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실례지만 앞에 있는 건 하인이 아니라 이벨라 자작입니다, 폐하.
그렇게 입을 털 수는 없었으니 리벨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사이 입을 털어도 상관없는 시스테인은 황태후에게 말했다.
“하인이 아니라 이벨라 자작입니다.”
“어머.”
리엔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벨은 자작의 얼굴에 새빨갛게 피가 몰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런.”
하나도 안 곤란한 얼굴의 리엔이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리벨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거 일부러 멕인 거다!
상대는 그 리엔 황태후였다. 정보란 정보는 다 손에 쥐고 있다는.
아무리 이벨라 자작가가 힘없는 집안이라지만, 설마 그 황태후가 사돈 될 사람 얼굴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직접 맞이하러 올 줄이야.”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는 사이 시스테인이 리벨에게 손을 건넸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아, 맞다, 나 결혼하기로 했지.
그럼 이제 디란타 대공이나 대공가의 기사가 아닌 다른 자가 나를 에스코트해서는 곤란했다.
그게 황가의 기사라도.
그 현실을 새삼 깨닫고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신부님.”
리벨은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
감정을 조금만 담아도 달콤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은 저 호칭이, 이렇게나 딱딱하게 들릴 줄이야.
차라리 내가 월급날 회계부장님을 부르는 게 더 달콤할 것 같았다.
리벨이 카카오 함유량 99% 초콜릿 같은 달콤함을 맛보는 사이, 이벨라 자작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 이, 아니 누추한 곳에, 귀한 곳, 아니 귀한 분이 어쩐 일로…….”
더듬거리는 말에 리엔 황태후가 종이 쪽지를 흔들어 보였다.
“리벨 영애에게 예쁜 초대장을 받았단다.”
리벨은 그걸 보고 세 번째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악! 내 쪽지! 악!
“……?”
이벨라 자작이 아무리 딸에게 관심이 없어도, 딸의 사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건 분명 제 딸인 리벨 이벨라가 쓴 쪽지였다.
두 부녀의 눈이 마주쳤다.
‘저게 뭐냐?’
이벨라 자작의 시선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지만 여기서 진실을 줄줄이 늘어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리벨은 적당히 그 시선을 무시했다.
“제가 대공 전하를 초대했는데, 황태후 폐하께서 함께 오고 싶어 하셨어요.”
리벨의 설명에 리엔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시스테인은 완벽한 자세로 리벨을 에스코트해 마차를 빠져나왔다.
마차가 뒤로 소리 없이 물러나는 사이, 시스테인의 시선이 이벨라 자작을 향했다.
그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이벨라 자작이 느끼기에는 달랐다.
그에게는 그 시선이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졌다.
어서 모시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이벨라 자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 그, 일단 안으로…… 근데 식사를…….”
식사할 거 없는데! 이벨라 자작의 머릿속이 하얘진 때였다.
시스테인은 그 상황에 완전히 못을 박았다.
“마침 아침 시간이니, 두 시간 후에는 기사단 훈련에 참석해야 합니다.”
서두르라는 의미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벨라 자작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리벨은 부엌 쪽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음식 재료가 남은 게 없을 텐데?
자작의 옷 꼬라지를 보고 아침의 모든 것을 파악한 리벨은, 이제 슬슬 즐거워지려고 했다.
원래 괘씸한 놈 당하는 거 보면 즐거운 법이다.
“그래, 내 아들이 아침도 안 들고 훈련을 가게 할 순 없지.”
리엔이 이벨라 자작의 정수리에 대못을 박았다.
“기대하지, 이벨라 자작.”
* * *
리벨이 빙의한 것도, 저 아버지와 부르고 집주인이라 생각하는 자와 하숙인 관계를 맺은 것도 몇 년은 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벨라 자작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분명 옷차림을 보니 오늘 아침 도박장에 일찍 행차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그 옷은 지금 하얀 앞치마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 앞치마는 무려 삐뚤게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앞치마에 매듭이 있다는 건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걸 자작이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짜게파티…… 아니, 파스타 요리사가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그가 부엌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저대로 가다간 황태후의 옷에 파스타 양념이라도 흘릴 상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옷과 함께 리벨과 이벨라 자작의 머리까지 깨끗하게 날아갈 게 분명했다.
불길한 미래를 점친 리벨이 슬쩍 물었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그 말에 이벨라 자작은 기겁했다.
“아니!”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던 이벨라 자작은 디란타 대공의 시선을 받고 쩡 굳어 버렸다.
“편, 편히 있으시렴.”
뭐라는 거야?
아무래도 그는 시스테인의 얼굴을 보다가 혀가 꼬인 듯했다.
시스테인은 말을 더듬는 그를 보다가, 때마침 제 앞에 놓이는 파스타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그가 평소에 먹는 것과는 비주얼부터 다른 질 떨어지는 음식이었다.
“매일 아침을 이렇게 드십니까.”
하지만 시스테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장에서 먹는 식사보다는 나으니까.
그가 더 신기하게 여긴 건 귀족이 직접 요리하는 모습이었다. 사용인들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식사를 만들 줄이야.
그는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 지가 오래된 사람이었다.
덕분에 이런 도란도란한 분위기는 낯설기만 했다.
“그건 아―”
리벨이 당연히 고개를 저으려는 때였다.
자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무무무물론입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며 리벨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 아침을 같이 먹는 건 가족 화합에 좋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무심코 동의를 구하던 이벨라 자작은 아차 했다. 그리고 재빨리 리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으냐, 내 딸아?”
어우, 소름. 리벨은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뻔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화합 따지는 사이였습니까?
하지만 따지기에는 이벨라 자작의 심신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서 따졌다간 심장마비로 쓰러질 것 같은데.
“그렇죠.”
사람 하나 살려 주는 셈 친다! 이번 기회로 살았으니까 앞으로 도박은 하지 마라!
리벨이 인자하게 웃을 때였다. 리엔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지. 이런 자리를 갖는 건 황성 같은 곳에서는 특히 힘들기도 하고……, 좋은 가풍이야.”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그 직후, 청천벽력같은 말이 쏟아져 내렸다.
“네가 아가의 아침을 매일 해 주는 게 좋겠구나.”
“콜록.”
네? 뭐라고요?
맛도 없는 파스타를 입에 욱여넣으려던 리벨은 그대로 사레가 들렸다.
코로 파스타 나올 뻔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전장에서 먹을 만한 음식들뿐입니다만……, 그것이라도 괜찮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아가와 네가 상의해야지.”
사레를 수습하는 사이 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리벨과, 무미건조한 시스테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아침은 제가 할게요.”
리벨이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귀한 황태후 폐하의 둘째 아들에게 밥을 시켰다간 내 목숨이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전장식이 불편하시다면 일반적인 식사를 연습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리벨은 제 머리를 볶아 버리고 싶었다.
그때 리엔이 리벨에게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즐겁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니?”
리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거절하면 오늘 밤 황태후 리엔의 즐길거리로 쓸모를 마무리하고 목이 날아갈 거라는 사실을.
“아무거나 해 주세요. 저 다 잘 먹어요!”
리벨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목숨 앞에 식성 바꾸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비록 통마늘도 파도 안 익은 양파도 싫어하지만! 어떻게든 먹어 볼게요!
리벨이 미소 짓는 사이 대공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황태후 폐하의 아끼는 둘째 아들에게 삼시 세끼 밥상을 받게 된 리벨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됐지?
리벨이 삶을 돌아보는 동안, 이벨라 자작은 기계처럼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음…….”
그리고 상석에서, 황태후 리엔은 포크로 딱 한 입만 파스타를 먹어 본 후 식기를 내려놓았다.
리벨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은 더 지난 반쯤 썩어 가는 음식 재료로 파스타를 했으니 드실 수 있을 리가.
“참, 이벨라 자작.”
그녀는 먹는 대신 말하는 데에 입을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먹기만 하고 싶은 이벨라 자작이 우뚝 굳었다.
“네, 넵, 폐하!”
“자작도 내 아들이 아가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며칠간 봐 와서 알 것이라 믿어.”
말이 시작되자마자 자작은 포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그, 정말.”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말이십니까?”
그는 이른 아침 갑자기 제국의 가장 귀한 세 명 중 두 사람이 제 딸과 함께 찾아와, 아침을 들고 있는 상황이 꿈이라면 차라리 믿을 것 같았다.
특히 제 딸이 저 디란타 대공의 대공비가 된다는 사실도.
한 시간 전까지는 마냥 신나기도 한 것 같았다.
대공비면 부자일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현실감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눈앞에 있는 건 진짜 리엔 황태후와 디란타 대공이었다.
여기서 입 한번, 손 한번 잘못 놀렸다간 다음 날 어디에서 눈을 뜨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결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시스테인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
그에게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리벨은 포크를 툭 떨굴 뻔했다.
나도 못 먹을 것 같은 파스타를 싹싹 비웠잖아?
“사실입니다.”
시스테인이 확답하자 이벨라 자작의 떨리는 시선이 리벨에게로 향했다.
리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상견례(?)까지 하고 있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얼떨결에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결혼이지만, 매일 집주인이랍시고 갑질이나 해 대던 이벨라 자작이 덜덜 떠는 꼴을 보니 대공비도 할 만하다 싶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따져도 리벨 자신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대공비라는 권력은 물론이고 시스테인 디란타 대공이 난봉꾼인 것도 아닐뿐더러, 직업에도 문제가 없도록 황태후 리엔이 신경 써 주겠다고 했으니까.
……물론 눈치 좋은 디란타 대공에게 벨이라는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