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벨라 자작 영애가 된 것까진 좋았다. 자작가가 알고 보니 이벨라 자작의 도박으로 쫄딱 망해서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도…… 그래, 버틸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이벨라 자작 영애 리벨에게는 변신 마법 능력이 있었으니까.
다음 생에는 분명 기자 일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기가 막힌 능력이 있으면 또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잖아!
그 와중에 몇 가지 사건 사고도 있었지만, 다행히 사랑스러운, 아니 사랑스러웠던 약혼자 놈도 만났다.
인제는 좀 행복해지는 줄 알았더니…….
“개꿈이야, 이거…….”
리벨이 웅얼거렸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귀족들이 자주 이용하는 세이프티 바였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는 곳이었다.
바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규율은 꽤나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언젠가 조사해 보고는 싶지만, 높은 귀족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니만큼 리벨조차도 이곳을 잠입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아아아아 꿈이라고오오오오!”
그만큼,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울기엔 안성맞춤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다시 한번 잔을 기울였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손님?”
바텐더는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아무래도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아 보여서였다.
그는 리벨에게 조용히 칵테일을 내밀었다.
칵테일의 이름은 ‘숙녀의 잊고 싶은 밤’. 무엇이든 슬픈 일이 있으면 잊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위로는 리벨에게 닿기엔 너무나도 옅었다. 리벨은 벌써 ‘숙녀의 잊고 싶은 밤’을 다섯 잔째 마시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어?”
진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헤어지고 싶으면 그냥 헤어지자고 하든가!
네가 거기서 베니카인지 베짱이인지 하는 여자랑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난 개꿈인 줄 알았어!
그런데 뭐? 결혼?
세상에, 세상 사람들 여기 보세요!
이렇게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공개 실연당한 사람 있으세요?
난 내가 곧 결혼할 줄 알았지~
내가 밤에 술 까고 병나발 부는 건 남편이랑 침대 위에서 할 줄 알았지~
그게 모레 밤인 줄 알았지~
근데 난 차였네~ 술 까고 병나발 부는 건 생판 모르는 남정네 옆에서였네~ 그게 오늘 밤이었네~
“진짜…… 개X끼…….”
울고불고했더니 이제 더는 나올 눈물도 없는 것 같았다.
리벨은 어기적어기적 바를 짚고 일어섰다.
옆자리의 남자가 눈에 띄었지만, 누군지 알아볼 정신도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는 세이프티 바다. 상대가 누구든 알 게 뭐람.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 사람이 누구든 롤란드 그 개만도 못한 새끼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점이다.
“흑…….”
바를 짚은 손이 비틀, 옆을 짚었다. 본의 아니게 남자를 살짝 밀치게 된 것도 같았다.
가면 너머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바로 세워 주고는 다시 제 잔을 잡았다.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는데 달콤하게 느껴지다니, 롤란드 그놈이 개놈이기는 한가 보다.
리벨은 허탈하게 웃었다.
“저기요.”
술에 취한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말해 보라는 듯.
리벨이 픽 웃었다.
취해서 정신없지만, 이 사람이 롤란드 그놈보다는 낫다는 건 확실하다!
“나 오늘 차였어요.”
“그렇군요.”
남자는 지나가는 돌멩이 보듯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리벨이 픽 웃었다.
“신문에 결혼 발표가 났는데, 나 말고 다른 여자 이름이 쓰여 있더라고요?”
“오.”
그건 남자도 좀 감탄스러웠던 모양이다. 그의 감탄사에 리벨이 웃었다.
“이렇게 차인 사람 처음 보죠? 그렇죠?”
리벨이 비틀비틀 일어나 그를 보며 말했다.
남자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벨이 웃었다.
“어이없죠? 뭐 그런 놈이 있나, 싶죠?”
남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완전 리액션 끝내주네! 롤란드 그놈보다 훨씬 낫네!
“친절하셔라. 그놈보다 훨씬 낫네!”
리벨이 깔깔 웃으며 남자의 허벅지를 툭 쳤다.
“나랑 결혼할래요? 그놈한테보다 더 잘해 줄게요.”
난생처음 보는 남자도 롤란드 그 자식보다는 사랑해 줄 자신이 있었다.
리벨이 깔깔 웃으며 하는 말에 남자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좋습니다.”
이 남자는 역시 리액션의 제왕이 확실했다.
리벨은 그 뒤로 필름이 끊겨 버렸다.
* * *
리벨은 뻑뻑한 눈을 떴다.
“으…….”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왜 이렇게 몸이 찌뿌둥하고 무겁지? 어제 내가 뭘 했더라?
그러니까 어제, 롤란드 그놈한테 어이없게 차이고 나서…….
“나쁜 새끼…….”
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크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저택에서만큼은 리벨 이벨라, 우아한 귀족 영애여야 했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집안을 홀랑 말아먹은 주제에 여전히 겉멋만 부리는 아버지, 이벨라 자작이 난리 난리를 칠 테니까.
“근데 내가 어제 어떻게 들어왔더라?”
신문에서 롤란드 그 자식이 베니카 영애와 결혼한다는 기사를 읽고 어이가 없어서 그길로 세이프티 바까지 갔던 건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뒤로 기억이 없었다.
“…….”
설마 잔뜩 취한 채로 저택까지 걸어 들어온 거야? 그러면 좀 곤란하겠는데?
하필 그렇게 공개적으로 차인 내가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저택으로 들어간 걸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사교계에 괴이한 소문이 날 것이 뻔했다.
그럼 기자들이 신나서 ‘제대로 망신당한 이벨라 자작 영애, 불길한 선택 우려돼’ 같은 기사를 써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이미 났겠네.”
리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어제처럼 배달된 신문 몇 개가 있었다.
“어디 보자…….”
방 안으로 들어온 리벨이 촥 소리 나게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황가뿐 아니라, 공작가 등 유서 깊은 귀족가에 아부하는 뻔한 기사 몇 개를 지나 아래쪽의 나름 큰 기사를 발견했다.
[“나는 롤란드 영식의 약혼녀” 거짓말 들통난 리벨 영애, 공개적 망신]
“제목 한번 기깔 나게 뽑았네.”
리벨이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리벨은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귀족가의 일을 발표한 만큼 분명 가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일 테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슈 기자]
“……처음 보는 애네?”
리벨은 기자 벨로 활동하며 어지간히 유명한 기자들의 이름은 다 알게 되었지만, ‘슈’라는 기자명은 낯설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기자란 뜻이다.
[리벨 이벨라 자작 영애가 롤란드 디엘렌 영식과 약혼했다는 거짓말을 했던 사실이 들통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리벨 영애는 지난 2월, 중부 사교계 살롱에서 “롤란드 영식과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이라는 발언으로 롤란드 영식과 혼인설에 휩싸인 바 있다.
그러나 어제 베니카 알레로 자작 영애가 ‘곧 롤란드 디엘렌 영식과 결혼식을 올린다’라고 발표함으로써 리벨 영애의 허풍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리벨 영애와의 혼인설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롤란드 영식은 ‘그것은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이벨라 영애는 충격을 받아 저택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증언이 뒤따랐다.
아직 이벨라 가의 공식 입장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이 소식을 접한 제국민들은 ‘이미 다른 영애와 결혼이 정해진 영식과 약혼했다고 거짓말하다니, 충격적이다’, ‘리벨 영애의 뻔뻔한 거짓말에 베니카 영애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안타깝다’, ‘롤란드 영식도 난처했겠다’라며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베니카 영애와 롤란드 영식의 정확한 결혼 날짜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콰직!
리벨은 신문을 구겨 버렸다.
슈인지 뭔지, 리벨이 비틀거리면서 어디론가…… 즉, 세이프티 바로 향하는 걸 보긴 본 것이 분명했다.
그 뒤로는 세이프티 바의 보안 때문에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고.
“롤란드으으으!!”
리벨 이벨라의 이름이 신문에 이렇게 커다랗게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번에 약혼설이 터졌을 때도 신문 맨 마지막 면쯤에 ‘사교계의 말말말’란에 올라왔었더랬다.
그런데 이번엔 이렇게나 크게 박힌다고?
“이게 무슨 쪽이야!”
한동안 리벨 이벨라 모습으로는 밖으로 나가면 안 되겠다.
리벨은 변신할 수 있는 외형 몇 가지를 떠올리며 방 밖으로 나섰다.
“……그래, 일단 식사나 하자.”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습니까?
─달칵.
또각또각, 걸음을 옮겨 식당으로 향한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크흠.”
원래 도박하느라 집에 들어오는 일이 없던 이벨라 자작이 웬일로 복도 끝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꽁지 빠지게 도망쳐 버렸다.
“?”
고개를 갸웃한 리벨은 식당으로 향했다.
뭐야?
* * *
─달그락.
오늘 아침은 어제 남은 스튜를 다시 끓인 것에 빵을 찍어 먹는 것 정도였다.
스튜도 다 떨어져 가네.
“이번 기사로 들어온 고료가 얼마나 남았더라…….”
생각에 빠져 빵을 들어 올린 리벨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벨라 자작 영애 계십니까?"
누가 날 이렇게 공손하게 찾지?
식당 창문 바깥으로 보니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남정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저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귀족가에 사용인 하나 없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게…… 저희 집안에는 좀 금전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하하!
“근데 어디서 나왔대?”
리벨은 먹던 것을 내려 두고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아, 이벨라 자작 영애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뉘신지?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남자가 갑자기 웬 편지 봉투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들어 보였다.
“!”
리벨은 그걸 보자마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직인이 찍힌 종이는 버릇없이 받았다간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황가의 직인이다.
저걸 직접 전할 정도면 이 사람도 황가에서 나온 사람일 터였다.
근데 저저저저게 왜 나한테?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것입니다.”
무릎을 꿇은 내 앞으로 편지봉투가 내밀어졌다.
“리벨 이벨라, 폐하의 지엄한 명을 받듭니다.”
그러면서 받은 편지 봉투에는 이상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혼인 승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