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어휴, 이런 데 오는 놈들은 정신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거람.”
기자는 극한 직업이다.
잠입 취재랍시고 이런 쓰레기들이 있는 곳까지 기어들어 와야 한다니.
이벨라 자작 영애이자, 기자이기도 한 리벨은 생각했다.
그녀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수도 사교계의 중심, 그중에서도 살롱의 은밀한 뒷방 복도였다.
그 안에서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인 상상도 못 할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리벨은 미성년자가 아니었으므로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딱 봐도 진상인 귀족 영식이 느끼한 미소를 날리며 방 밖으로 나왔을 때 구토를 참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 너!”
리벨의 잠입 실력은 완벽했다.
덕분에 진상은 그녀를 하인이라고 여긴 듯 불러냈다.
“예.”
그녀의 목에서는 남자처럼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검은 머리에 빼빼 마른 체형의 남자. 지금 그녀의 모습에서 평소의 자줏빛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본모습과 같은 것은 자줏빛 눈동자뿐이었다.
그녀가 기자 생활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건, 이 변신 덕분이었다.
딱 2시간, 정해진 몇 가지 모습으로 외형을 바꿀 수 있었다. 그나마도 눈동자 색깔은 바꿀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기자로 활동하기에는 충분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의 눈 색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거든!
전형적인 귀족 영애라 불리는 이벨라 자작 영애가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를 다니는 기자 일을 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터다.
게다가 이벨라 자작 영애는 외부 활동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왜냐고?
그야 이벨라 자작의 도박으로 자작가가 망했거든.
그것도 저택 하나만 남기고 쫄딱!
리벨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젠장, 빙의해서까지 밥벌이 가장 노릇 할 건 뭐람?
“칙칙한 목소리 하고는……. 살롱으로 안내해!”
기분 좋게 소리 지르는 이 자식의 머리통을 술병으로 후려갈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지만, 그럼 잠입 취재는 물 건너갈 것이다.
“결혼 앞두고 이게 무슨 신세람.”
리벨이 투덜거렸다. 물론 진상 영식을 안내해 줄 때는 친절하게 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 결혼만 하면 도박쟁이 자작하고도 안녕, 새 삶 시작이다!
그나저나 이 안에 거물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이곳으로 잠입 취재를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이 안에 텔렘 공작가의 둘째가 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있을 결혼을 앞두고 자유를 즐긴다나 뭐라나.
귀족가의 부패, 그중에서도 은밀한 살롱에서의 부적절한 유흥?
이거만큼 고발하기 좋은 소재가 없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은 앞길 한번 막혀 봐야 해!
―타타탁!
리벨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자작저로 찾아와 조신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제 약혼자를 떠올렸다.
이제 일주일 후면 결혼할 사람이었다.
“후…….”
머릿속이 정화되는 것 같다.
훈훈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같이 따스하고 상냥한 말투까지…….
“베니카, 내가 널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래, 바로 저렇게 말이야.
……어라?
“?”
리벨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내 달콤하고 상큼한 약혼자가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리벨은 제 눈을 미친 듯이 비빈 다음 다시 앞을 보았다.
“???????”
그러나 꿀 떨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여자와 놀아나고 있는 약혼자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쨍그랑!
리벨은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취재고 지랄이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뭐야, 뭐야, 아니겠지?”
그럼! 내 알콩달콩 달콤상큼한 약혼자가 저런 칙칙한 곳에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드디어 미쳤나 봐!
리벨은 취재 장소를 벗어나자마자 세상 떠나가라 깔깔 웃었다.
“내가 미쳤다!”
미쳤지! 저런 칙칙한 곳에서까지 약혼자 얼굴을 보다니! 이건 병이야! 롤란드 중독증이라고!
방금 전에 목격한 장면을 모조리 부정한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깔끔한 기분으로 이벨라 저택으로 향했다.
물론 깨끗한 이중생활을 위해, 잠입 취재를 위해 챙겨 입었던 옷도 모두 벗어 던지고 다시 우아한 귀족 영애 리벨 이벨라가 된 후였다.
내 두 번째 신분도, 남편이 될 롤란드에게만은 밝힐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론 그 비밀은 결혼과 동시에 짜잔 밝힐 생각이었다.
─벌컥!
그녀가 저택의 대문을 밀어젖혔다.
저택은 휑했다.
사용인들을 들일 돈마저 이벨라 자작이 홀랑 해 먹었으니 하녀고 자시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나마 아직 이 저택마저 날려 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롤란드, 나 왔어요!”
리벨은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
하지만 원래 이맘때쯤 자작저에 찾아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약혼자는 오늘따라 조용했다.
이 남자, 어디 갔지?
당연히 저택에는 있겠지? 응?
그냥 잠시 졸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해맑게 웃던 그녀는 그리 넓지 않은 자작저 안을 두 바퀴나 돌고 나서야 롤란드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우리 약혼자가 오늘은 안 왔을 수도 있지!”
하하하! 음! 그럼! 찾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하하하하! 자기 집도 아닌데 매일 와서 기다리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하하하하하하!
오늘따라 저택이 싸늘하네!
* * *
닷새 후.
결국 리벨은 결혼 준비가 급하다는 핑계로 그날까지 내려던 취재 기사를 제출하지 못했다.
이제 곧 남편이 될 롤란드에게 “내가 사실 그 ‘귀족가의 폭풍’으로 불리는 기자 벨이야!” 하고 말해 주면 얼마나 놀랄까?
부패한 귀족들을 고발하는 기사들로 유명해져 ‘귀족가의 폭풍’이라는 쪽팔리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존재감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롤란드도 엄청 놀라겠지?
리벨은 즐거운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대문 앞에 놓인 신문 뭉치를 발견했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도, 사용인도 없는 탓에 배달부는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앞에 신문을 던져 줄 수 있었다.
친절하시기도 해라.
“흐음.”
일단 대외적으로는 우아한 귀족 영애 리벨 이벨라인 그녀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녀가 잠든 사이 일어났을 온갖 이슈가 그곳에 쓰여 있었다.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건, 교양 있는 귀족 영애이자 기자로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펄럭.
“별일은 없었네.”
그렇게 말하며 신문지 몇 장을 넘긴 순간이었다. 그녀는 신문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응?”
[알레로 가의 베니카 영애가 깜짝 결혼 소식을 발표했다.
그간 극히 일부 귀족들만 알고 있던 결혼 소식이 공개되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베니카 영애의 결혼식은 바로 한 달 후에 진행된다.]
“알레로 가면 자작가인데, 왜 이렇게 기사가 크게 떴대?”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내리던 리벨은 제 눈을 의심했다.
[베니카 영애의 남편이 될 이는 디엘렌 가의 롤란드 디엘렌 영식으로……]
“?”
리벨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여기 왜 내 약혼자 이름이 쓰여 있는지 아시는 분?
[롤란드 영식은 이전에 리벨 이벨라 영애와의 약혼설에 휩싸인 바 있다. 그러나 기자가 이를 언급하자 롤란드 영식은 ‘그건 농담으로 했던 발언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농담?
농다아아아암?
“설마, 이놈이…….”
리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나 차인 거?
이딴 방식으로, 공개적으로 차인 거야???
그것도 롤란드 저 쓰레기한테?????
* * *
“흑…… 흐흑…….”
생각해 보면 이 괴상한 곳에 빙의했을 때부터 내 인생은 꼬여 있었어!
리벨이 소리 없이 절규했다.
이 책에 빙의하기 전에도 그녀는 기자였다. 기업의 비리를 고발하는 기자.
덕분에 낯선 이들로부터 위협도 많이 당해 봤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기자 말고 다른 일 하겠다고 그렇게나 결심했는데, 웬걸!
어느 날 눈 떠 보니 읽던 책 속으로 다이빙해서 자작 영애가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오, 귀족이야?’
그녀는 수많은 빙의 소설들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었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빙의한 소설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제대로 된 사랑은 없다>
비정한 책 제목부터 수상쩍은 이 책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망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작가가 썼을 법한 망한 사랑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남자 주인공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공은 쥬리 백작 영애를 사랑하게 된다.
권력을 멀리하고 싶은 디란타 대공의 눈에, 그녀는 권력을 멀리하고 순수하게 그를 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쥬리 백작 영애는 권력욕이 많은 인물이었고, 대공이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권력욕이 0에 가깝다는 걸 깨닫고는 그를 쌩하니 걷어차 버린다.
‘난 야망 없는 남자는 싫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엉뚱하게도 황제의 사촌인 필레 공작과 결혼해 버린다.
아니, 그럼 남주는? 주인공 디란타 대공은? 설마 다른 여주 붙여 주겠지?
그렇게 했지만, 결국 난 방망이로 뒤통수를 맞고 머리가 납작해져 버렸다.
알고 보니 황좌에 관심이 많았던 필레 공작과 짝짜꿍이 맞았던 백작 영애는 그와 함께 반역까지 저지르는데, 그런 그녀와 필레 공작의 목을 베어 황가를 수호하는 건…….
다름 아닌 남주인공 디란타 대공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로맨스는?? 로맨스는???
이건 로맨스판타지가 아니라 ‘노’맨스판타지였다. 로맨스라고는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은 노맨스판타지.
그 와중에 주인공이라고,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의 날카로운 성정은 잘 보여 줬다.
반역이 일어나는 와중 그의 외모에 반한 이벨라 자작 영애가 그를 스토킹하다가 걸린 것이다.
당연히 대공은 인정사정없이 자작 영애의 모가지를 날려 버렸다.
그걸 볼 때까지만 해도 그냥 ‘주님, 또 엑스트라 한 마리 갑니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설마 그 이벨라 자작 영애가 될 줄은 몰랐지.
─벌컥벌컥!
리벨은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지금 취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