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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화 (9/167)

제9화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리벨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황태후가 눈부시게 웃었다.

“물론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선택은 천천히 해도 좋아. 하지만 나는, 내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울음이든, 웃음이든 찾았으면 해.”

그녀가 신문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 말뜻을, 현명한 아가는 알아들을 것 같구나.”

악명 높은 황태후 리엔이다.

웃으면서 사람을 묻어 버린 과거는 이미 셀 수도 없이 유명하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 이 거래 아닌 거래는 리벨에게 불리한 것이 없었다.

한 공국의 대공비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디란타 대공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시어머니인 황태후는 더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에게 감정을 되찾아 줄 것.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도 좋다.

황태후가 리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탁할게, 아가.”

결국, 리벨은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  *  *

리벨이 방 안으로 들어간 직후, 디란타 대공 시스테인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리벨에게 벗어 주었던 제 겉옷을 손에 들고 있는 채였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방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치 그렇게 보면 문 너머가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대공 전하, 응접실까지 모시겠습니다.”

황태후의 방 앞을 지키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거절하자 기사는 물러났지만, 그가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는 황태후 리엔이 귀히 아끼는 둘째 아들이었다.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불호령 이상의 무언가가 떨어질지도 몰랐다.

“전하.”

시스테인은 손을 들어 기사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는 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기사는 난감해했지만 차마 귀한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스테인은 문 안에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과의 교류를 극도로 꺼렸던 그를 유일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그 사람을.

그날 밤, 그녀가 제 위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던 그 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그날을 회상했다.

*  *  *

리벨 이벨라와 보냈던 하룻밤.

원래 왁자지껄한 것을 싫어하던 시스테인이지만 그날은 유독 조용한 곳을 찾고 싶었다.

그가 세이프티 바에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원래 세이프티 바는 그렇게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탕!

거칠게 잔을 내려놓은 여자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아아아아 거짓말이라고오오오오오!”

그때까지만 해도 시스테인은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요. 나 오늘 차였어요.”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별달리 답해 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결혼 발표가 났는데, 나 말고 다른 여자 이름이 쓰여 있더라고요?”

“오.”

그 말에는 좀 놀랐다.

사교계의 일에 관심이 없는 그였지만 그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란 건 지나가는 평민 아이라도 알 터였다.

“이렇게 차인 사람 처음 보죠? 그렇죠?”

비틀비틀 일어난 여자가 불쑥 가면 쓴 얼굴을 들이밀었다.

“……!”

비록 가면 너머라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사람을 본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시스테인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

늘 그의 명치 근처를 끓듯이 괴롭히는 마력이 있었다.

그건 금방이라도 머리로 넘어와 그를 폭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아주 어릴 때 발견했던 것. 뜨거워지고 뜨거워지다 못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다가온 순간, 묘하게도 마력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이없죠? 뭐 그런 놈이 있나 싶죠?”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니 뭐라고 중얼거리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요? 그놈한테보다 더 잘해 줄게요.”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묻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받아치자 여자가 깔깔 웃었다.

“누구든 뭐 어때요? 그놈보다는 나을 텐데.”

시스테인은 지금까지 수도 없는 청혼을 받아 보았다.

그건 사교계에서든 연회의 테라스에서든, 비밀스러운 화원에서든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모두 같았다.

황태후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디란타 대공가의 안주인. 사실상 제국의 실세가 되는 것.

하지만 이 여자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 듯했다. 이런 청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마력을 가라앉히는 이 기묘한 힘이 정말 이 여자에게서 기인한 것이라면.

“당신이 누구라도 그놈보단 나을 거 아니에요, 응? 당신도 신문에다 다른 여자랑 결혼할 거라고 올릴 거야?”

고개를 내젓는 순간이었다. 여자가 불쑥 시스테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 결혼해서 귀찮게 안 해요. 돈 달라 뭐 달라고도 안 해. 나도 당당한 직업인이라고요. 딱! 서로 생활 존중하고! 딱! 어! 좋죠!”

어떤 조건이든 끓는 마력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 존재라면 결혼하기 제격일 것이다.

물론, 이 여자는 술에 취해 되는 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좋습니다.”

“야호! 그럼 갑시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던 듯했다.

어딜?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자는 그를 질질 끌고 세이프티 바 한쪽으로 향했다.

―벌컥!

가벼운 와인 몇 병과 소파, 테이블이 전부인 공간.

원래는 오픈된 공간에서 말하지 못할 것을 나누는 공간이었으나, 때로는 다른 용도로도 쓰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쾅!

문을 닫아 버린 여자가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녀가 가까이에 훅 다가왔다.

새까만 베이스에 보석 장식이 간단하게 달린 가면을, 그녀가 휙 벗어 버렸다.

진분홍색 머리칼에 자줏빛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아 올 때.

“……아.”

시스테인은 분명히 느꼈다.

제 안에 들끓던 마력이 잠잠해지는 것을.

그가 짧게 숨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여자는 당돌하게도 그를 소파까지 밀어붙였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도 안 말해 줄 거죠?”

그를 침대에 눕힌 여자가 웃었다.

“난 리벨 이벨라예요. 리-벨- 이-벨-라.”

시스테인은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오늘 기사단에서 기사들이 속삭이던 이름 중에 리벨 이벨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차였다고 했던가.

이제야 그녀의 모든 말이 이해가 갔다.

“어때요. 내 이름 예쁘죠.”

옅게 웃은 그녀가 그의 위로 불쑥 올라탔다.

“예쁘면 뽀뽀하고, 아니면 그냥 가요.”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 아니면 술버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스테인은 그녀에게 깔린 채 이마를 짚었다.

그녀와 아예 바짝 붙어 있으니 그 마력을 가라앉히는 청량감은 더욱 커졌다.

아무 생각 없이 온 세이프티 바에서 매우 큰 수확을 건지는 셈이었다.

문제는, 이 여자였다.

그는 연애할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생각도 없었다.

그의 직업상,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에게는 독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는 연애결혼이 가능한 위치도 아니었다.

제가 유력 가문의 영애와 결혼할수록 황제인 그의 형은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에 더해 들끓는 마력,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몸까지 생각하면 결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 대에서 디란타 가를 끝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는지는 몰라도 이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상대라면 말이 다르다.

“당연히!”

리벨 이벨라는 그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충동적인 밤이었다.

어차피 세이프티 바에서의 일인 데다, 피임도 철저히 했으니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황당하긴 했다.

“아…… 롤란드……!”

아무리 내 이름을 몰라도 그 이름을 부르며 절정에 닿을 줄은 몰랐으니까.

*  *  *

“…….”

회상을 마친 시스테인이 이마를 짚었다. 여러모로 황당한 결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 거리에서도, 확실히 마력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으니까.

―달칵.

그때 방문이 열렸다.

*  *  *

어째서 인생은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걸까?

리벨은 황태후 리엔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서면서 생각했다.

리엔은 이미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잠깐만 기다려 보렴.”

그렇게 짧은 말을 남긴 황태후는 궁 곳곳에 드레스룸이 있기라도 한 건지, 새하얗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화려한 깃털과 보석이 장식된 모자를 든 채 나타났다.

그에 어울리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것은 물론이었다.

“쯧. 작은 드레스룸이라 이런 옷밖에 없구나. 가자.”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모자를 돌려 보던 그녀가 리벨의 머리에 살짝 모자를 얹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올 상반기 사교계를 강타할 아름다운 드레스였지만, 황태후 리엔의 눈에는 차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눈에 차지 않을 옷을 입은 리벨은 그때쯤 울고 싶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달칵.

그래도 황태후 리엔이 직접 문을 열게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리벨은 재빨리 뛰어나가 문을 열어 주면서 영혼이 사라진 미소를 지었다.

“어머, 친절하기도 하지.”

그런 리벨의 머리 위에 리엔의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얹혔다.

아기 쓰다듬어 주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녀가 리벨의 손을 잡았다.

“외출하십니까?”

밖에 서 있던 시스테인은 곧바로 되물었다.

아니, 이 동네는 새벽 네 시에 외출하는 게 당연한가 봐요?

“응. 같이 가자, 시스.”

“어디로 가십니까?”

시스테인은 그 말에 일언반구의 부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리엔 황태후는 손을 펴 보였다. 그리고, 리벨을 가리켰다.

“네가 아가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며.”

그때쯤 리벨은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게 초대를 하긴 했는데…… 진짜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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