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그래, 정체만 숨기자, 정체만!
단단히 결심한 리벨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라도 있나?”
리엔은 의아한 듯 이벨라 자작을 쳐다보았다. 이벨라 자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가 고개를 홰홱 저었다.
“아아닙, 아닙니다. 그런데 제 딸이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서 혹시 대공가나 황가의 이름에 누가 되진 않을지…….”
저렇게 청산유수로 말하는 건 처음 보네. 리벨이 생각했다.
오래 살고 볼 일, 아니 대공하고 결혼하고 볼 일이었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살짝 고개만 저었다. 별로 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는 식탁에서의 대화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원래 표정 변화가 적은 그였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이벨라 자작이 보기에는, 시스테인이 얼굴을 굳힌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공 전하께서 진노하셨다!
이벨라 자작의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었을 즈음이었다.
“그럼 그 이야기는.”
리엔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의 안목을 믿지 못한다는 건가?”
수도 없이 날아드는 사망 플래그에 이벨라 자작이 비틀거렸다.
“아닙니다!”
“아니면, 내 아들이, 어딘가 부족한가?”
리엔의 미소가 짙어졌다.
거대한 사망 플래그가 이벨라 자작의 머리 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없던 군기까지 잡힌 이벨라 자작이 홱홱 고개를 저었다.
“아아닙니다!”
‘돈이라곤 푼돈이나 벌어오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이따위로 벌어 올 거면 그냥 저택에 기어들어 오지 마!’
불과 얼마 전까지 제게 막말을 해 댔던 사람하고 같은 사람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리벨은 파스타를 호로롭 먹으면서 생각했다.
왠지 이 묵은 파스타마저 맛있어지는 광경이었다.
“그럼 되었지. 젊은 아이들이 좋다는데. 그렇지?”
눈부시게 미소 지은 리엔 황태후가 리벨과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닿았다.
리벨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시스테인 사이로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연히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하지만 웃어야 한다!
리벨이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릴 때였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얼굴이 아예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이벨라 자작이 기계처럼 답했다.
“그래…….”
리엔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냅킨을 접어 버렸다.
드디어 가시나?
이벨라 자작의 얼굴에 아주 잠깐 화색이 돌았다.
식탁을 둘러본 이벨라 자작은 특히 시스테인의 접시를 보고 기뻐했다.
“대공 전하, 음식이 입맛에 맞으셨는지요?”
접시를 깔끔하게 비웠으니 분위기도 환기할 겸 물어본 것이었다.
일반적인 사교계의 귀족이었다면 ‘좋은 식사였소. 다음엔 내가 대접하지.’ 정도로 끝날 일상적인 대화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애석하게도 일반적인 사교계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답했다.
“전장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한마디로 전장에서 아무렇게나 조달해 먹는 음식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소리였다.
웃으면 안 되는데!
리벨이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하하하하…….”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리벨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가, 웃음을 참을 이유가 어디에 있니, 응?”
그녀의 시선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비호하는데, 네가 웃는다고 감히 너를 탓할 자가 있을까?
그건 절대적인 권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이제 이벨라 자작 앞에서 눈치 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작가의 하숙객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슬슬 웃을 때였다.
“아 그리고.”
빙그레 웃은 리엔이 이벨라 자작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자작은 요리 연습을 좀 하는 게 좋겠어. 다음에 올 때도 이렇게…….”
그녀가 포크를 들어 반쯤 삭은 양배추 조각을 콕 집었다가 떨어뜨렸다.
“좋지 못한 꼴을 보면 자작이 내 애완 돼지들과 같은 걸 먹는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으니.”
“죄, 죄송합니다.”
“우리 아가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 온 돈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리엔이 재차 눈부시게 웃었다.
“앞으로 자작의 취미 생활을 지켜보도록 하지.”
“예, 예?”
이벨라 자작이 멈칫했다.
그가 오가는 도박장은 제국의 고위 귀족들도 꽤나 드나드는 곳으로, 제대로 비밀 보장이 되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나라에서 금지할 정도로 높은 금액이 오가는 도박장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무법지대.
황궁에도 출입하는 고위 귀족들이나 황궁 내 부서 사람들까지 오가는 곳이니만큼, 숨기는 것도 체계적이었다.
“취미 생활이라 하시면……?”
설마 그걸 황태후 폐하께서 아실까?
이벨라 자작도 황태후 리엔이 어떤 사람인지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거칠 것 없이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베어 버리는 폭군 이상의 폭군.
그런 사람이, 불법 도박장을 알고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그 생각에 이벨라 자작이 조금 어깨를 폈을 때였다.
리벨은 이벨라 자작의 머릿속이 보이는 것 같아 애잔하게 웃어 주었다.
모를 것 같니? 나도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숨기지만 댁이 좀 줄줄 새지 않았을까요?
“도박 앞으로 그만하라고요.”
리벨이 결국 이벨라 자작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벨라 자작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리벨이 몇 년간 수도 없이 했던 말이었다.
‘도박 그만!’
‘그만 좀 탕진하라고요!’
‘내일 식사할 돈도 없는데!’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거친 목소리와 뭘 때려 부수는 소리뿐이었다.
‘한탕만 따면 그만둔다니까!’
‘남자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아니야!’
평소 같았으면 또 윽박지르기나 했을 이벨라 자작이었다. 어쩌면 주먹을 치켜들어 보일지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리벨은 저택 밖 다른 곳에서 잘 곳을 구해야 했다. 신문사 구석 같은 곳.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벨라 자작은 곱게 입을 다문 채 눈을 굴리고 있었다.
“설마 황태후 폐하와 대공 전하 앞에서 거짓을 말할 건 아니죠?”
“곧 대공비가 될 사람 앞이기도 하지.”
리엔은 적당히 거들어 주었다. 그녀는 즐거운 얼굴로 리벨을 보고 있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이벨라 자작 같은 인간을 다루는 방법을, 리엔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리벨의 저 밝고 통통 튀는 성격이 거침없이 드러나려면 저 이벨라 자작이란 자를 먼저 밟아 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벨라 자작이 이 작은 저택에서 행사한 물리력은, 그녀를 무의식중에 가두는 족쇄가 되어 있었으니까.
리벨이 적당한 때에 저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
리엔은 각지게 접은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 물론입니다. 다시는 가지 않겠습니다.”
이벨라 자작이 고개를 연신 숙였다.
리엔 황태후가 손짓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아가가 몇 년간 본의 아니게 고생을 한 모양이던데.”
리엔은 자작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비의 출신이 어디든, 대공가의 일원이 된 이상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
그녀가 이벨라 자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런 일을 시키는 자는, 누구든 제명대로 살지 못할 테니.”
그건 경고였다.
리벨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이벨라 자작을 보면서 찜찜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런 자들을 잘 알았다.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기자 일을 할 때에도 저런 자들은 수도 없이 보았으니까.
분명 반성하는 듯하다가도, 눈앞에서 저를 속박하는 힘이 없어지는 것 같으면 슬그머니 다시 불법에 손을 대기 마련이다.
그럼 그때는 더한 대가를 치른다는 걸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
나중에 황태후 폐하께 걸리기 전에 내 선에서 어떻게든 정리해야지.
리벨은 제 모가지가 편도 여행 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으므로 담담히 다짐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리엔과 시스테인 역시 이벨라 자작에게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 * *
이벨라 자작은 기계 같은 몸짓으로 세 사람을 배웅했다.
“이만 들어가 보세요.”
리벨이 손짓하기 전까지.
저렇게 떨다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마음대로 보내도 되는 건가, 싶긴 했지만 리엔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시스테인 역시 표정 변화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명령에 익숙해지도록 하렴.”
자작이 가고 나서, 리엔이 입을 열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권력에 익숙해져. 디란타 대공비 앞을 버릇없이 가로막는 자들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란다.”
리엔이 손을 펴 보였다.
“네 남편이 황가의 피를 이었다는 걸 잊지 마렴. 그리고 우리 시스가 아무리 네게 무뚝뚝해 보여도.”
리엔이 시스테인을 흘끗 보았다.
“네 생명이 위험할 때까지 널 방치하진 않을 테니. 그렇지, 시스?”
그동안 거의 표정 변화가 없던 시스테인의 시선이, 아주 조금은 온화해진 것도 같았다.
워낙 표정이 굳어 있는 그이기에, 그 작은 변화는 오히려 크게 다가왔다.
“제 사람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을 내버려 둘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였다. 게다가 ‘제 사람’이라는 단어에서는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리벨은 그 말을 뇌까렸다.
제 사람.
리벨 자신이 글을 다루는 사람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비슷한 뜻을 내포하는 표현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주 조금씩 뜻이나 느낌이 달랐다.
‘제 사람’이라는 단어도 그랬다.
시스테인이 그녀를 정말 ‘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떠나서, 그 단어에는 어떤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