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이 결혼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시아스타 섬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군대 사열식이 아니었다.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각 잡힌 분위기는 군대 사열식을 방불케 했다.
하객들은 끝도 안 보이는 넓은 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축사를 하는 건 무려…….
“내 아가들이 보다 편하고, 보다 행복한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
해사하게 웃는 황태후 리엔이었다.
황송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하객들은 감히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사람들의 심장이 들썩거렸으니 당연했다.
“앉으라니까.”
결국 축사를 하던 리엔 황태후가 손짓했다.
버진 로드에 서 있는 리벨은 흘끔 하객들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그들은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 식장에서 평온한 건 오직 시스테인 하나뿐이었다.
군대 사열식 분위기라 익숙해서 그런 건지 시스테인은 정말 하나도 떨지 않는 얼굴이었다.
“…….”
아닌가? 리벨은 그를 살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유독 말이 없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한 손이 유독, 뜨겁기도 했다.
그녀가 시스테인을 살피는 사이, 하객석에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어, 어찌 황태후 폐하께서 서 계시는데 감히.”
예의범절이 지나치게 장착된 말에 리엔 황태후가 혀를 찼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신랑과 신부를 제하고 이 식장에서 내 허리 위로 올라오는 것들은 모조리 잘라 버리라고 명하지.”
―탁!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객들은 일사불란하게 착석했다.
그러게 그냥 앉지들 그러셨습니까?
리벨은 그 소리를 들으며 베일 아래에서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난 의례적인 말은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짧게 이야기하지.”
그제야 리엔 황태후의 제대로 된 축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손을 펴 보였다.
“황가를 귀한 피라고 부른다지. 그리 부르라 한 적도 없건만 어느새 붙은 말이 그러해.”
리엔 황태후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우리 아가가,”
그녀의 시선이 리벨을 향했다. 리벨이 멈칫했다.
왜왜왜요? 설마 제 핏줄은 안 귀해서?
“어느 가문 출신인지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 있더구나.”
……아, 이거 축사였지.
리벨은 새삼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하객석에는 반대로 긴장이 가득 찼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리엔 황태후의 해사한 미소가 식장을 밝히는 듯했다.
“난 진심으로 대공비가 오로지, 리벨 폰 디란타로서 사랑받기를 바라.”
리엔 황태후가 리벨과 시스테인에게 손짓했다.
“결혼, 축하한다.”
―짝짝짝짝!
하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아무리 봐도 이건 군대 사열식이었다.
하필 앉을 자리가 없어, 황태후의 허리 위로 올라오지 않기 위해 그대로 주저앉아 있던 주례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 그럼 모두, 이 귀하고 아름다운 한 쌍의 가약을 응원해 주십시오.”
머리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보니 저러다가 조만간 쓰러질 기세였다.
“…….”
그사이 시스테인과 리벨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스테인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리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워 주었다.
“…….”
시스테인의 손길은 언뜻 보면 세심하게도 보였다. 리벨의 손 아래를 받치고 반지를 끼워 넣는 보습이.
“오오…….”
“역시 사랑은 뭐든 녹이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객들이 감탄했다. 하지만 리벨은 입만 웃고 있었다.
혹시 이게 녹은 걸로 보이십니까?
가까이에서 본 시스테인의 섬세함(?)은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었다.
당연히 사랑스러운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곧 리벨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반지를 끼워 주는 모습은 젠가 블록을 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저 안 부러지거든요?
그때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이건 당신과 내가 부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가 하는 말은 제국에서 결혼할 때 남편들이 전통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말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주례의 검은 머리 파뿌리 같은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겠다.
리벨은 당연히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듣자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젠가 블록 뽑듯이 섬세하기 그지없게, 그러나 감정 없게(...) 손에 반지를 꽂아 주는 사람이라도, 이 말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이 반지를 누군가 억지로 빼려 한다면,”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말이기 때문일까, 유독 그 말에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입 밖에 낸 말은 지키는 그의 성정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 이름과, 가문의 명예를 걸고 그자를 벨 것입니다.”
말을 끝낸 그가 리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쪽.
반지 위에 입을 맞추는 작고 달콤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울렸다.
홀이 넓기 때문일까, 그 소리는 멀리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리벨은 더 기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반지 옆으로 살짝 닿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때, 살짝 고개를 숙여 묵례한 그가, 몸을 일으켜 긴 신부의 베일을 걷었다.
“……!”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새하얀 베일 아래에서 눈이 마주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한 달 동안 우당탕탕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새삼스러웠던 신혼이라는 두 글자가 눈앞에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떨리십니까.”
새하얀 반투명한 막 속에 있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그의 말에 리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천리에 정신없이 진행된 결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떨리고……, 무엇보다,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결혼이지만, 사랑받는 결혼 생활을 원치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설마 이게 메리지 블루?
결혼 전후로 온다지만 결혼식 키스 직전에 오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리벨이 갑자기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불쑥 물었다.
“처음이, 아닌데도 말입니까?”
“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소리?
“저 결혼은 처음인데요?”
누굴 재혼으로 만들어요?
베일 아래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줄 알면 사람들은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리벨이 당황한 얼굴로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성큼 리벨에게 다가온 시스테인이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결혼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거……?
“―나와 입 맞추는 것, 말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쏟아지는 숨결과 열기에 리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맞춤이 이렇게 야릇할 노릇인가?
왠지 머릿속에서 잊혔던 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손끝에서부터 조금씩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던 어느 취한 날 밤이.
“아.”
리벨이 살짝 숨을 토해 냈을 때였다.
시스테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코끝을 살짝 맞대었던 시스테인이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
이번에는 훨씬 깊고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모두가 결혼식에서 기대하는 신혼부부의 그런 입맞춤.
리벨의 밭은 숨마저 빼앗아 버리는, 머릿속이 몽롱해질 정도로 깊은 키스였다.
지금 그는 무슨 표정으로 내게 키스하고 있을까.
그 의문은 이내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지워져 버렸다.
―포옥.
“아…….”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의 몸은 시스테인의 단단한 팔이 받쳐 주었다.
몽롱해진 시야를 포기한 리벨이 눈을 감았다.
베일 너머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후후.”
리엔은 제 둘째 아들 부부를 기대에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스가 어떤 표정으로 키스하고 있으려나?
아쉽게도 베일에 가려져서 볼 수 없었다.
리엔은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까 둘이 무슨 이야기 했을까?
……아가한테 물어보면 알려 주려나?
콕 찌르면 통통 튀어 오르는 리벨을 생각하던 리엔이 다시 짙게 웃었다.
무엇을 속삭였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리벨이 저와의 약속을 지켜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