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그녀가 그 문제의 밤에 대해 기억을 더듬고 더듬은 끝에 용케 생각해 낸 마지막은 이러했다.
‘술은, 어지간하면 드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시스테인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지금 그녀의 앞에서 떠들던 남자와 똑 닮아 있었다.
정말 이 남자가 그 남자인 것이다.
악!!!!!
리벨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술버릇이 안 좋긴 했지. 오만 사람마다 다 끌어안고 다녔으니까!
오죽하면 빙의하기 전 내 친구들은 내 술버릇을 보고 프리허그 빌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쩌다가 허그를 하다가…… 아니……. 리벨이 천장을 올려다볼 때였다.
“예.”
시스테인이 담담하게 대꾸하며 리벨을 가리켰다.
“영애께서 초대장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 어디 한번 볼까.”
황태후 리엔은 즐거운 얼굴이었다. 리벨은 어색하게 웃으며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초대장이라고 하기도 뭐한 그 종이 쪼가리에는…… 어쨌든 시스테인을 오늘 초대한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기는 했다.
[나흘 후 저녁, 디란타 대공님을 이벨라 자작저로 초대합니다.]
“초대장에 쓸데없는 격식이 있어 봐야 번거롭기만 하지. 충분하구나.”
리엔은 곱게 종이를 접어서 다시 리벨의 소매 안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정말 충분한가요?
저걸로 괜찮은 걸까요?
“지금 출발하면 시간이 괜찮을 것 같은데.”
리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의 기사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벨은 지금쯤 이 재앙은 상상도 못 하고 잠들어 있을 이벨라 자작에게 조의를 표했다.
그는 내일 분명 ‘오늘은 꼭 한탕 해서 부자가 될 거야!’ 같은 쓸데없는 꿈을 꾸면서 도박장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사 고료로 벌어 온 돈을 쓸데없이 탕진하겠지. 거기에 더불어서.
‘딸이라곤 키워 봐야 쓸모도 없군. 진짜 디엘렌 영식이 지참금이 없어도 된다고 하더냐?’
……같은 쓰레기 같은 말이나 해 대겠지.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조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JOY뿐이었다. 이거…… 재밌겠는데?
“출발 준비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영애를 모셔다드리는 길에, 초대에 응해도 되겠습니까?”
시스테인이 리벨을 돌아보며 물었다.
안 된다고 해도 진행될 상황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이죠.”
“졸리진 않겠어?”
리엔이 시원하게 답한 그녀에게 물었다. 리벨은 다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졸았다간 ‘내 아들의 얼굴이 그렇게 심심했니?’ 하면서 내 머리를 날려 버릴 것 같은 사람 옆에서 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요.”
리벨의 답에 리엔이 옅게 웃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이라 조금 걱정스럽지만……, 이른 아침에 들러도 이벨라 자작은 이해해 줄 거야, 그렇지?”
웃는 리엔에게 리벨이 마주 웃어 보였다.
“그, 그럼요.”
이해 안 하면 목이 날아갈 텐데.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벨라 자작가행이 결정되었다.
이벨라 자작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낮에는 대공가의 마차를 타고 사라졌던 딸이, 다음 날 아침에는 황가의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어쩌면 꿈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물론 그래 봐야 황태후와 대공의 방문을 막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테지만.
이벨라 자작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해 보니 리벨은 좀 더 통쾌해졌다.
이벨라 자작은, 결코 좋은 집주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입가에서 절로 미소가 피어 나왔다.
“우리 아가는 웃는 것도 예쁘기도 하지. 시스, 그렇지 않니?”
“……기사들에게 따로 의견을 구해 보겠습니다.”
물론 옆에서 들리는 대화에는 미소가 쏙 들어가 버렸다.
말로라도 예쁘다곤 못 해 주는 너무 정직한 예비 남편과, 목 날리는 게 취미인 예비 시어머니 앞이란 것이 새삼 실감 난 탓이었다.
―덜컹.
그렇게 밝아 오는 아침 해를 마주 보며, 마차가 빠르게 길을 내달렸다.
* * *
“흐아아아암.”
이벨라 자작은 평소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한 천장을 보수하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좀 금이 크게 간 것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전문가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무너질 정도의 금은 아니라고 했다.
‘뭐 그냥, 십 년쯤 더 살다가 적당히 새로 지어. 어차피 그 안에 한탕 크게 칠 거잖아, 안 그래?’
그렇게 집의 상태를 진단해 준 친구는 당연히 도박판에서 만난 친구였다.
“날씨 한번 끝내주는구만.”
이벨라 자작은 창문을 열며 쾌청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오늘은 느낌이 유독 좋았다.
햇빛도 밝고 모래알도 반짝이는 것이, 아주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날은 역시, 한탕 하러 가야지!”
의욕으로 가득 찬 이벨라 자작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거울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이 집구석에도 한 십 년 전에는 머리를 정리해 줄 하인과 하녀들이 상주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다.
이벨라 자작이 주사위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설렁설렁 방의 책상 근처로 다가간 자작이 콧노래를 부르며 서랍을 열었다.
―덜컹!
몇 개의 새하얀 봉투가 그를 맞이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봉투 몇 개를 열어 보던 그가 혀를 찼다.
“쯧. 날도 좋은데 돈이 이거밖에 안 남았나?”
―툭.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그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딸애가 어제 나갔지.”
딸을 데리러 온 자들은 그녀에게 무려 대공비 전하라고 했다.
“대공비의 아비라.”
이벨라 자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맞아. 어제 그랬지.”
어제 디란타 대공가의 마차가 왔다 간 후, 그가 느낀 감정은 단계적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황당했고, 두 번째는 진짜인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황제의 직인이 찍힌 결혼 인가서를 본 순간부터는 의심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애가 밖에서 뭘 그렇게 하나 했더니!”
화려한 연애 생활을 즐긴 모양이었다.
“대공비의 아버지라 이거지~”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봉투 몇 개를 들고 방을 나섰다.
“애 방에 분명히 돈이 얼마간 더 있을 텐데.”
어차피 대공비가 되면 이런 푼돈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 조금 금전을 가져와도 될 듯했다.
‘아버지, 또 도박장 가서 잃었어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리벨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지만 잠깐이었다.
“더 크게 벌어다 주면 될 거 아냐?”
게다가 이 저택에서 리벨이 무전취식을 한 게 이십 년은 족히 되었다.
근래 들어서야 생활비를 대어 놓고는, 저를 키워 준 아비가 돈을 좀 투자했기로서니 욕해선 안 될 노릇이었다.
“그건 패륜이지. 으음.”
나름 합리화를 마친 이벨라 자작이 발랄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어휴.’
처음 대공가에서 온 편지를 보고 한숨을 쉬던 딸이 떠올라서였다.
그날은 마침 그가 도박장에서 소식을 들은 다음 날이었다.
‘자네 딸이 정말 대공비 전하가 된다는 게 사실인가?’
뭔 헛소리인가 했는데, 황궁 의전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그렇게 말하니 솔깃한 것이었다.
하지만 딸은 무심해 보이기만 했고, 역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대공가 마차가 나타나 딸을 데려가 버렸다.
“허어.”
자작은 벽을 짚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설마 리벨이…… 대공 전하를 거절하려고 했나?”
그게 미친 건가? 대공 전하께서 가진 재산이 얼만데?
“아니지.”
요즘 젊은것들은 흔히 밀당이란 걸 한다고 했다.
“……근데 대공 전하와?”
할 것이 있고 안 할 게 있는 법이었다.
“리벨이 미쳤나?”
아니, 그런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대공가의 마차를 타고 그녀가 대공가로 갔다는 점이었다.
“캬……. 이제 이런 집에서 사는 일도 끝났지.”
―탕탕!
디란타 대공의 장인이 이런 곳에 산다고 하면 얼마나 사교계에서 눈치를 주겠는가?
보나 마나 튼튼한 저택 하나는 당연히 굴러떨어질 것이 뻔했다.
“품위가 있지, 품위가.”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그건 그거고 이제 금전 걱정도 없겠다, 리벨의 돈을 좀 가져올 생각이었다.
―히히힝!
그런데 그때, 그의 귀에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
이벨라 자작가에 말을 타고 올 손님은 몇 없었다.
도박장 놈들이 취해서 오나?
이른 아침이니 그럴 만도 했다.
친한 자들은 말없이 와서 잠들었다가, 몇 푼을 쥐여 주고 가곤 했던 것이다.
공돈이 생긴다는 소리다.
“역시 오늘은 운이 좋…….”
다……니……까?
창밖을 무심코 돌아보았던 이벨라 자작의 손에서 돈 봉투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히힝!
말 울음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왔다.
그리고 무려 말 여섯 마리가 이끄는 그 마차에는 대문짝만하게,
황가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이벨라 자작이 입을 떠억 벌렸다.
* * *
“아아아니! 어, 어서 오십시오!”
하인 대신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마차를 맞이하는 건, 당연히 이벨라 자작이었다.
그가 아무리 도박판에서 먹고살다시피 하는 한량이라도, 황가의 문양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어, 어서, 어서 오십시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까 인사한 것도 잊은 듯했다.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로도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황가의 마차가 여기에 왜?
대체 황가의 어떤 분이 이곳으로 오신 거지?
현재 황가에서 황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를 탈 수 있는 건 딱 세 명뿐이었다.
황태후 리엔, 현 황제, 그리고 그 동생분인 디란타 대공.
그중에 디란타 대공은 황가의 마차보다는 대공가의 마차를 굳이 고집하기로 유명했으니, 황가의 마차를 탄 사람이라면…….
딱 둘 중 하나였다.
“흐음.”
황태후 리엔이 저택을 살피는 사이, 리벨은 이벨라 자작을 보았다.
그는 창문이 열리기 전에 머리가 바닥에 박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인사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손을 쥐었다 폈다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있었다.
와중에 옷 봐라.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나름 화려한 옷은 이벨라 자작이 기분 좋은 날에만 입는 옷이었다.
정확히는 도박판에 전 재산을 탕진할 때만!
그다음 날에는 수프 끓일 것도 없어서 무를 사다가 맹맹한 수프를 퍼먹어야 했다.
한 일주일 정도, 고료가 들어오기 전까지.
한마디로 저건 개고생의 서막을 알리는 옷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닐 것이다!
눈곱만큼 들었던 이벨라 자작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조금 가셨다.
―달칵.
주변을 일사불란하게 정리한 황가의 기사들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황태후 리엔은 우아하게 손끝을 뻗어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그러면서 이벨라 자작을 보았다.
“하인이 꽤나 요란한 옷을 입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