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결혼 날짜를 조정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안 듣는 듯하더니 다 듣고 있는 사람이었다. 리벨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스테인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자면 마치…… 전장의 참모나 지을 것 같은 비장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에 리엔의 아이디어를 완벽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디엘렌 영식과 알레로 영애가 결혼하는 날하고 같은 날에 결혼식을 하자는 말씀이세요?”
그거 한 달도 안 남지 않았나?
자세히 날짜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들은 참이었다.
그 안에 결혼식을 어떻게 준비해?
그것도 황가의 피가 이어진 대공가의 결혼식이었다. 누구 말대로 쪽팔리게(?) 한 달 만에 날치기(??)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리엔은 그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게 하는 게 좋겠지. 완벽하게 겹치는 날이면, 티가 나잖아. 한 하루 이틀쯤 텀을 두고…….”
―탁, 탁.
그녀가 칼과 포크를 양손에 들고, 접시 양끝을 짚어 보였다.
“디엘렌 영지에서 먼 곳에서 결혼하면 되지.”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롤란드 디엘렌이 그 또라이 같은 짓을 하면서 베니카 알레로 영애와 결혼하려는 이유는, 그녀의 가문이 가진 거대한 상단 때문이라고 했다.
상단 하면 돈이고, 돈 하면 인맥인 법.
그걸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사는 당연히 결혼이고.
그런데 만약에 디엘렌 영지하고 한참 먼 곳에 대공가의 결혼식이 열린다면?
아무리 알레로 가 상단과 친한 가문이라고 해도 대공가의 결혼식엘 가지 누가 백작가의 결혼식에 참여하겠는가?
“……그럼 디엘렌 가에 하객이 거의 안 가겠네요.”
괜찮은데? 리벨은 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곳에 기어이 하객으로 간 자들의 이름은 적어 오면 그만이고.”
그거 혹시 리엔 황태후판 데스노트 아닙니까? 리벨은 살벌한 말에 다시 진땀을 흘려야 했다.
“어때?”
멍청한 놈들이 데스노트에 적히지만 않으면 피도 안 보고 엿은 완벽하게 먹일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긴 했다.
확실히…… 끌리는 방법이었다.
리벨이 침을 꼴깍 삼켰다.
롤란드 그놈이 결혼으로 가지려던 건 명예와 인맥이다.
하지만 이 계획대로라면 그의 결혼식은 인맥 교류와 축제의 장이 되기는커녕 장례식처럼 조용해질 것이다.
“시스 경만 괜찮으면요.”
리벨이 눈을 반짝였다. 전 좋습니다! 완벽해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스테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리벨이 만족하신다면 괜찮습니다.”
리엔은 그 간단한 말에도 주접을 떨었다.
“세상에, 이름도 부르는 사이야?”
리엔 황태후가 이렇게 호들갑이며 주접을 떠는 모습은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리벨은 그 모습에 볼을 긁적였다.
리엔 황태후도 결국 아들 사랑 지극한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좀, 유별날 뿐이지.
“근데 그렇게 소문내면…….”
그 모습을 보다가 리벨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공가의 결혼을 한 달 후로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주목이야 받을 것이다.
“저쪽에서는 결혼을 미루려고 하지 않을까요?”
이쪽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적게 이슈가 될 디엘렌 가는 결혼을 미루기가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그럼 엿 먹이기도 실패였다.
그걸 막을 방법은 하나.
리벨은 조심스럽게 리엔을 돌아보았다.
“혹시 부탁 한 가지만 드려도 될까요?”
“말해 보렴.”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리엔은 그녀의 부탁이 뭔지 짐작한 듯했다.
시스테인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는 심지어 바깥의 시종을 손짓해 부르기까지 했다.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생각에 결론까지 내려 움직이는 신묘한 사람이었다.
리벨은 그런 그를 보다가 말했다.
“귀족가의 결혼은 황가의 의전원의 허락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아.”
리엔은 깍지를 낀 손등에 턱을 괸 채 웃었다. 더 말해 보라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벨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혼 날짜를 바꾸려면 의전원에서도 동의해야 하고요.”
물론 그 동의는 어렵지 않았다. 의전원에서는 서류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의전원도 황가에 있는 부서. 다시 말해……. 황태후 리엔의 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었다.
리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일 디엘렌 가에서 결혼을 미루려고 하면, 그걸…… 혹시 막아 주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권력에 기대어 봅니다. 리벨은 아련하게 생각했다.
불법도 아니고 그냥 결혼 미루는 걸 반대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 파급은 ‘디엘렌 가에만’ 엄청날 테지만.
그녀의 말에 리엔 황태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물론이야. 의전원 아이들은 내가 잘 돌볼 테니 걱정 말고.”
예? 돌본다는 게 어떤 의미죠? 아주 살벌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이야기 들었지? 의전원에 가서 전하렴.”
리엔은 리벨이 눈을 크게 뜬 사이, 시종 한 명에게 말했다.
시스테인의 손짓에 다가왔던 시종, 아니, 황태후의 그림자가 그 말에 묵례하곤 소리 없이 사라졌다.
“결혼이 앞당겨진다고 소홀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걱정 말고.”
걱정한 적도 없었습니다! 리벨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결혼식을 졸속으로 준비해도 황가에서 준비한 것이다. 디엘렌 가보다 조촐할 리가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리벨이 밝게 웃었다.
제 앞에 다가올 거대한 돈지X의 파도를 짐작도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 끝나 갔다.
“그럼 종종 부를 테니, 또 보자, 아가!”
리엔 황태후의 배웅을 들으면서, 리벨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디엘렌 가의 불량배와 관련된 기사는 좀 늦게 터뜨리는 게 좋겠다고.
디엘렌 가를 확실히 묻으려면 결혼 전에 터뜨리는 거보단 결혼 후에 터뜨리는 게 나았다.
저쪽 결혼식이 흐지부지됐을 때, 결정타로 날리는 거지!
리벨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문득, 점점 간이 부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마치 친어머니처럼 해사하게 웃는 리엔을 돌아보았다.
……다시 긴장하자.
제게 아무리 어머니처럼 대해 준다고 해도 그녀는 철혈의 마녀라 불리는 황태후 리엔이었다.
호랑이 굴은 정신을 차리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황태후 리엔의 손길에서는 불가능했다.
리엔은 새삼 긴장을 되새겼다.
그렇게 순조롭게(?) 복수의 서막은 열리고 있었다.
* * *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싶더니, 사소한 문제가 생긴 건 황궁을 나서면서부터였다.
“기자와 곧 인터뷰를 해야겠군요.”
시스테인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리벨도 생각했던 전개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신문사에 연락을 넣으면 되겠죠?”
최대한 모른 척! 기사 같은 거 잘 안 다뤄 본 척!
리벨이 힘쓰는 가운데 시스테인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예. 괜찮으시다면 제가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오, 시스테인과 친한 기자가 있었나?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어떤 기자한테 연락을 넣으시려고요?”
“그야.”
시스테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디란타의 소식에 가장 밝은 자에게 넣어야겠지요.”
그 말에 리벨은 아주 잠깐 멈칫했다.
내 소식에 밝은 기자? 슈? 아니면, 설마…….
리벨이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려 애쓸 때 그녀의 머리 위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져 내렸다.
“벨이라는 기자에게 연락해 보려 합니다.”
흐읍, 얼굴에 힘! 리벨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실 뻔했다.
나? 아니, 벨 기자? 리벨의 머릿속은 활활 타오르기 직전이었다.
거기에 시스테인은 담담한 얼굴로 기름을 끼얹었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에는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
?????
물 흐르듯 나오는 말에도 리벨은 생각이 멈춰 버렸다.
“인터뷰를……요?”
아니겠지? 인터뷰 기사에 사진만 같이 나오는 거겠지?
마치 대결 구도처럼 나란히 사진이 올라간 나와 의전원 사람처럼 그렇게 올라가는 거겠지?
“예.”
시스테인은 시종일관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리벨은 그의 표정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왠지 아까보다 좀 더 화난 것 같은데? 이 악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걸리면 죽을 것 같은데?
다시 리벨의 진땀 타임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기자 벨과 리벨 이벨라, 시스테인이 함께하는 삼자대면…… 아니, 일대일 대면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 벨 기자가, 그…….”
일단 리벨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척! 곤란해하는 척!
알아줘요, 시스테인! 나의 곤란함!
“그…… 기자죠?”
리벨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제 밤 능력이 부족하여 라이아 약초를 구한다는 기사를 쓴 기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걸 그렇게 또박또박 기억하고 있을 노릇이냐고!
그럴…… 노릇이겠지…….
리벨의 심장에 싸늘한 사망 플래그가 날아와 꽂혔다.
진짜 벨인 거 걸리면 죽는 걸로 안 끝난다!
이 사람 뒤끝 있는 거 처음 봤어!
리벨은 애써 빙그레 웃었다.
일단 걸릴 위기도 걸릴 위기인데 당장 눈앞에 닥친 삼자대면(?)의 위기부터 막아야 했다.
벨…… 벨 절대 지켜! 두뇌 풀가동!
“그런데 벨 기자가 안 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최대한 남 일인 척! 벨이랑 모르는 척! 벨의 심리를 짐작해 보는 척!
“기자들은 특종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리벨은 그의 말에 오히려 고개를 마구 저어 주고 싶었다.
특종이 좋은 것도 사실이고, 대공의 결혼에 대한 기사를 처음 낸다면 당연히 유명한 기자가 되겠지만 그건 벨이 아닐 때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벨도 살고 싶답니다!
마치 죽고 싶은 것처럼 그딴 기사를 써 댔지만 그때는 사정이 있었다니까요!
리벨은 정말 울고 싶었다.
“특종이 아무리 좋아도……. 대공 전하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쓴 기자잖아요.”
곤란한 얼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얼굴! 그런 얼굴로 리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기사를 썼는데, 대공 전하께서 함께 자리하신다고 하면 올까요?”
“그자는 취재를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거느린 기자들을 시켜 인터뷰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변신해서 인터뷰하는 것 때문에 저런 소문을 내 놓기는 했다.
그래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도 인터뷰를 하기가 쉬우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저도 그렇게는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아래에 있는 기자라도 안 나오고 싶을 것 같은데…….”
내일 아플 예정이라고 미리 드러누울 것 같은데……. 없는 병이라도 만들 것 같은데……. 리벨이 슬쩍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세요. 벨 기자가 받아야 할 전하의 분노를 본인이 받는다고 생각하면 누가 나오고 싶겠어요?”
“…….”
시스테인은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군요.”
리벨은 그 모습을 보면서 더욱 울고 싶어졌다.
시스테인은 결국 본인이 벨한테 분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리벨이 또 부릅니다……, 잘못된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