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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8)화 (8/167)

제8화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단다.”

황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리벨을 보았다.

그리고 찻잔을 들고 있는 리벨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리벨은 마치 칼날이 손등에 닿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가의 직업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그래서 황태후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들었다.

“네, 네?”

“그 신문 기사는 나도 인상 깊게 봤거든.”

황태후의 말에 리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슨 기사요? 아니, 직업이요?

역시나 황태후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리벨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건.”

“알아. 무슨 사정으로 썼는지도 짐작이 가지. 아가가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황태후가 빙그레 웃었다.

“내 아이의 밤 능력에 대해서는 결혼 생활 중에 차차 알아보는 것으로…….”

“그그그건 좀.”

리벨은 결국 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펴 보였다. 황태후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 아들이, 아가에 비해 부족한가?”

눈부신 미소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물론 리벨의 앞날도 눈이 멀도록 새하얗게 지워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리벨은 두 손을 들었다.

“아닙니다. 완벽하시죠, 넵.”

결국, 귀족 리벨 이벨라가 아니라 기자 벨로 돌아와 버렸다. 어차피 상대는 그녀의 정체를 다 아는 황태후였다.

황태후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 기사를 탓할 생각은 없어. 탓하더라도 엉뚱한 의심을 받은 내 아들이 해야겠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야말로 시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아무 반응도 없어서 아쉬웠어.”

그래도 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는데.

눈살을 찌푸린 황태후가 다시 리벨을 보았다.

“그래도 화가 나긴 한 것 같더라. 그때 대공저의 의자 몇 개가 부서져 날아갔다고 들었거든.”

황태후는 제 손을 천천히 쥐어 보였다. 디란타 대공이 이렇게, 제 의자를 부숴 버렸다는 것처럼.

리벨은 그 손에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 아들이 조금 더 반응할 수 있도록, 좋은 기사를 써 주지 않겠니?”

“혹시 저도 대공저에 있던 의자처럼 으스러지라는 말씀이신지…….”

결국 뱉어 버렸다! 말해 버렸다고! 리벨이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황태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기사든, 다른 어떤 것이든 좋아. 내 아들의 감정을 깨워 줘. 그 아이가 어렸을 때처럼, 웃고, 울고, 원하는 것을 말하고, 제가 원하는 사람과 어울리면서 인생을 즐기게 해 줘. 그게 내 부탁이야.”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황태후는 찻잔을 마치 디란타 대공이라는 것처럼 천천히 쓰다듬었다.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자, 황태후는 그녀의 눈빛보다도 더 눈부시게 웃었다.

“아가, 난 부탁을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

그야 부탁을 거절한 놈들이 모두 죽었으니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를 믿고 있단다.”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부탁은 거기까지야.”

“그…….”

리벨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대공 전하께서 감정을 좀 폭넓게 드러내시도록, 도와 드리라는 말씀이시죠?”

“맞아.”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파에 등을 나른하게 기대었다. 여유로운 지배자의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줄 수 있고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지원해 줄 수 있어. 결혼 생활 중에 시스의 감정을 완전히 깨운다면, 그 이후엔 너희의 마음에 따라 이혼해도 상관없어.”

그녀가 눈을 빛냈다.

“얼마든지 날뛰어도 좋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짓을 해. 내 아들이 웃든, 분노하든, 어떤 감정이든 드러내게만 해. 무엇이 아가를 위협하든 내가 직접 보호해 줄 테니.”

시스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가뿐이니, 영애가 적임자야.

그렇게 말한 황태후가 손을 펼쳐 보였다.

“아가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는다고, 나, 황태후 리엔 폰 아디엘라 다웨인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황태후 리엔의 비호.

황족의 이름을 건 약속은 결코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리벨은 멈칫했다.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목숨을 위협하지도 않겠다는 소리였다.

그…… 문제의 기사도 탓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태후 리엔은 악녀로 이름 높았지만,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다.

진실을 감춘 적은 있어도.

마치 상어 밥이 된 반역자들에게 자비 아닌 자비를 베풀었을 때처럼.

하지만 다시 말해 그녀가 입 밖으로 낸 말은 거짓이 없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리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비호하겠다는 말.

“이런 걸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리벨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물어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황태후는 이야기해 보라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건가요?”

황족의 이름을 걸면서까지.

디란타 대공이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분명 오래된 어떤 일이 그의 감정을 틀어막아 버렸을 것이다.

그걸 만난 지 불과 며칠 되지도 않은 리벨이 낫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만용에 가까웠다.

“내게 그런 걸 물어보는 당돌한 면 때문에 내가 너를 선택한 거지.”

황태후가 웃었다.

“지금까지 시스를 뒤흔들 만큼 파격적인 사람은 없었거든. 당연하겠지. 그 애는 황족으로 태어나 귀한 피로 자랐으며, 그 애를 거스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을 테니까.”

그녀가 리벨을 가리켰다.

“하지만 너는 달라. 기자 출신의 너는 보통의 귀족 영애는 생각할 수 없는 당돌한 짓을 하지. 나는 시스가 다른 사람들처럼 당황하길 원해. 네가 하는 일에 분노할지도 모르지. 반대로, 어쩌면 그 애가 너를 불타오르게 사랑할지도 몰라.”

“아뇨, 그건 좀.”

리벨은 아주 단호하게 손을 들어 보였지만, 황태후는 웃기만 했다.

“어떤 것이든 좋아. 그 애의 머리꼭지가 돌아 버리도록 미친 짓을 해도 나만은 네가 미친 아이가 아니란 걸 알아줄게. 황가의 비호가 무엇인지 똑똑히 맛보도록 해. 대신 너는 반드시 내 아이가 감정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거야. 그거면 돼.”

황태후는 리벨에게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손을 펼쳐 보인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혼인 승인도 되었으니 시스가 자작 부부와도 만나야겠구나. 이벨라 자작이 아주 곤란해하겠는데.”

황태후 리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리벨이 느끼기에도 서늘한 눈빛이었다.

“자작이 얼마나 한심하게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단다.”

그녀가 펼쳤던 손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더 대공비의 체통을 해칠 짓을 한다면, 조치를 취할 생각인데…….”

죽이시게요?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물론 빙의한 리벨에게 이벨라 자작은 사실상 집주인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집주인과 하숙인 정도의 관계였다.

그것도 돈을 시도 때도 없이 뜯어 가는 악덕 집주인과 그에게 시달리는 하숙인.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황태후의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결국 도구일 터다. 필요가 없으면 목이 날아가 버릴.

리벨이 손을 꽉 쥐었다. 황태후가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까지 저택에서 무엇이었는지는 잊도록 해. 네가 대공비로서 시스 옆에 서는 순간부터, 자작도,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니.”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고 싶은 걸 하렴. 특히, 네 전 약혼자에게도.”

“……알고 계셨군요.”

롤란드 이 개새끼!

리벨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흔치 않은 결별 방식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은 나도 애독하는 신문이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후는 손수 신문을 가져와 리벨 앞에 내려놓았다.

그 문제의 이혼 기사를 썼던 사람, ‘슈 기자’라는 이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시스와의 혼인이 네게도 좋은 소식일 거라 믿었지. 제일 확실한 복수는 가장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니까.”

황태후가 기사를 가리켰다.

“베니카 영애와 롤란드 영식이 결혼한 것도 다 그런 맥락이었겠지. 신부 측의 가문이 꽤 커다란 상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야.”

벌써 그것까지 조사를 마친 모양이었다. 리벨이 멈칫했다.

롤란드의 이름에 열이 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롤란드에게 쏟은 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분명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대했으며, 그에게는 기자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기도 했다.

그 뒤로 이어진 일이 워낙 스펙터클해 잠시, 아주 잠시 묻어 두고 덮어 두었던 분노였다.

롤란드는 보란 듯이 베니카와 결혼했고 리벨과의 약혼을 ‘약혼설’로도 모자라 ‘농담’이라고 일축했다.

지금은 얼마나 알콩달콩 연애질을 하고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베니카.’

그날, 잠입 취재를 갔던 곳에서 꿀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르던 롤란드의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롤란드가 그녀에게 더없는 치욕을 안겨 준 것도 사실이었다.

디란타 대공과 우연히 엮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최악의 시간을 맛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공개적인 개망신을 당하고 매장당한 영애는 귀족가의 역사상 처음일 테니까.

“…….”

그녀를 보던 황태후가 눈을 빛냈다.

“내가 작은 보수를 제안하지.”

생각에 잠겨 있던 리벨은 황태후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기사를 쓴, 슈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니? 롤란드라는 자에게, 네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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