈함을 알린 동백은 바로 자신의 부재중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동백의 부하들 또한 그런 칼 같은 일 처리에 익숙했다. 왕필은 바로 표정을 점잖게 가다듬고는 보고를 올렸다.

“태위님께서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들리기가 무섭게 원술은 슬금슬금 발을 뺐습니다. 어차피 유비군은 서주에서 달아나 소패로 향했는데 굳이 쫓을 필요 있냐면서 말입니다.”

“빌어먹을! 역시 믿을 놈이 아니야. 대의를 논하기 어려운 소인배 같으니라고!”

여포가 성을 내며 씩씩거렸다. 소동백의 간호에 집중하느라 여포 또한 이제야 그 소식을 알았다. 그나마 조운과 왕필이 기민하게 정보를 파악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여포가 길길이 날뛴 것과 달리 동백은 태연했다.

“되었다. 원술에게 그리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원술의 약삭빠르고 신의 따위는 개나 줘 버린 성미를 생각해 보면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지 않는 게 어디냐 싶을 정도였다.

물론 소동백군이 패퇴하였다고는 하나 군사 수는 여전히 많았고, 장수들도 대부분이 건재하니 정말로 딴생각을 먹을 엄두를 내진 못했으리라. 동백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니,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복수전에 휘말려 제 군마를 소모할까 싶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자 한 듯했다.

“오히려 잘되었네. 원술이 그리 눈에 띄게 등을 돌렸으면, 유비군 또한 그 기색을 읽었을 터.”

“그 말씀인즉슨…….”

“내가 죽은 척해서 저들의 방심을 부를 것이야. 우선 조운과 왕필은 악 장군을 추슬러 장안으로 돌아가게.”

“태위님!”

왕필과 조운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동백을 설득하고자 하였으나, 동백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악 장군 말고도 관을 하나 더 메고 가는 게야. 그러면 아마 그들은 내가 부상이 잘못되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대장군과 함께 남아 그때를 노리겠네.”

“차라리 제가 남아 태위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조운이 정색하며 나섰다. 왕필도 대놓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운과 같은 생각인 듯싶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여포는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며 조운을 비꽜다.

“왜? 내가 남으니까 아니꼬워? 네가 위험에 빠트린 소동백이 건져 온 게 누군지는 알고?”

“태위님께 불손한 어투는 삼가 주시지요, 대장군.”

“짜아식, 거 할 말 없으니까 말투로 꼬투리 잡네.”

여포와 조운의 기세가 팽팽해지자 주변인들 모두 침만 꼴깍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둘 사이의 기 싸움을 지켜보던 동백은 작게 기침을 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여포와 조운의 입이 딱 다물리더니 동백의 안색을 살폈다. 동백은 미소를 띤 채 부드럽게 말했다.

“둘 다 아직 싸울 기력은 넘치는 듯하니 내 그나마 안심이 되는군.”

웃고는 있으나 여포와 조운 둘 다 저게 경고라는 걸 못 알아들을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그제야 조용해진 두 사람을 보며 동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조 장군의 의욕 넘치는 제안은 고맙네. 하지만 자네는 애초에 탈락이야.”

“어째서입니까?”

조운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억울해하며 되물었다. 여포는 동백이 자신 편을 들었다 생각했는지 옆에서 그런 조운을 비웃으며 희희낙락했다. 동백은 차근히 정황을 설명하려 했다.

“내가 정말로 죽었다고 가정해 보게.”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맞습니다! 부정 탑니다!”

여포와 조운이 버럭 입을 모아 외쳤다. 아까까지는 죽일 듯 싸우더니, 이럴 때는 또 쿵짝이 잘 맞는다. 농담이 아닌지 외치는 두 사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어 하나만 꺼냈을 뿐인데 맥락도 못 읽고 발작적으로 구는 것이 어지간히도 정신적 외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피곤해진 동백은 이마를 짚으며 그들을 달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가정. 가정 말일세. 그러면 상식적으로 내 시체를 장안까지 이송하는 것이 누구고, 복수해야 성이 풀리겠다며 앞뒤 안 보고 유비를 치겠노라 날뛰는 게 누구겠는가?”

“…….”

“아무렴 조 장군이 후자처럼 굴 것 같진 않지……. 아니 그러한가?”

모두가 숙연해졌다. 동백이 생각 없이 배치할 리는 없다지만, 확실히 동백의 죽음을 가정하면 여포와 조운 둘 다 그리 행동할 것 같았다. 조운은 슬픔과는 별개로 복수하기 위해 섣불리 군을 일으키는 짓은 하지 않을 테고, 여포는 복수의 상대를 코앞에 두고 말 머리를 돌릴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동백은 이번에는 완벽하게 유비를 속일 셈이었다. 아무렴 군의 태반이 장안으로 돌아가더라도 여포의 위명이 있으니 유비는 여포군을 경계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딱 경계 정도이리라. 자신에게는 관우가 있으니 아주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여기겠지. 동백의 노림수는 그 아슬아슬한 심리적 틈새였다.

동백은 유비가 비슷한 방식으로 군을 쪼개 자신을 낚은 일을 떠올렸다. 저들만 함정을 팔 수 있는 줄 아나? 코웃음 친 동백은 못내 걱정스러운 듯한 조운과 왕필을 달랬다.

“그리고 내가 마음 놓고 악 장군을 맡길 수 있는 게 그대들뿐이야. 장안에 가거든……. 악 장군의 장례는 먼저 잘 치러 주게. 나는 악 장군의 무덤 위에 놓을 전리품을 챙겨 갈 터이니.”

동백이 그리 말하니 조운과 왕필도 더 이상 자신들이 남겠노라 주장할 수 없었다. 왕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엄살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장안에 계신 가 상서께서 저희에게 크게 화낼 겁니다. 태위님께서 가란다고 해서 정말로 너희끼리 왔냐고요.”

“왕 장군은 가 상서를 잘 모르는군. 아마 내 계략을 들으면 잘했다고는 못 해도 어쩔 수는 없었겠다고는 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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