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궁이 갑자기 화사한 옷을 입고 다니자, 다들 공을 세운 일로 허파에 봄바람이라도 들었느냐며 손가락질했다. 면전에서 그 소리를 들은 진궁은 길길이 화를 내며 날뛰었다.
“이건 전부 태위님께서 내려 주신 겁니다! 포상이라고요!”
“포상? 내가 보기엔……. 이봐, 진공대. 서주에서 태위님에게 뭐 죄라도 지었는가? 꼴이…….”
“내 꼴! 내 꼴이 뭐 어때서!”
진궁은 자신이 입은 옷이 제법 마음에 든다는 듯 가슴을 불쑥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그래 봐야 참새가 가슴을 부풀리는 꼴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지라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뭐, 소 태위가 사람 하나 진심으로 괴롭히자고 귀한 비단을 내려 포상할 만큼 음습한 인간도 아니고. 본인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니 되었다. 다들 더 얽히기는 싫었던지라 모르는 체 더 캐묻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모두가 그리 생각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뭐? 태위가 진궁한테 비단옷을 선물했다고?”
소동백이 누군가에게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관심을 주는 것을 못 견디는 여포가 소식을 듣고 진궁을 찾아갔다. 진궁이 갈 만한 곳이야 빤했다. 집, 집무실, 그리고 서고뿐이다.
기어코 진궁을 찾아낸 여포는 황궁이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은 채 우격다짐으로 진궁의 장포를 벗기려 했다. 진궁은 장포를 부여잡은 채 탐관오리에게 희롱당하는 민간인처럼 처량하고도 안쓰럽게 외쳤다.
“제, 제 옷입니다! 뺏어 가도 장군에게는 맞지도 않는다고요!”
“에잇! 그러면 내 허리춤에 매어 허리띠로라도 쓸 생각이니 걱정 말아라!”
“안 돼요!”
“돼!”
여포와 진궁이 한바탕 소란을 벌였다. 때마침 그 근처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소동백이 익숙하고도 야단스러운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상황이 안 봐도 훤했다. 동백은 제 눈치를 살피는 호위와 측근들을 물리고는 친히 난간으로 몸을 기울여 고개를 뺀 채 외쳤다.
“봉선! 벼룩의 간을 내먹게. 비단옷도 많은 이가 그게 뭔가!”
“하지만!”
동백은 여포의 반론은 듣지 않고 난간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의를 줬으니 여포도 더 이상 우기지는 않을 것이다. 동백은 가던 길을 마저 가며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채신머리없기는……. 나이를 먹을수록 애 같아진다니까. 지금 제가 저런 비단 몇 개에 질투할 직위냔 말이야. 대장군이나 되어서.”
“뭐, 대장군의 성정과 배포가 그리 넉넉지 못한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발 뒤에서 동백을 따르던 가후가 심드렁히 덧붙였다. 마치 남의 일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 사태가 벌어지는 데에 일조했을뿐더러, 저에게 향할 화살까지 전부 진궁에게 돌린 이답지 않은 선 긋기였다.
동백과 가후는 그렇게 총총 자리를 떴다. 어떻게든 소동백의 발목을 붙들려는 여포의 외침이 점점 멀어졌다.
* * *
“태위! 태위! 잠깐만 기다려 보라니까! 아……. 내가 이렇게 애원하는데 진짜 매정하게 뒤도 안 돌아보네.”
3층의 난간 너머로 소동백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소리치던 여포는 투덜거리면서 발을 굴렀다. 내심 동백이 잡히지 않을 걸 짐작했다는 듯한 어조였다.
볼일이 끝난 여포는 홱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소동백이 자리를 떠났으니 본디 목적했던 바를 달성할 생각이었다.
“진궁! 뭐야, 이놈은 그사이 또 어디 갔어?”
하지만 진궁은 그사이 쌩하니 도망간 뒤였다. 여포가 직속상관이라는 이유로, 그가 말도 안 되는 패악질을 부리는 걸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장료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까 태위님께서 부르셨을 때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달아나셨습니다.”
“그걸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어?”
“태위님이 그 꼴을 보고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하여간 소동백이가 진궁을 너무 총애하는 것 같아. 그 파 뿌리가 전쟁에서 한 건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 여봉선의 노고는 값을 쳐주지도 않고 말이야…….”
여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백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주변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발산하는 경계 섞인 발언이 끊이지 않고 줄줄 흘러나왔다. 장료는 너무 많이 들어 이제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은 여포의 투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여포는 머릿속으로 아까 보았던 소동백의 낯을 떠올렸다. 여포가 우스꽝스러운 바보짓이라도 한다는 듯 저를 보는 낯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설핏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웃는 횟수가 좀 늘었지?’
여포는 내심 안도했다. 소동백은 속이 진창 나 있어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데 재주가 있다 보니, 평소 그 멀끔한 얼굴 아래 속이 얼마나 배배 꼬이고 난도질돼 있을지 눈치채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겉을 덮어 가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듯, 종종 속내를 내비칠 때가 있었다. 서주에서 유비를 죽이고 승리를 얻어 낸 직후에도 그랬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상대와의 인연에 끝을 냈음에도 딱딱하게 굳은 낮에는 기쁨 한 점 없었다. 되레 허탈하고, 어딘지 우울해 보이고…….
그 원인은 빤했다.
전부 악진의 죽음 탓이다.
소동백은 여포 본인이 짐작하는 것보다도 더 섬세하고 예민한 기질을 지녔다. 상냥하고, 정 많고, 감수성 있고……. 이 난세를 살아나기 어려운 나약함이다. 어쩌면 소동백의 후원에 있는 초선 그 계집이 더 독하고 냉정할지도 모른다.
성정이 저렇다 보니 주변에 깊게 교류하는 사람을 두지 않는 모양이다 싶었다. 그것이 동백이 그나마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리라.
거기까지 짐작하고 나니, 혹시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여포 저는 소동백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을 게 분명하다. 뭐, 그보다 더 깊이 초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악진 그놈보다는 좀 더 긴밀할 것이다.
그런 제가 다치기라도 하면 소동백은 얼마나 깜짝 놀랄 것인가? 전쟁에서 죽거나……. 아니면 병이라도 들면? 이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마음 아파할 게 아닌가.
여포의 불안 서린 망상은 점점 그 크기를 무럭무럭 키워 갔다. 여포는 지금껏 제 강건한 신체에 조금의 이상도 느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전쟁에서 다치는 건 물론이거니와, 늙어 나약해진 미래 따위는 상상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오만하였다. 하지만 소동백과 얽히니 만약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초조해진 여포는 바로 태의관(太醫官)으로 향했다. 갑자기 태의관 문이 뻥 하니 열리더니 대장군 여포가 등장해서 태의관을 휘휘 둘러보았다. 태의관에서 일하는 모두가 감히 여포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사이, 그나마 여포와 안면이 있는 화타가 말을 걸었다.
“태위님께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이놈의 의원이란 작자들은 사람만 보면 맨날 문제 있냐 묻는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게!”
“본디 의관이란 문제가 있어 찾아오는 것이고, 온후께서 의관을 찾을 일이 태위님 말고 짐작 가지 않아서 그러지요.”
여포가 버럭 성을 내는데도 불구하고 화타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여포가 어디 본인 아프다고 찾아올 사람인가?
기실 의관을 기피하는 것은 여포뿐만이 아니라 무관들 모두가 으레 그러했다. 의원에게 몸 불편한 데를 말하면 자존심이라도 깎여 나가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등을 돌리니, 그렇게 병을 키우다 죽어 나가는 무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요즘은 난세인지라 그 전에 전쟁에서 죽어 나간 덕에 그런 이를 보는 경우가 드물 뿐이었다.
좌우지간 그렇다 보니 당연히 여포가 아닌 다른 인물, 소동백에게 문제가 있지 않나 짐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화타의 짐작을 비웃듯, 여포는 화타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넸다.
“내가 태의관을 찾은 것은 화 태의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네.”
“본관에게 물을 것이 있다고요?”
여포가 질문이라니! 화타는 혹여나 제 본심이 태도에 드러나 여포의 성질을 긁지 않도록 최대한 공손한 척 물었다.
“그래. 화 태의가 기혈을 소통시키며 체질을 증강하는 장생법(長生法)을 알고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장생법을 알아 무얼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오래 살아야지.”
여포는 당연한 걸 되묻는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답했다. 화타는 기가 막혔다. 저 성질머리로 오래 살 생각까지 하다니 말세다, 말세. 여포 수명이 1년 늘어날 때마다 주위 사람들 수명이 1년은 줄 테니, 과연 그에게 장생법을 알려 주는 것이 의원으로서의 사명에 걸맞은 일인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다 알고 온 듯하니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화타가 깊게 한숨을 쉬자, 지레 찔린 여포가 재빨리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니, 태위께서 젊고 아직 남은 시간이 기니, 내가 먼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태위님의 곁을 나보다 더 잘 보필할 이가 없으니까. 그 누가 나처럼 욕심 없이 태위의 명에 따르겠는가?”
만약 있다면 소동백에게 헛생각을 품은 놈이 분명하렷다!
안 그래도 동백의 곁에 있으면서 미혼인 이들 전부 의심스러웠다. 죽은 악진도. 조운 그놈도!
여포는 본인이 죽고 난 뒤 어떤 놈이 소동백에게 들러붙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함에 절로 몸서리쳐졌다. 소동백이 먼저 죽으면 여포도 확 따라 죽어 버리면 되는 일이지만, 여포가 죽는다고 소동백이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별로 기대도 없었을뿐더러, 아무리 여포라 할지라도 대의를 위해서 그러면 안 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