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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7)화 (7/167)

제7화

“그, 그게 아니라.”

아니 일단 인사부터 올려야지!

황태후는 황가의 웃어른답게 예의범절에 까다롭다고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걸어 나가는 사이에 목과 몸이 분리되기 딱 좋았다.

“귀하신 피,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넙죽 엎드리기!

리벨이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황태후가 인사를 받는다는 뜻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인사를 받자 리벨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뭐라고 하지?

사실 제 기억엔 없지만 댁 아들은 저랑 아드님이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그때 제가 프러포즈를 했는데 댁네 아들이 무지막지한 추진력으로 혼인 승인까지 받아 버리는 바람에 명목상으로는 대공비가 맞는답니다! 하하하하!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없던 일로 할 방법은 없을까요?

……라고 황태후 앞에서 씨불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벨은 땀이 나서 차갑게 식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후 폐하는 패션에 민감하다고도 했는데.

리벨의 시선이 새삼스럽게 제 옷을 훑었다.

최신 유행으로부터 3년은 뒤떨어진 것 같은 낡은 드레스. 관리되지도 않은 끝단. 누렇게 변색된 레이스.

음, 망했다!

“흐음…….”

황태후의 침음이 리벨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리벨은 드레스를 말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망했다! 망해도 대차게 망했다!

아무리 혼인 승인이 났다고는 하지만 황태후의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들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벨이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많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기다려요?

리벨이 멈칫했다. 그리고 황태후의 수많은 악명을 떠올렸다.

그녀는 황가의 위세가 가장 높을 때 반역을 저지른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거기엔 조건이 있었다.

‘절벽에서 맨몸으로 떨어져 살아남는다면, 너희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으마.’

그렇게 자비롭게 말하며 절벽으로 반역자들을 보냈다고 했다.

반역자들은 그래도 운 좋으면 살 수 있겠구나, 하며 기뻐했지만 절벽 아래를 보고 절망에 몸부림쳤다고 했다.

절벽 아래에는 굶주린 상어들이 수십 마리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후는 친절하게도 그들의 몸에 얇은 상처까지 하나 내어 그들을 떨어뜨렸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나도?’

리벨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황태후라면 ‘내 아들의 아내가 되었다고? 만약 기차와 달리기 시합을 해서 네가 빠르다는 걸 증명한다면 인정해 주지.’ 같은 조건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못 하면 죽음이다!

“시스.”

굳어 있던 리벨은 디란타 대공의 이름이 시스테인 폰 디란타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대공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제 어머니에게 닿았다.

“잠시 응접실에 있어 주겠니? 나는 대공비와 할 이야기가 있단다.”

그 말에 디란타 대공은 가만히 황태후를 쳐다보았다.

황태후는 조금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안심하고 가렴.”

─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란타 대공은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제국의 호랑이 앞에 서 있는 건 리벨 혼자뿐이었다.

아니, 그래도 서류상 당신 아내인데 나 좀 빼 주고 가지!

“시스가 이렇게나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가가 처음인데.”

황태후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리벨이 움찔했다.

그때, 붉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황태후의 손이 그녀의 턱 아래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렴.”

장식된 손톱 끝이 목을 베어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리벨은 떨리는 시선을 황태후의 턱 아래까지 간신히 들었다.

진짜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심지어 황태후에게 걸렸으니 마지막도 온전치 않을 터였다.

상어에게 전신을 뜯겼다는 반역자는 그대로 나름 자비롭게 죽은 축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아프진 않았을 테니까.

“목이 무거운 아가로구나.”

‘당장 가볍게 만들어 줄까?’ 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서 리벨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황태후의 주홍빛 눈동자와 리벨의 눈이 마주쳤다.

황태후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아가에게 내가 부탁할 것이 있는데.”

마치 피라도 마신 것처럼 새빨갛게 칠해진 입술이 소름 돋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뭘 부탁하시는데요?

혹시 맨몸으로 대공령 몬스터 멸종시키기? 황태후 폐하의 말들이 쉴 수 있도록 대신 마차 끌기?

생각나는 것마다 죄다 하다 죽을 것 같은 것들뿐이었다.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을 때, 빙그레 웃은 황태후가 말을 이었다.

“들어줄 거지?”

안 들어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리벨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건 조건을 듣고 자시고도 없었다.

여기서 ‘안 됩니다!’ 했다간 일말의 살아남을 가능성 1%도 저버리고 그대로 다음 생 직행 기차를 타는 거니까.

“지켜본 대로 씩씩하구나.”

황태후가 웃었다. 그녀가 리벨을 이끌었다.

긴 손톱 끝이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가, 부드럽게 끌어 잡았다.

근데 뭐라고요? 지켜보셨다고요?

리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황태후가 방 안의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어느새 놓여 있는 찻잔과 주전자가 보였다.

리벨은 손수 찻잎을 띄우려는 황태후를 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올리겠습니다.”

“어머, 예의 바르기도 하지.”

황태후가 손을 거두자, 리벨은 떨리는 손으로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예의 바르게 굴었으니, 곱게 죽여 주시겠지?

“시스가 조금 무덤덤해서 힘들지?”

힘들고 자시고 힘든 거 느낄 시간만큼 만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리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잘 대해 주세요.”

정말 어느새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대화가 되어 버렸다.

이이이게 아닌데!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알아. 내 아들이 무뚝뚝한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차를 무슨 정신으로 따랐는지도 모르겠다.

리벨이 찻주전자를 정리하자, 황태후는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어미인 나나 제 형에게도 감정 한번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단다.”

‘형’이라면 제국의 현 황제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그였지만 황태후의 입에서 나온 황제는 그저 아들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뭘 원하는지, 뭘 가지고 싶은지,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황태후는 옅게 웃었다.

“딱, 아가 하나 빼고 말이야.”

“네?”

거기서 갑자기 제가 왜 나오나요?

예의도 잊은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목숨줄이 달랑달랑하게 절벽에 매달려 있는 제 모습을 자각한 탓이었다.

다행히 황태후는 그녀를 탓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혼인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왔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드디어 시스가 원하는 것이 생겼구나, 싶어서.”

황태후가 빙그레 웃었다.

“그만 기쁜 마음에 새벽에 아들에게 연락해서 혼인을 승인하라고 해 버렸단다.”

예? 아들이라면 혹시 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새벽에 황제 폐하를 깨워서요?

“시스가 관심을 갖는 것이 생긴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황태후는 예쁘게 웃었다.

“부디 도망가지 않길 바라야 할 텐데. 그렇지?”

그 말인즉슨 도망가면 목을 따겠다는 소리였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요.”

아니, 말을 너무 귀족답지 않게 했나?

리벨은 진정하려 애쓰며 말을 덧붙였다.

“이벨라 가의 크나큰 영예가 될 거예요.”

“이런.”

그녀의 대답에 황태후 리엔은 눈살을 찡그린 채 웃었다.

“편하게 말해도 된단다.”

말 놓으란 소리는 아닐 테고?

리벨이 멈칫했다.

“아가에 대해 조사를 조금 했거든. 황가에서 아예 모르는 사람을 받을 수는 없으니.”

망했다!

리벨은 표정은 관리해도 안색마저 관리할 수는 없었다.

아냐, 괜찮아, 리벨!

그녀는 침착하려 애썼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편집국장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만약 황태후 폐하께서 내 정체를 알았다면 내가 지금껏 무사했을 리 없지!

게다가 최근에는 다른 신문사에 기사를 투고한 적도 없으니 내가 누군지 조사하려고 해도 시간이 걸릴 텐데…….

“…….”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무색하게도 황태후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상대는 그 정보망의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황태후 리엔이었다.

과연 안 들킬 수 있을까?

일개 가문도 아니고, 황태후의 정보원들인 ‘황태후의 그림자’들이, 찾지 못하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슬쩍 시선을 마주치니, 아니나 다를까 황태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혼식은 언제가 좋겠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단다.”

아니 무슨, 아무리 디란타 대공 전하가 황성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지만, 황가의 피를 이은 사람의 결혼식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려고 하십니까?

리벨은 얼굴이 좀 하얗게 질린 채 말했다.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충분히 만족스러우실 만큼 규모가 있어야…….”

“요컨대 쪽팔리게 날치기로 결혼할 순 없다는 거로구나.”

뭐가 팔려요?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황태후가 예쁘게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렴. 근래 오십 년 이내에 있었던 그 어떤 혼인보다도 화려하게, 시스도 아주 조금은 놀랄 수 있게 준비해 볼 테니. 그럼 아가도 섭섭하지 않겠지?”

달칵.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몰아냈다.

“아가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빠르게 하는 게 좋겠어.”

아니, 이 집안은 왜 이렇게 결혼에 적극적이야?

“그……, 황태후 폐하. 정말 매우 죄송스럽게도 제가 감히 올려야 할 말씀이.”

리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 편히 하래도.”

그렇다고 말을 놓을 순 없잖아요, 폐하.

리벨은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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