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편지에 찍힌 직인을 자세히 보니, 무려 그냥 황가도 아니고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보통 사람이면 몰랐겠지만, 그녀는 기자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게 왜 나한테 오지?
의아해하며 펼친 공문의 내용은 가관이었다.
[리벨 이벨라 영애의 혼인을 다음과 같이 인가한다.]
“?”
혼인이요? 혹시 황가에서 사람 골리려고 작정한 건가?
너만큼 신통한 방식으로 차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놀리는 건가?
손에 힘이 들어갈 뻔한 리벨이 종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과 리벨 이벨라 영애가 영혼의 가약을 맺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승인한다.]
디란타 대공이…… 여기서 왜 나와?
저기, 남편 이름이 바뀌었는데요? 그것도 심각한 수준으로 바뀌었는데?
이 제국 황태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둘째 아들이자, 황제의 동생인 디란타 대공과 이벨라 가의 천덕꾸러기가 만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론은 하나다.
요즘 사기 수법이 늘었네.
“…….”
그런데 황제 폐하를 사칭하는 간 큰 놈이 있다고?
난 눈앞에서 황가 사람이오, 하고 주장하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 예, 명 받들었습니다.”
그래도 황가 직인 앞에선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령 가짜라서 저놈이 사칭죄로 잡혀간다고 해도, 어쨌든 황가의 직인 비슷한 거 앞에서 버릇없이 굴었다는 게 알려지면 내 모가지도 순식간에 달랑달랑해진다.
“그럼.”
―척!
내게 편지를 전한 남자는 절도 있게 몸을 돌려 이벨라의 정원을 빠져나갔다.
바깥에는 본새 나는 기사 몇 명도 대기하고 있었다.
“……진짠가?”
그 당당한 꼬라지에 잠시 의구심도 들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참 나, 여기서 디란타 대공이 왜 나와?”
식당으로 다시 돌아간 리벨은 편지를 대충 접어 식탁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진짜 황실에서 보낸 혼인 승인서라면 모를까, 가짜라면 곱게 대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리벨에게는 디란타 대공과 얽히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원작에서 이벨라 자작 영애가 바로 대공을 스토킹하다가 쓱싹당하지 않았는가?
접근하지 않는 게 최고였다.
대체 그 여자는 스토킹 같은 걸 왜 한 거야?
“아니 그리고 이놈들은 황실을 사칭해? 모가지가 여러 갠가? 히드라야?”
그녀는 편지에서 시선을 돌리고 스튜에 빠진 빵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손에 스튜 안 묻히고 젖은 빵 구출하기에 골몰하던 그녀는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스푼을 들었다.
“별일도 다 있네, 진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하지만 그건, 그녀에게 일어난 기묘한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 * *
리벨 앞으로 온 사기 편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심지어 레퍼토리도 달라졌다.
[리벨 님을 디란타 대공저로 초대합니다]
거기에는 대문짝만하게 디란타 대공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
리벨은 기자이지 짝퉁을 만드는 업자가 아니었으므로, 편지에 찍힌 직인의 진위를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정황상의 증거는 있었다.
일단 리벨과 디란타 대공은 전혀, 아주 전혀, 롤란드의 한 올만 한 양심만큼도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편지는 사기였다.
“요즘 이런 걸로 사기 치는 집단이라도 생긴 건가?”
리벨은 편지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둑 길드에서 별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이야기야 기사로도 몇 번 다뤘지만, 이런 간 큰 놈들은 처음이었다.
무려 황제 폐하를 사칭한 것도 모자라 이번엔 현 제국의 실세 중 하나인 디란타 대공이었다.
실제론 어떤지 몰라도 형인 황제와의 사이도 원만하다 알려져 있고, 그 어머니인 황태후에게 받는 총애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황태후가 디란타 대공에게 생일 선물로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이미 리벨이 기사로 쓰기 귀찮을 정도로 유명했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람?”
그 디란타 대공가의 문양까지 사칭한다고?
리벨은 미심쩍은 얼굴로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진짜는 아니겠지?”
진짜일 리가.
그건 롤란드가 사실 베니카와의 결혼은 깜짝 이벤트였다면서 마차 가득 꽃다발을 가져와 저택 앞에 들이부으며 다시 청혼할 확률보다 적은 확률이었다.
한마디로 미친 소리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미친 짓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아니, 좀 더 대담해졌다.
* * *
─덜컹!
이벨라 자작저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추었다.
금테를 두른 마차는 누가 봐도 화려한 외출용 마차였다. 옆에는 말을 탄 기사도 함께였다.
일방통행인 길에서 마차끼리 부딪쳤을 때 기세가 밀린 마차가 길을 비켜 준다고 하는데, 저 마차는 단 한 번도 길을 비켜 준 적이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기세등등하고 화려한 마차였다.
하긴, 그 마차의 전면에 박힌 디란타 대공가의 문양을 보면 지나가던 맹수도 꼬리를 말고 구석으로 찌그러질 것이다. 대공가의 위세는 그만큼 높았다.
그러니까 그런 곳을 사칭하는 놈은 간이 부은 게 틀림없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자 무시할 수도 없었다. 리벨도 때마침 저택 현관을 지나던 길이기도 했고.
“고귀하신 분께 인사 올립니다.”
온몸으로 대공가의 기사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남자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 연기 제대론데?
“실례지만,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금은 리벨 이벨라, 대외적으로 귀한 자작 영애였으니 ‘저기, 어디서 나오셨어요?’ 하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디란타 대공가의 기사, 아렌입니다.”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찜찜한 얼굴을 숨기고 말했다.
“이 한미한 가문에서 대공가의 방문을 받은 것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요컨대 대공가에서 이런 곳에 신경 쓸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혹여 대공님께서 실수라도 하셨다고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러운 소문이 날까 두렵습니다. 돌아가세요.”
대공님이 실수했을 리 없으니 그냥 가라.
“보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칭했다고 기사 안 낼게. 그냥 가.
리벨은 마음을 담아 친절하게 말했다.
“실수하신 일이 없으니 걱정은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저는 대공비님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대공비라고? 리벨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비 전하가 되실 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최근 저희 이벨라 가에서는 그런 귀한 손님을 받은 적이 없으니 돌아가세요.”
그 귀하신 분이 누군진 몰라도 여기 없으니까 가라.
리벨은 곱게 돌려 말했다. 하지만 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제 앞에 계십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기꾼이네!
리벨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가 말했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로서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네요. 이대로라면 실례되게도 자작가의 사람을 대공가로 보내어 마차가 잘못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지도 몰라요.”
우리 저택에는 그런 사람이 올 일 없다니까.
이대로면 대공가에 이른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알아듣겠지?
리벨은 슬쩍 시선을 내려 아렌을 보았다.
하지만 아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마차 옆으로 비켜섰다.
“그럼 직접 전하러 대공가로 가시겠습니까?”
“네?”
뭐라굽쇼?
“오르시면 귀하게 모시겠습니다.”
―척!
아렌이 한쪽 무릎을 꿇는 소리가 울렸다.
리벨은 멈칫했다.
아니, 사기를 이렇게 본격적으로 쳐야 돼?
하지만 대공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까지 준비했으니 마냥 개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행인 건 이벨라 자작이 도박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다는 것 정도였다.
그가 마차를 봤으면 놀라 뒤집어졌을지도 몰랐다.
“알겠어요.”
결국 리벨은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마차로 향했다.
아렌은 한결 안심했다는 얼굴로 그녀를 모셨다.
“그럼 조심에 조심을 더하여 모시겠습니다.”
그가 직접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엿보이는 마차 안쪽도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부석에 앉은 자도 격식을 차린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귀족들 하는 건 훔쳐봐 가지고!
─덜컹!
마차 문이 닫히자 리벨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2의 직업이 눈을 뜰 때였다.
어차피 잠입 취재는 익숙했다.
이렇게 된 이상 특종이 날 쫓아왔다 치고 이 사기꾼들의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인데…….”
리벨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사기꾼들이 사전 조사는 제대로 했는지, 이 방향은 디란타 대공저로 가는 방향이 맞았다.
그리고 그건 10분 후에도,
20분 후에도,
1시간 후에도,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했습니다.”
―덜컹!
마차 문이 열릴 때쯤에 리벨은 아까 봤던 이벨라 자작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는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황궁의 본궁 건물 다음으로 위용을 자랑한다는 디란타 대공가의 저택이라면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특히 기자 벨로서는 몇 번 잠입 취재까지 온 적이 있었다.
그야 대공에 대해 기사까지 썼으니까 당연…….
……설마, 그거 들켰나?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일전에 모종의 사건도 있었으니, 대공가의 정보력이면 기자 벨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자의 목을 땄다간 그대로 대공가의 평판이 바닥에 처박힐……
“모시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근데 보통 대공의 밤 능력이 의심된다고 폭로한 기자를 대공비로 모시면서 끌고 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