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7)화 (17/167)

제17화

“흐흠. 식사인가.”

그때 이벨라 자작도 슬그머니 내려와 말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1인분은 아닌 것 같아서 눈치껏 내려온 것이었다.

그래도 집에 굴러다니는 열흘 가까이 된 식재료로 쓰레기를 만들어 먹는 것보단 눈칫밥을 먹는 게 낫지 않겠는가?

리벨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기사에게 손짓했다.

“같이 먹자.”

어차피 혼자, 아니 둘이 못 먹는다. 그녀의 손짓을 받은 기사는 잠깐 멈칫했다.

“아, 저는 식사했습니다.”

흐음. 리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같은 차림의 황태후 폐하의 기사들이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정말 저 사람들이 밥을 먹을까?

“정말?”

“예.”

기사는 바로 답했다. 아닌 것 같은데?

리벨은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그를 흘끔 살폈다. 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인간의 배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리벨은 스튜에 푹 찍은 빵을 들고 가서 기사 앞에 들이밀었다.

“…….”

“…….”

빵의 유혹에도 기사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때였다.

―꼬르륵.

음식 냄새에 반응한 기사의 배 속이 우렁찬 소리를 내었다.

“그럼 그렇지.”

일하느라 안 먹는 거지!

리벨은 빵을 기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안 먹으면 힘도 없어. 그럼 나도 못 지켜 줘. 알지?”

물론 이런 사람들은 한두 끼 굶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한국인이 누구인가?

밥심의 민족!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용서해도 밥을 안 주는 건 용서 못 한다는 전설의 한국인!

남 굶는 건 리벨도 지켜보고 있기 불편했다.

“……감사합니다.”

결국 기사가 빵을 받아 들었다.

리벨은 빵을 하나씩 스튜에 푹 적셔서 기사들에게 갖다 주었다.

“…….”

그러자 서로 눈치를 보던 기사들은, 순서를 맞춰서 한 명씩 빵을 먹기 시작했다.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믿음직한 기사들이 아닐 수 없었다.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음! 맛이 아주 좋군! 이 스튜는 동부산 치즈를 충분히 넣은 것 같은데, 맞나?”

“치즈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마치, 치즈가 들어간 것 같은 풍미가 느껴져!”

이벨라 자작이 자신의 얕은 지식을 뽐내려다 쪽을 당하는 사이, 리벨은 따로 준비된 식탁에 앉았다.

“외식 아닌 외식도 오랜만이네.”

원래 라면도 밖에서 먹으면 더 맛있는 법인데, 이런 일류 요리사 음식이면 더더욱 맛있을 것이다.

리벨은 기분 좋은 얼굴로 식기를 들었다.

“시스, 고마워요.”

그가 없는 허공에 말하자니 뭐했지만, 아무 말도 없이 먹기엔 좀 미안했다.

“?”

기사는 허공에 말하는 게 이상한지 흘끔 리벨을 쳐다보다가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의 순서(?)는 이미 지나서, 빵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잘 먹어야 되는데, 저거 먹어서 되나?

리벨은 그를 살피다가 불쑥 물었다.

“근데 이름이?”

기사는 바로 답했다.

“109번입니다.”

뭔 번? 리벨이 스푼을 스튜에 가져가며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라구?”

“109번입니다.”

109번? 기사단 출석 번호 같은 건가? 고개를 기울인 리벨이 재차 물었다.

“아니, 번호 말고 이름.”

그녀의 질문에 기사가 곧바로 답했다.

“이름이 109번입니다.”

주르륵. 리벨 선정이 딸이에요. 리벨은 스튜를 입에서 그대로 흘릴 뻔했다.

그제야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에 대해서 제대로 떠오른 탓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오직 황가만을 위해 키워진 자들.

그들은 오직 황가와 황가의 명령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도록 교육받았다.

그들은 황가를 위해서라면 암살이든, 잠입이든 어떤 더러운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저를 거두어 준 황태후 리엔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기에.

아니, 그런데 황태후 폐하!

그런 사람들한테 이름도 안 지어 주신 겁니까!

리벨은 떨어뜨릴 뻔한 스푼을 제대로 쥐며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나인, 어때?”

“예?”

“이름. 밖에서 109번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황태후 폐하의 비밀 기사가 최소 109명은 있다는 걸 밖에 홍보하고 싶니?

리벨의 시선에 109번은 진땀을 흘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더헙.”

말끝이 이상한 건 리벨이 그가 당황한 틈을 타 빵을 하나 입에 더 욱여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인 경, 금강산…… 아니, 수도 야경 구경도 식후에 보라는데 굶고 다니지 마.”

속담을 제멋대로 로컬라이징한 리벨이 그제야 제대로 된 식사를 시작했다.

“…….”

우물우물. 빵을 먹던 나인의 시선이 제가 모셔야 할 자를 향했다.

황태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기한 영애이자, 곧 대공비 전하가 되실 분.

나인…….

그가 제 이름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리벨은 몰랐지만,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 중 나인은 처음으로 이름을 가지게 된 사람이었다.

*  *  *

귀족들이란 원래 급할 것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전쟁 중이 아니고서야 식사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그 인식 덕에 리벨은 마음껏 식사를 즐겼다.

“기자들이 빠지고 있습니다.”

그때 기사 중 하나가 다가와 보고했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나올 것 같으니까 가나 봐.”

그러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럼 나도 오늘 쉬어 볼까?”

이런 날 나가 봐야 기자만 달고 살지. 그녀가 양팔을 번갈아 가며 스트레칭할 때였다.

나인이 불쑥 물었다.

“디란타 대공 전하께 가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없어.”

바쁜 사람한테 자주 가 봤자 좋을 것도 없다. 리벨이 바로 답했다.

단호한 답에 나인이 조금 멈칫했다.

“그럼…… 마차로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겠습니까?”

리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 몰려들 텐데. 아까 기자들 진 치고 있는 거 봤잖아.”

혹시 먹잇감이 될 셈? 리벨이 손을 펴 보일 때였다.

나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눈을 뽑아 버리겠습니다.”

이보쇼.

“달리 거슬리는 게 있으십니까? 대공비 전하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배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당연히 리엔 황태후 폐하일 것이다. 그리고…….

리벨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기어이 시스테인과 만나게 하려는 것도 아마 황태후 폐하의 뜻이리라.

“혹시 황태후 폐하께서 명령하셨어? 나랑 시스 경을 만나게 해 주라고.”

“…….”

나인은 입을 닫아 버렸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나가라 하나 했더니.”

리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나와 시스테인 경이 빨리 친해지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기사도 올렸으니까 곧 그에게도 알려 줘야겠지.

“좋아, 가자!”

리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선 나인의 기세가 달라졌다.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그는 정말로 기자들의 눈을 다 베어 버릴 기세였다.

“그으거는 다시 집어넣고.”

리벨은 그의 검을 가리켰다.

“눈은 안 뽑아도 되고, 알지?”

“?”

나인은 좀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 기사는 확실히 정상적인 기사는 아니었다.

암살자 전문으로 키웠다더니, 어딘가 핀트가 나가 있었다.

“아무튼 가 보자!”

리벨이 자리를 나섰다.

*  *  *

리벨은 기사단 건물에 오자마자 바로 기사단장실에 안내되었다.

시스테인이 곧바로 제게 올 수 있도록 말해 준 것이 분명했다.

―쿵쿵.

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크를 한 리벨이 귀를 기울였다.

곧 들어오라고 하시겠지.

―벌컥.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오셨습니까.”

직접 열어 주잖아! 대공의 환대를 황송하게 받으며 리벨은 기사단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오는 거 알고 계셨어요?”

황태후 폐하께서 말해 두셨나? 하지만 시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어떻게 문을 열어 주신 거예요?”

혹시 딴 사람도 그렇게 환대하는 편?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느껴졌습니다.”

“?”

“당신이 내게 오는 것이.”

시스테인의 푸른 눈동자가 리벨을 향했다. 리벨은 순간 볼을 붉혔다.

아니 무슨 플러팅을 저렇게 돌멩이 쳐다보는 표정으로 해?

“그, 그랬군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리벨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마침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신문을 발견했다.

[이벨라 자작 영애 ‘놀라운 소식 전할 것’…….]

그리고 익숙한 기사 내용도 발견했다. 리벨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네네네가 여기서 왜 나와……?

“기사가 나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신문에 닿는 걸 느낀 시스테인이 짧게 말했다.

“특히 이 기자는, 눈여겨보고 있던 자라.”

그의 손끝은 ‘벨 기자’라는 글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덕분에 리벨은 손수 시스테인이 차를 탈 때까지 멍해져 있어야 했다.

―쪼르륵.

설마 벨 기자가 나인 걸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달칵.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일 때까지 그녀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를걸? 모르실걸? 몰라야 할걸?

“영애?”

“아, 네!”

리벨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멀찍한 호칭을 알아차렸다.

“저도 리벨이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리벨.”

그가 짧게 답했다.

리벨이 신문을 보려고 고개를 살짝 들자, 시스테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함께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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