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5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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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가 기어코 조조의 손에 떨어졌다.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라던 서신이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연달아 날아든 비보에 소동백군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일사천리다 못해 눈 하나 깜빡일 때마다 조조군의 진행 속도가 휙휙 바뀌어 있다 보니 오죽하면 조조가 요술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나마 동백이 낙양에 있어서 소식을 빨리 들은 편이라 망정이지, 장안에 있었더라면 손써 볼 여지조차 없이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을 것이다.
‘뭐, 지금이라 해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조조가 기주를 완전히 흡수하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인가.’
하지만 그마저도 늦장을 부리면 여의치 않을 터였다. 이미 동백은 원소와 조조의 동맹에 대해 의심하느라 유의미하게 쓸 수 있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냈다.
만약 조인에게 원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아직까지도 조조와 원소가 손을 잡고 동백을 꾀어내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원소라 할지라도 제 장남의 목숨까지 대가로 내어 주며 동백의 눈을 속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제야 동백은 두 사람 사이에 동맹 따위는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원소군은 왜 이렇게 쉽게 몰락했는가?
이내 동백의 궁금증은 풀리게 되었다. 조조가 원소의 죽음에 대해 널리 공표하고, 자신이 기주의 정당한 지배권을 물려받았다 선포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남피현에 도착했을 때, 원소가 이미 세상을 떴다? 하! 허울 좋은 핑계로군!”
듣고 있던 여포가 코웃음을 쳤다. 평소 조조의 간악한 술수를 생각해 별로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동백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인은 뭐라던가?”
“오래 앓은 지병이 있었던 듯합니다.”
동백은 침음을 흘렸다. 여포와 달리 동백은 조조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여겼다. 기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조가 이렇게 간단히 원소를 집어삼키는 것이 말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 시기에…….’
천운이 조조를 향해 흐르는 듯했다. 두 번 다시 느끼지 않을 줄 알았던 운명의 편애에 동백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동백은 자신의 동요를 억누른 채, 기주의 소식을 물어 온 전령에게 물었다.
“원소의 식솔은 어찌 되었느냐?”
“발해군을 점령한 조조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하였으며, 원소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니 그 식솔들 또한 높이 대우하며 손대지 말 것을 명했습니다.”
“오랜 친구라…….”
동백의 입술 끝이 삐뚜름히 기울어졌다. 동백이 조조의 속셈을 모르겠는가? 친구인 척 예우를 표함으로써 기주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할 작정이리라.
원소의 식솔들을 살려 두었을뿐더러 박하게 대하지 않으니, 본디 원소에게 충성하던 가신들 또한 조조에게 반발할 명분이 부족해진다. 차라리 조조 밑에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장남은 죽었고, 차남은 유약하며, 가능성 있는 삼남은 아직 어리다…….”
그 삼남은 원소군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원소군의 첨예한 의지를 둔하게 만들 독이기도 했다. 삼남이 장성하기까지 10여 년. 그동안 과연 조조는 그들을 얌전히 둘 것이며, 삼남은 무탈히 자라 원소의 의지를 이을 것인가?
차라리 삼남을 죽였다면 원소의 복수를 하겠노라 주장하는 이들 때문에 흡수에 난항을 겪었을 텐데, 오히려 조조는 삼남을 살려 둠으로써 원소군의 목줄을 잡았다. 정말 간교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백은 대정전에 모인 문무백관들을 둘러보았다. 조조의 위험성은 그와 맞상대한 동백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교활하고 철두철미한 조조에게 운까지 따라붙으니 사자에 날개를 단 격이다. 아무 장수나 보내 봐야 조조를 견제하기는커녕 집어삼켜질 뿐이니, 중역을 고르는 데 심사숙고해야 했다.
게다가 일전에 도착한 장옥란의 서신 또한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나의 대적자인 늙은 용이 동쪽에 머물고 있으니 동쪽 정벌을 하며 거듭 조심하라……. 늙은 용이 조조를 말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아무나 보낼 수 없다. 역시 제일 마음 편한 방법은 동백 본인이 나서는 것이다. 찜찜했던 동백은 넌지시 운을 뗐다.
“하……. 이대로 조조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구나. 내가 친정하여 조조를 정벌함으로써 저 오만방자한 행동에 끝을 맺어야겠다.”
동백의 말이 떨어지자, 그 전까지만 해도 조조군의 진격에 정신없어하던 이들의 눈에 갑자기 초점이 생겼다. 아까는 동태처럼 눈만 껌뻑이더니, 돌연 활어처럼 펄쩍 뛰며 경악한 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태위께서 친정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안 그래도 바로 직전 전투에서 태위께서 유비를 상대하다 크나큰 고초를 겪으셨거늘, 어찌하여 존체를 함부로 하시나이까? 그야말로 불안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모두가 앞다투어 동백의 출정을 만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였다면 문관의 발언에 무관들이 겁쟁이 운운하며 흥을 깼을 텐데, 이번에는 무관들 또한 입을 꾹 다물고 문관들에게 동조했다. 갑자기 문무백관이 일치단결하여 들고 일어서니 그 기세가 동백 또한 흘려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가후가 두 손을 모으고 앞으로 나서 쐐기를 박았다.
“태위께서는 이 한나라 사직의 기둥이시니, 사직의 안정을 위해서도 자중해 주시옵소서.”
“자중해 주시옵소서.”
가후를 필두로 하여 관료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갑작스러운 읍소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동백은 입을 떡 벌리고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출정하지 말라 석고대죄도 하겠군.”
“석고대죄가 무엇입니까. 차라리 소신을 베고 지나가시옵소서.”
가후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동백은 할 말을 잃었다. 제가 안 그럴 걸 알아도 그렇지 아무 말이나 막 뱉는다.
동백이 기가 막혀 하거나 말거나, 여포는 쌍수를 들고 가후의 말을 반겼다. 솔직히 가후의 말이 맞았다. 소동백은 태위다. 태위가 전장에 자주 나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한평생 서량에서 강족과 말을 타고 살던 동탁은 상국이 되고 나서는 전쟁터 한번 나가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잘만 시키던데. 왜 소동백은 매번 군을 이끌고 직접 사지로 나서냔 말이야.’
여포가 속으로 툴툴거리는 사이, 친정 의지를 접은 동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충심으로 반대하고 나서니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동백이라 해도 찜찜하다는 이유만으로 마냥 제가 나서겠노라 우길 수는 없었다. 그저 출정하는 이에게 거듭 당부하는 수밖에.
‘어차피 기주는 멀지 않아……. 나도 낙양에 있으니, 여차하면 바로 움직이면 될 거야.’
동백은 대정전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남았다. 누구를 보내 조조를 상대하게 할 것인가?
기주 상산(常山) 출신인 조운을 보내면 지형적으로 익숙한 만큼 우세를 점할 것을 노릴 만하겠지만, 조운은 능력 면에서든 신의 면에서든 동백이 여러모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수였다. 그래서 동백을 대신하여 자리 비운 장안의 치안을 도맡게 했다 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 더불어 곽사와 이각은 동백이 동쪽으로 움직인 틈을 타 갈족과 강족이 서쪽을 침략하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동백은 자신과 함께 낙양으로 온 장수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물었다.
“조조의 오만불손함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구나. 그 누가 나서서 조조를 막아 내겠느냐?”
동백의 말에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나설 마음은 한가득이었으나, 감히 나서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너른 공간이 침묵에 잠긴 찰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정전을 울렸다.
“저 마초를 보내 주십시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혼쭐을 내 주고 오겠습니다!”
콧김을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바로 마초였다. 10대 때도 어엿한 무장 취급받기 부족함 없는 체격이었으나, 나이를 먹으며 더욱 단단해졌는지 건장한 체구를 지닌 동백군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린 기가 남아 있는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패기 넘치게 외친 것과 달리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마초의 모습에 동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감탄했다.
“마맹기의 패기가 경천동지할 만하구나!”
하지만 마초 혼자 보내기엔 부담이 컸다. 동백은 바로 군을 내려 주는 대신 다시 한번 장수들을 훑었다.
어린 마초가 위풍당당하게 나섰으니, 다른 장수들도 언제까지고 눈치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을 보내 달라 우후죽순으로 나섰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당장 기주를 정벌하여 태위님의 시름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조조 따위는 단숨에 토벌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장수들이 누가 더 목소리를 높이는지 경쟁하듯 스스로를 내세우며 시끌시끌할 때, 여포가 입을 열었다.
“신을 보내 주시옵소서.”
여포가 앞으로 나서서 소동백의 아래에 부복하자 그 전까지 시장바닥처럼 아우성치던 이들이 모두 입을 딱 다물었다. 여포는 동백의 앞에서 길든 맹수처럼 얌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 말을 이었다.
“소신이 지난번 부족하여 다 잡은 조조를 놓쳤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사로잡아 태위께 진상함으로써 과거의 불명예를 씻겠습니다.”
동백은 물끄러미 여포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였다면 마초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바로 제가 가겠다 나섰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잠자코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가 나섰다. 본인을 돋보일 수 있는 시기를 재 보는, 그린 듯한 정치적 숨 고르기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별생각 없이 넘겼을 테지만 상대는 여포였다.
뭔가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태위와 대장군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 대정전 내에서는 그에 대한 질문을 할 수도, 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동백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척, 태연한 태도로 명했다.
“대장군 여포는 휘하의 장수를 데리고 마 장군과 함께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
“삼가 명 받잡겠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