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그가 아무리 무미건조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생각하는 ‘제 사람’이 위험해지는 순간에는 달라지리라.
리벨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럼 이만 기사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다소 늦었습니다.”
시스테인의 무뚝뚝한 말이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의 표정 변화는 눈 녹듯 사라진 채였다.
“그, 아까 그거 드시고 괜찮으시겠어요?”
리벨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조금 전 봤던 그 잠깐의 표정 변화가 긴장을 풀게 했는지도 몰랐다.
“파스타…… 솔직히 맛이 좀.”
그때 리엔이 훅 치고 들어왔다.
“사람 먹을 맛이 아니긴 했지.”
리벨은 다시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한 접시 다 비운 아드님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됩니까?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와중에 시스테인의 답이 더 가관이었다.
아니, 이미 배 속에 들어간 걸 마인드 컨트롤해서 없애요?
그 전에 맛이 없으면 먹질 말라고!
리벨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맛없으면 드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1주일은 삭은 걸로 만들었는데 탈 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몸 쓰는 사람인데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다고 그 이상의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시스테인은 담담하게 답했다.
이벨라 자작이 이 말을 들었으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기대도 안 했다는 뜻이었다.
“제가 기사단장실에 도시락이라도 들고 갈까요?”
그래도 몸 쓰는 사람이 굶는, 아니 쓰레기로 식사를 때우는 건 좀.
리벨은 자작보다는 음식에 자신이 있었다. 나름 전생에서도 도시락 싸 들고 다녔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대번에 거절했다.
“점심은 기사단에서 배식합니다.”
“아침을 안 드셨잖아요.”
“먹었습니다.”
“없는 셈 치신다면서요.”
“안 먹었지만 괜찮습니다.”
숨 막히는 공방이 오갔다. 이 웃긴 대화는 뭐지?
리벨이 머리를 싸매는 사이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의 도시락도 기대되지 않니, 시스? 함께 이야기도 나눌 겸, 어때?”
그래도 아직 안 친한 아들 부부를 어떻게든 붙여 놓으려는 리엔의 노력이 리벨의 눈에도 보였다.
이렇게 되면 거절할 수 없―
“거절하겠습니다.”
시스테인은 딱 잘라 거절했다.
“이 저택엔 제대로 된 음식 재료가 없습니다. 아까 봤던 음식들도 전부 적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재료로 만든 것들이었고요.”
그거 알고 드신 겁니까?
리벨은 이벨라 자작의 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와 도시락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재료는 당연히 새로 사서 해 드려야죠!”
리벨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왠지 저 칼 같은 거절이 이벨라 자작의 끔찍한 음식 솜씨를 고려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였다.
저런 놈하고 싸잡히긴 싫다!
자취 N년 차의 힘을 보여 주지!
리벨이 결의를 다지는 순간 시스테인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문제입니다.”
“?”
사실 일주일 지난 음식이 취향이셨습니까? 어쩐지 잘 먹더라니.
리벨이 눈을 깜빡일 때였다.
“동선이 비효율적입니다.”
……아, 그 문제였구나.
“아, 예…….”
리벨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롤란드에게 차인 이후로 이렇게 신박하게 차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뻘쭘해지려는 순간, 시스테인이 불쑥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러니 점심에 기사단에서 뵙겠습니다.”
“?”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기사단에서? 갑자기?
잠시 침묵하던 시스테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말입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장소가 이상하지만 어쨌든 데이트 신청 아닌가?
그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시스테인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쌩 사라져 버렸다.
그러기까지는 수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게 차인 거야, 데이트 신청 받은 거야?
떨떠름한 얼굴로 리벨이 흙먼지를 쳐다볼 때였다.
“내가, 시스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가뿐일 거라고 했지.”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제 아들이 저답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을.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그건 변화였다.
리엔이 원하던 변화.
사람은 급격한 변화를 맞으면 아무리 단단히 저를 감싸던 자라도 허점을 노출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허점에서는, 왜 자신을 감추었는지,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될 터였다.
하지만 리엔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말거나 리벨은 심각했다.
이건 아무래도 어머니 쪽에 물어보는 게 나을 듯했다.
“이거…… 애프터, 아니, 데이트 신청 맞죠?”
“말 고를 필요 없다니까.”
리벨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준 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애프터야.”
“진짜죠?”
“진짜야. 벌써부터 변화가 기대되는구나.”
아니 사람이 무슨 데이트 신청을 이렇게 오토바이 타고 명함 날리고 지나가는 사람처럼 민첩하게 해?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릴 때였다.
―타닥, 탁.
아까 시스테인이 타고 사라진 마차와는 다른, 새로운 마차가 다가와 리엔 황태후 앞에 섰다.
“이만 돌아가 볼 시간이야.”
“아…….”
그러고 보니 황궁의 일정은 이미 시작됐을 터였다.
그 중심에 있다시피 한 황태후가 이렇게나 밖에 오래 있었다는 건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는 걸 의미했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충분히 즐거운 마실이었으니.”
리엔은 마차에 타면서 미소 지었다.
리벨은 왠지 저 눈부신 미소의 의미를 슬슬 알 것 같았다.
저건 왠지 벼락치기 직전 맑아지는 하늘 같은…….
“결혼은 한 달 후가 좋겠구나.”
그럼 그렇지! 리벨의 머릿속이 다시 새하얘졌다.
“예? 그렇게 빨리요?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닌―”
“기사도 한 달 뒤로 내고…… 벨 기자, 어때?”
리엔이 속삭였다.
“콜록.”
리벨은 하마터면 리엔의 면전에 마른기침을 할 뻔했다.
“그, 오늘 기사를 내라는 말씀이세요?”
“당연하지.”
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저택을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안 내면, 아가가 곤란해질지도 몰라.”
“……!”
황태후 리엔은 허투루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 내로 기사가 안 뜨면 곤란해진다고? 다른 기자가 선빵이라도 치나?
“꼭 오늘 밤에 올려야 재미를 볼 수 있을 거야. 알았지?”
“그…….”
리엔의 말에 리벨은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대공 전하가 제가 벨인 걸 알지 않을까요?”
결혼 결정된 지 반나절도 안 지나서 결혼 소식이 기사로 발표되면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을까요?
“음.”
리엔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아이구나.”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리벨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그 기사를 낸 벨이란 걸 대공 전하께서 알기를 원하시는 게 아닐까?
그 기사 날 땐 의자도 몇 개 박살 내셨다는데 본인을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하신 게 아닐까?
대공 전하께서 의자 대신 나를 박살 내는 걸 구경하는 것도 황태후 폐하 입장에선 아주 좋은 구경―
“아가가 싫다면 슈에게 보도하라고 할 수밖에.”
“네?”
리벨의 생각이 뚝 끊겼다.
리엔은 말하는 걸 깜빡했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슈가 누군지는 네 방에 보고서를 가져다 두라고 했단다.”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그사이 리엔이 탄 마차의 문은 닫히고 있었다.
“참, 내 아들을 그리 매너 없이 가르치지는 않았으니, 점심때가 되면 마차를 보내올 거야.”
뒷말은 마차 문이 닫혀 작게 들렸다.
“즐거운 시간 보내렴, 아가.”
―히히힝!
말의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멀어져 갔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자리에서 리벨이 뒤늦게 인사했다.
“아아안녕히 가세요!”
―달칵.
그 인사를 용케 들었는지 창문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곧 또 보자, 아가.”
아니, 뭐 그런 무서운 말씀을!
리벨은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가 마차가 사라지자마자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체 누군지 얼굴, 아니 이름이라도 알자!”
슈! 그 기자가 누군지가 너무 궁금했다.
중간에 영혼이 사라진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벨라 자작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툭!
그때, 리벨은 저택 복도가 좁은 탓에 자작의 손을 본의 아니게 걷어찼다.
“앗.”
또 소리를 지를까 싶어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자작은 죽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권력에 익숙해져.’
리엔 황후의 말이 문득 리벨의 귓가를 울렸다.
이제 그녀를 물리적인 위력으로 압박하던 이벨라 자작은 그녀에게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할 터였다.
몸을 움츠릴 필요도, 효녀인 척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탁!
다시 거세게 손을 걷어찬 리벨이 제 방에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방 가운데 협탁에 곱게 놓인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오.”
―찌이익!
리벨의 페이퍼 나이프가 다소 거칠게 종이봉투를 갈랐다.
그리고 서류의 첫 장을 본 순간.
“헐.”
리벨은 입을 떠억 벌렸다.
너였냐?
역시 못된 것들은 하나만 하지 않는다니까.
“…….”
리벨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살인 하나면 참을 인 세 개를 면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리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